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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이 출근 한 뒤에 노아는 열심히 연락 번호를 외웠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고작 숫자 네 줄뿐이었으니까. 달달 외운 뒤에 노아는 이안이 과연 영화관에서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행복하게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안과 같이 했던 야외플들은 하나 같이 노아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했던 것도 좋았구, 레스토랑에서 했던 것도 참 좋았는데… 아님 정원에서 한 것도…
요즘 노아는 과거의 자신을 만나면 결혼하길 정말 잘했다고 칭찬을 한 가득 쏟아 부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중간에 사건 사고가 좀 있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안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결혼 상대로는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 성격이 좀 안 좋긴 했지만 사람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었고, 노아 자신도 그렇게 완벽한 성격을 가진 건 아니지 않나. 게다가 이안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괴롭혀 주기도 했고 플레이를 할 때도 일방적으로 한 쪽이 희생하는 게 아니라 양 쪽이 다 즐거울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건 어제 이안의 말마따나 자신만 이안을 좋아하게 되면 모두가 두루두루 행복하게 되는 건데. 결혼한 이들이 서로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조건이자 전제였지만 이안과 저처럼 정략결혼을 한 경우에는 좀 많이 달랐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안을 좋아하게 된다면 이라… 잠시 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다시금 이안이 자신에게 사랑한다 말했던 걸 떠올리자 노아가 조금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그 때를 떠올리기만 하면 무언가 꺼려지는 것이 있었기에 금방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만 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몰라. 지금은 말고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그리고 이안 앞에서는 말을 좀 많이 조심해야겠어.
좀 설레는 마음으로 노아는 이안에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기다린 끝에 이안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굉장히 불퉁스러웠다. 약간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를 배경으로 이안은 노아에게 차를 보낼 테니 타고 오라는 이야기를 하고는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끊고 말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의아해하며 노아가 저택 앞뜰에서 대기하던 리무진을 탔다. 익숙한 도로를 달려 리무진이 멈춘 곳은 이안의 회사 앞이었다. 노아가 내리자 비서가 정중히 서서 노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노아 님.”
“안녕하세요.”
한 두 번 얼굴을 보긴 했지만 좀 낯선 비서에게 인사하며 노아가 의아해했다. 보통은 노아를 데리러 오는 것은 다니엘의 몫이다. 아무래도 회사에 뭔가 일이 생기긴 확실히 생긴 모양이었다.
비서를 따라 회장실로 가자,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리자마자 마치 맹수라도 뜬 것 마냥 살벌한 분위기가 바로 느껴졌다. 물론 이 경우에는 그 맹수가 이안일 터였다. 비서가 여기서 기다리시라며 텅 빈 회장실에 노아를 안내하고 바쁘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노아가 회장실 안을 갸웃거렸다. 책상 위에 한 가득 쌓인 서류도 한번 흘깃 들여다 보고, 굉장히 푹신하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보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매번 이안이 일하는 걸 자주 보긴 했지만 한번도 이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앉아 본 적은 없다. 여기가 이안이 하루의 반 절 이상을 시간을 보내는 자리겠지, 아마. 푹 몸을 기댄 노아가 많이 써서 좀 낡은 것 같은 만년필도 한번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한 켠에 가지런히 놓인 영화 티켓을 발견했다.
두 장짜리 티켓을 바라보고 있자니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노아가 괜히 티켓을 툭 건드려 보았다. 이안이 직접 예매했을까? 이안이 직접 영화를 골라 예매했다고 생각하니 어울리지 않았다. 하긴 이안이 아니라 다니엘이 예매했겠지만. 노아가 푹신한 의자에 몸을 뉘이며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을 때쯤에서야 퍽 몹시도 짜증난 얼굴을 한 이안이 들어왔다. 인상을 쓰며 들어오던 이안이 제 자리에 앉아 있는 노아를 발견했다.
“이리와 봐.”
까닥까닥 손짓을 하기에 자리에서 일어난 노아가 소파에 털썩 앉은 이안에게 다가갔는데, 오늘 따라 유독 이안의 소매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커프스 링크가 자꾸 눈에 밟혔다. 저게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다른 것도 더 사다 줄까?
“젠장, 어떻게 된 게 내 아래로는 죄다 멍청이들 밖에 없어.”
노아가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휙 잡아당겨 소파에 눕힌 이안이 대뜸 상의에 손을 넣어 더듬거리며 짜증을 냈다. 여기서 하는 건가 싶어 눈을 깜박이고 있으려니 이안이 피부를 몇 번 살살 어루만지다가 푹 노아를 끌어안고는 거친 숨만 몇 번 내쉬었다가 그도 이내 잠잠히 가라앉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간질거리도록 가만히 숨을 쉬던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회사에 일이 있어서 영화는 못 볼 것 같아. 그래도 저녁은 같이 하도록 하지.”
나가서 먹지는 못하겠지만, 하고 이안이 중얼거렸다. 일이 생기면 어쩔 수 없으니까. 테너도 종종 회사에 급한 일이 터졌을 때는 며칠이고 집에 아예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었기에 노아는 그렇게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괜찮다는 의미로 아무 생각 없이 어깨를 도닥이자 이안이 굉장히 별난 것을 본다는 표정으로 잠시 노아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안의 일이 상당히 바빴기 때문에 둘은 저녁을 일찍 먹었다. 저녁을 먹자고 하기가 무섭게 밖에서 다니엘이 들여온 음식은 갓 레스토랑에서 조리해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따끈따끈했다. 그러고 보니 저녁을 내온 사람이 웨이터 복장을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사온 게 아니라 아예 어디서 사람을 데려다가 만들라고 한 것 같았다.
“난 오늘 집에 가려면 한참 멀었으니까 먼저 가있도록 해. 아니면 나온 김에 근처 좀 돌아보다가 가던지.”
저녁을 먹자마자 몹시 바쁜 다니엘이 내민 서류를 받아 들면서 이안이 제안했다. 그러더니만 서류를 훑어보고는 노아의 대답은 미처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셉 이 머저리가! 하고 짜증을 내며 누군가를 갈구기 위한 것이 분명한 얼굴로 나가버렸다.
뭐, 여기까지 나온 김에 그냥 저녁만 먹고 집에 가기는 좀 그렇고… 그렇다고 딱히 이 근처에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잠시 멀뚱히 소파에 앉아 있다가 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 후에는 역시 커피를 마셔 줘야지. 마침 회사 로비에는 노아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커피점도 있었다.
여유롭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노아가 곧장 카페로 향해 커피 두 컵을 포장 구매했다. 점원이 커피를 포장하는 걸 보고 있자니 지난 번에도 카페에서 똑같이 커피를 샀던 기억이 났다. 그러고 보면 결혼 초기와는 달리 지금 상황은 참으로 많이도 달라졌다. 그 때는 지금같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원래였다면 지금쯤 이혼한 뒤 느긋하게 여유롭고 즐거운 싱글 라이프를 보냈겠지. 하지만 결혼 생활도 썩 나쁘진 않은 걸.
커피 향이 몹시도 좋아서 제 것을 한 모금 마시며 노아가 발걸음도 가볍게 회장실로 돌아왔더니 이안이 잔뜩 인상을 쓰며 무언가 휘갈겨 쓰고 있었다. 이왕이면 되도록 방해하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다가가 커피를 내려 두었더니 이안이 쳐다 보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가서 에버리에게 서류 좀 받아와.”
“에버리가 누군데요?”
노아가 묻자 이안이 번득 고개를 들고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네가 여기 왜 있냐는 표정으로 바라본 이안이 제 앞에 놓인 커피 한 번 노아 한 번을 바라보고는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아직 안 갔어?”
“어차피 집에 가 봤자 딱히 할 일도 없는 걸요.”
노아는 가족 중 누군가가 집에도 오지 못하고 일을 하는 상황에 퍽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 막내 얼굴이라도 봐야 좀 힘이 나겠다는 테너의 말 덕에 회사에서 지내며 기운을 북돋는(?) 일을 하는 것 쯤이야, 뭐… 커피나 간식 좀 사다 주는 것쯤으로 기운이 난다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지금도 한 풀 짜증이 누그러진 얼굴을 한 이안이 홀짝 커피를 마시고는… 팍 인상을 썼다. 입맛에 안 맞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한 모금 더 마시더니 계속 마실 생각인지 앞에 내려 두었다. 노아도 제 커피를 마시면서 소파에 앉는데 이안이 드물게도 조금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 때 그 커피 말이야…”
“네?”
그 때 그 커피라니, 무슨 커피? 노아가 궁금한 얼굴로 바라보자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입을 일자로 꽉 다물고 말았다. 왜 말을 하다가 마는 거지… 그 때 그 커피라면 설마 그… 회사에서 도시락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한 그 날의 그 커피인가? 아, 그러고 보니 그 때 커피도 이안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을 것 같았다. 다음에는 가기 전에 뭘 마실 건지 물어 봐야지…
그 뒤로는 가끔씩 이안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일을 하는 동안 노아는 프랑스어로 된 소설을 읽었다. 가브리엘 사건 이후로는 매일 틈틈이 하루에 꼭 한 시간쯤은 프랑스어를 공부하곤 했다. 당분간은 가정교사는 웬만하면 들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간만에 집중해서 소설을 읽고 있을 때였다. 돌연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앗, 미안해요.”
이안이 눈썹을 찌푸리며 바라보자 진동 소리에 방해가 되었다고 생각한 노아가 사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서 전화를 받으려고 하는데 이안이 먼저 물어왔다.
“누구에게서 걸려온 전화인데?”
“음… 발신자… 미상이요?”
발신자 미상. 그 이름을 보자 노아는 아침에 뜬금없이 귀국했으니 만나자던 문자가 떠올랐다. 이안의 얼굴을 보니 그도 똑 같은 걸 떠올린 게 분명했다.
“나는 상관 없으니까 받아 봐. 전화 통화 따위에 방해 받진 않으니까.”
거만하게 턱을 조금 까닥거린 이안이 다시 우아하게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끈질기게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기에, 방해가 안 된다면야… 하고 노아가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어쩌면 스팸 전화 비슷한 걸지도 몰랐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스팸 전화나 문자도 끊이질 않았다.
“여보세요?”
-아, 노아?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문자에 답도 없고.
낯익은 목소리에 노아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가 입을 조금 벌렸다. 가만, 이 목소리는… 설마… 제임스? 노아가 반사적으로 묻자 건너편에서 새삼 무슨 소리야, 하고 낯익은 목소리가 툴툴거렸고 전화 통화 따위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던 이안이 고개를 번득 들어올리고는 날카로운 어조로 되물었다.
“제임스? 제임스 프레넷의 그 제임스?”
“어? 이안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제임스라고 말하기만 했는데 이안의 입에서 익숙한 풀 네임이 튀어 나오자 신기했던 노아가 물었고, 이안은 도로 아까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노아? 노아? 하고 건너편에서 물어오는 제임스에 노아가 잠시만 기다려 달라 말하고는 이안에게 물었다.
“방해되면 역시 나가서 받을까요?”
“…아니! 전혀 방해 안 된다니까.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전화나 하라고.”
아니, 엄청나게 방해되는 것 같은데… 하지만 본인이 괜찮다니 어쩌겠는가. 이안이 다시 고개를 숙여 일을 하기 시작하는 걸 본 노아가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는 쪽을 선택했다. 어째 드문드문 이안에게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오랜만이네, 어쩐 일이야? 귀국 이야기는 또 뭐고? 그리고 전화 번호 바꿨어?”
-음? 아, 내가 말 안 했었나? 나 반년 전에 여행 다녀왔어. 중간에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번호를 바꿨는데 말 한다는 게 깜박했네.
제임스가 쾌활하게 말해왔다. 제임스 프레넷. 그는 어렸을 때부터 노아와 친하게 지내며 자라온, 이른바 세간에서는 죽마고우라 하는 사이의 친구였다. 정말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내온 터라 서로 온갖 …못 볼 꼴을 보이며 자라온 친구이기도 했다. 게다가 가장 처음으로 노아의 취향을 알아차린 사람이기도 하고.
제임스는 지금처럼 뜬금없이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훅 떠났다가 여행을 다녀오곤 하는 방랑벽이 있는데다가 가끔 좀 건방지기까지 한 면이 있는 친구인데, 그 때문에 이번에 연락이 안 되었을 때도 그저 그러려니 했다. 애초에 주변 사람에게 지독히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한 반년 동안 아는 사람 얼굴을 못 보니까 오늘따라 좀 보고 싶더라고. 오늘 저녁에 만나는 거 괜찮지? 너 클럽 가는 날도 아니잖아.
“어…”
노아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안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한 편으로는 또 제임스를 본 게 굉장히 오래간만이기도 하고. 하지만 제임스가 알파도 아닌 베타니까 괜찮을 것도 같은데… 이안에게 잠시 친구를 만나러 갔다 와도 되냐고 물으려고 고개를 돌린 노아가 깜짝 놀랐다. 분명 방금 까지만 해도 저기 의자에 앉아 있던 이안이 지척에 다가와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안이 딱 잘라서 말했다.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