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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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라고요?”

 다른 사람의 뒷담을 하다가 본인에게 들킨 것이나 마찬가지이기도 한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이안의 태도와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투에 어이가 없던 알리샤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못 들었다면 다시 말해줄까? 뚫린 입이라고 잘도 나불댄다고.”

 “이…!”

 이안의 태도는 사나운 것을 넘어 흡사 위협을 당하고 있는 사람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혹은 좀 초조한 것 같기도 했고… 어쨌든 이안의 표정을 보니 들을 건 다 들은 모양이었다. 알리샤는 살벌하기 짝이 없는 이안의 얼굴에 몸을 파르르 떨더니 이내 턱을 치켜 들었다.

 “왜요, 내가 틀린 말을 했나요?”

 “틀린 말 정도가 아니지.”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심상치 않은 두 사람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점차 수군거리며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알리샤는 제게 모여드는 시선에 좀 당황했지만 이렇게 되자 제 자존심 상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되려 더 거세게 나왔다.

 “그렇게 모른 척 해도 소용 없어요! 다 알고 있으니까. 매각 건뿐만이 아니라 당신이 자주 다니는 그 곳이나 헤더라는 여자도…”

 의기양양해서 말하던 알리샤가 움찔하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이안의 얼굴이 더 없이 싸늘했기 때문이었다. 이안이 차갑게 비아냥거렸다.

 “패터슨도 다 끝났군… 이 따위 계집애를 후계자 따위로 삼다니.”

 “뭐가 어쩌고 어째? 당신 말 다했어?”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서 나름 조용조용히 말하던 알리샤가 결국 제 성질을 못 이기고 폭발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노아가 내심 감탄했다. 제가 가문을 잇겠다고 매일 노래를 부르고 다니더니, 역시 알리샤가 후계자가 되었구나. 하긴 알리샤에 비하면 남동생은 참 순했지. 하지만 역시 그 알리샤라도 이안을 이기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근본 없는 소문만 믿고 다니지 말고 잘 처신해. 네 아버지 언론사를 찌라시나 가십이나 다루는 3류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근, 근본 없는 소문이라니!”

 한번도 당해 본 적 없을 치욕에 알리샤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했지만 너무 열이 받았던 탓인지 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이안이 알리샤보다 더 성질이 더러웠으니까. 게다가 알리샤는 초반부터 기세에서 위압당하고 있었으니 말로 이안을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방금 말한 것들에 대해서… 증거라도 있나?”

 이안의 말에 알리샤가 분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노아에게 시비를 걸 작정으로 말했고, 이안에게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내뱉어버리긴 했으나 애초에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경솔하게 입 밖으로 내면 안 될 이야기들이었다. 게다가 정보를 수집한 경로가 합법적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안이 말하는 것처럼 당당히 증거를 댈 수가 없다.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을 휙 쏘아보고는 알리샤가 이를 악물었다.

 “당신…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가만히 안 있으면? 그리고 모욕을 당한 건 이쪽인데.”

 이안이 제 편을 들어주는 건 좋은데 노아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패터슨 가문이 그다지 사업에 재미를 보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집안에서 패터슨의 눈치를 보는 건 그들이 소유한 언론사 때문이다. 단순한 언론사 이상으로 정보 수집에 있어서는 남 달랐기 때문에 듣기로는 다들 패터슨에게 약점을 하나씩은 잡혀 있다고 했다.

 “오늘 이렇게 함부로 입을 놀린 걸 네 아버지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러나 이안은 그런 것쯤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끝까지 알리샤의 약을 올렸다. 알리샤가 조금 씨근덕거리며 이안을 노려 보았다.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아버지는 그 이상으로 내가 모욕 당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시거든.”

 “그럼 어디 가서 잘 일러 보라고.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도 내 배우자가 모욕 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알리샤 패터슨.”

 끝까지 이안에게 한 번도 제대로 반격을 하지 못한 알리샤가 이안과 노아를 강렬하게 노려보고는 휙 뒤돌아서 총총 멀어졌다. 이안은 가소로운 표정으로 알리샤를 바라보고 있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아까부터 노아를 제대로 쳐다보는 일이 없었다. 

 알리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도 그만 흥미를 잃고 시선을 거두었을 때서야 이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아…”

 짜증스럽게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고 바닥만을 줄기차게 노려보던 이안이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노아를 바라봤다. 패터슨의 말이 사실이라면 현재 이안은 테너에게도, 그리고 패터슨에게도 미움을 사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노아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이안은 그 시선을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 되려 조금 고개를 떨구었다.

 “이만… 돌아가자.”

 이안의 분위기가 몹시 좋지 않아 노아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을 따라 나섰다. 호텔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도로 이안과 노아가 돌아오자 운전 기사가 조금 의아해 했지만 딱히 티를 내지는 않으며 리무진에 시동을 걸었다. 리무진을 타고 오는 내내 이안은 노아에게 몇 번이고 뭔가 말하려 했으나 끝내 말을 걸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이안이 어떤 기분이고 분위기던 간에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을 테지만, 아까는 이안이 자신의 편을 들어 준 게 명백한 터라 덩달아 노아도 기분이 좀 축 쳐져 버렸다. 두 주인 부부의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은 걸 재빨리도 알아차린 고용인들은 오늘따라 몹시도 행동이 조용했다.

 “저기, 노아…”

 “네?”

 부부 침실에 들어섰을 때 이안이 노아의 팔을 잡았다. 노아가 어리둥절해서 바라보자 이안은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노아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나 한참 만에 이안이 겨우 내뱉은 말은 미안하다는 한마디뿐이었다. 미안하다니… 대체 뭐가?

 “피곤하겠네. …난 할 일이 있으니까 먼저 자도록 해.”

 노아에게서 나올 말이 두렵기라도 한 듯 이안은 서둘러 침실을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자 노아가 휴, 한숨을 쉬었다. 아까 이안이 알리샤를 완전히… 음… 뭐라고 해야 하나, 깔아 뭉개버렸을 때는 퍽 좋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영 기분이 찜찜하다. 자신 때문에 이안이 큰 손해를 입은 것만 같았으니까… 그냥 알리샤 하는 말에 맞장구나 쳐 줄걸, 괜히 일이 커졌네.

 결국 안절부절 못하던 노아가 핸드폰을 들어 윌리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그렇게 늦은 밤이 아니었기 때문에 두 세 번의 통화 음 끝에 금새 윌리엄이 전화를 받았다.

 -노아? 무슨 일이야?

 “안녕, 윌. 저기, 나 뭐 좀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

 노아에게서 오늘 크리스탈 자선 모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자초지종을 들은 윌리엄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음, 하는 소리와 함께 대답을 들려 주었다.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많이 화 나시긴 했지. 알리샤 패터슨이 말한 것처럼 어떤 면에서 보았을 때는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리겠다는 걸로 밖에 안보이거든. 확실해지기 전까진 네게 말 안 하려고 했지만… 아마 이번 달 내로 아버지께서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실까 해.

 “역시 그렇구나…”

 노아가 시무룩해졌다. 이안이 사서 적을 만드는 타입이란 건 알고 있지만 이번에 테너와 알리샤의 경우에는 그 둘을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자신이 분명 일조를 했지 않은가. 물론, 고의는 아니라고는 해도 자신이 졸지에 이안을 이용하다가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역할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알았어, 대답해 줘서 고마워, 윌.”

 -곤란한 일이 있으면 말해주렴.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까.

 “으응… 다음에 봐.”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한 윌리엄에게 잘 자란 인사를 해준 노아가 전화를 끊고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되도록 한참을 고민한 끝에서야 노아가 겨우 결론을 내렸다. 더 이상은 처음과 다르게 결코 노아도 이안도 좋을 수가 없었고, 이안이 자신을 좋아하는 게 명백하니 노아는 더 이상 이안을 속이고 싶지도 않았다.

  결혼을 한 지 세 달 째. 노아는 이제서야 이안에게 이혼을 요구할 다짐을 했다.

 ***

 노아가 이안과 이혼을 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린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애시당초 이혼을 할 계획이었던 것도 그렇지만, 이번 크리스탈 자선 모임에서 있었던 일도 일이었다. 또, 만약 이혼을 해야 한다면 그래도 아직 이안이 자신을 좋아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 그나마 낫지 않을까 하는 조금 이기적인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이혼을 하고 나면 노아는 아버지에게 가능한 말을 잘 해볼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이 이혼에 있어서 제 실책과 의지가 큰 것처럼… 어쨌든 노아는 저택에 있는 내내 이안 덕에 즐겁게 보냈으니 최소한 그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나. 아버지도 이혼 당한 것보다는, 제가 이혼을 요구한 쪽이 좀더 나으실 테니까.

 하지만 막상 이혼을 요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이안에게 이혼하자 말하는 게 영 쉽지만은 않았다. 알리샤 패터슨 때문인지 최근의 이안은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금 이혼 하자고 말하는 건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이혼을 다짐하고 난 뒤 며칠이 지난 후에서야 노아는 겨우 용기를 내어 이안의 서재를 방문할 수 있었다.

 똑똑 노크를 하자 들어와,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노아가 슬며시 안으로 들어가자 이안이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하긴 요즘엔 이안의 서재에 별로 방문할 일이 없었지.

 “무슨 일이야?”

 “그게, 말할 게 있어서요…”

 머뭇거리며 다가가자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를 고개로 까닥였다. 노아는 소파로 가면서 흘깃 이안이 아까까지 일하고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안녕, 추억 어린 책상… 지난 번에 여기서 참 재미 좋았는데… 마치 아주 옛날인 것처럼 느껴지네…

 “무슨 할 말?”

 “그러니까…”

 오늘의 이안은 그럭저럭 상태가 괜찮아 보였지만 그 동안 이안의 성격이 얼마나 나쁜가를 지켜 봐왔기에 노아는 좀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자신이 이혼 요구를 망설이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다른 이유는 접어 버리고 마침내 노아가 입을 열었다.

 “우리, 이혼… 했으면 좋겠어요.”

 조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안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노아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이혼 하고 싶다고? 이안의 반문에 노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네?”

 이안의 분노를 대비해 긴장하던 노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알았다니… 아니면 그건가,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은 거. 워낙 이안의 대답이 예상 밖이기에 노아가 눈을 깜박였다. 아니면 문자 그대로 이혼 해준다는 이야기인가? 그 사이 마음을 바꾼 걸지도 몰라. 혹은 좋아한다고 생각한 게 내 착각일지도…

 그런데 노아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 이안의 눈은 무언가 시커먼 것으로 끓어 오르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이안이 아무 말도 없어 노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더 이었다.

 “그러니까, 저기… 이안이… 제 아버지에게 복수하려고… 결혼한 거라면서요… 아니에요?”

 “아니, 맞아.”

 거의 뻔뻔하기까지 한 태도에 노아가 입을 조금 벌리고 바라봤다. 이혼 해준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그런데 그 사이 이안이 연타를 날렸다.

 “내가 네 아버지에게 복수할 목적으로 결혼 한 걸 알았는데, 그게 뭐?”

 그, 그게 뭐냐니? 정말 이안이 날 좋아한다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나? 세상에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있을 수가… 그 동안의 내 죄책감은? 나, 왕자 병이라도 있었나 봐… 온갖 생각에 갈팡질팡하던 노아는 저를 무섭게 노려보는 이안의 표정에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뺐다. 언제부터인가 이안의 알파 페로몬이 지독히도 풀려 나오고 있었다. 그건, 이안이 감정적으로 몹시 흥분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내가 저번에 말했었지. 이혼할 수 있는 건 그게 마지막 기회라고...”

 “으…”

 이안의 페로몬에는 익숙해져 있던 노아지만 지금은 이 페로몬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조금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안의 얼굴은 지독히도 무표정한데 어떻게 눈에서는 온갖 감정들이 넘실거리는지 노아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 네가 못 견뎌 스스로 저택에서 나가도록 괴롭혔었지. 네가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즐겼고, 결혼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과 자기도 했지. 짓밟고, 범하고 울게 했어… 그런데 그게 뭐? 아무리 그래도 넌 이혼 못해.”

 노아가 몸을 떨며 마른 침을 삼켰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사나운 맹수 앞에 놓인 짐승의 심정이 마치 지금과 같았을까…

 “네가 아무리 나를 싫어하고 증오스러워 해도, 아니면 두려워 해도… 못한다고.”

 거뭇하게 번들거리던 이안의 눈동자가 무언가로 얼룩지며 조금 흐려졌다. 노아는 홀린 듯이 이안의 눈을 바라봤다. 이전에도 몇 번 이렇게 아무런 생각도 못하고 이안을 바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이안의 외모가 제 취향이거나 잘 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격한 감정에 휘말릴 때의 이안의 눈은 굉장히…

 “널 사랑해, 노아.”

 노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차갑기만 한데 이상하게도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극히 절절히 끓어 오르는 듯한 이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게 한 짓을 후회해. 차마, 용서 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 하지도 않아. 내가 보기 싫다면 이 저택에서 나가주지. 하지만 내가 나가도, 넌 안 돼.”

 알겠어? 넌 안 된다고. 쐐기를 박는 말에 노아는 차마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이안의 눈을 피하고 말았다. 이안이 자신을 억지로 범하거나 괴롭히려고 하는 상황도 아닌데 몸이 떨렸다. 노아가 시선을 피하자 이안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빠득 이를 악물며 당장에 서재를 나가버리고 말았다.

 쾅, 하고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거세게 닫히는 문소리에 덜컹 하더니 제 가슴이 이상하게 울리기 시작해서, 노아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생각했다. 어… 이거, 완전히 계획이 망해버린 거, 맞지? 

 그런데 어째서 큰일 났다는 생각은 안 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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