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그 순간 뭘 생각할 겨를도 없어 이안은 일단 문을 열고 보았다. 무언가 대단히 크게 박살 나는 소리가 제 명치에 와 박히는 것만 같아 이안의 온 몸이 본능적으로 팽팽하게 긴장하며 페로몬을 응축해 풀 채비를 하였다.
거의 문을 박살낼 정도로 거세게 들이닥친 이안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던 억측에 가까운 상상 중에서도 최악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가브리엘에게 깔려 있는 노아를 보는 순간 이안은 분노에 뵈는 것이 없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아주 잘 깨달았다.
보통 폭력 사건에서 가장 많이 연루되는 인종은 알파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혈기 넘치는 사춘기 시절의 알파는 때로는 사회의 불안 요소로 지목되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격적인 성향은 그만큼 제 것에 대한 알파의 소유와 보호 욕구가 얼마나 강한 지를 나타내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안도 알파의 그런 특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서 가브리엘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 속에서 극단적인 적개심이 강렬하게 치밀어 올랐다. 엎어져 박살 난 장식장,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테이프가 발라진 입이나 무엇인지 모를 것에 의해 뒤로 묶인 노아의 손 하나하나가 당장 가브리엘을 갈기갈기 찢어 놓으라고 이안을 부추기고 있었다. 영락없이 현장을 들키고만 가브리엘이 소리 질렀다.
"노아는 내 거야! 내 거라고...! 내가 먼저...!"
"문 닫아."
이안이 저택에서 누군가를 잔혹하게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경비들이 놀라는 기색 없이 당장 문을 닫았다. 이안의 친척 중 반이 도로 뺏긴 재산에 따지고 협박하러 왔다가 도리어 기다시피 저택을 도망쳐 나간 게 몇 번이던가. 개중에는 꼴사납게 소변을 지린 자들까지 있었다. 그리고 이안은 가브리엘이 기어다닐 수 있게 만들 생각도 없었다.
이안은 간신히 인내심을 발휘하여 거의 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노아에게 제 코트를 덮어줄 수는 있었지만 그 행동 이후로 그의 인내심은 끝이었다. 감히 제 것을 탐하려고 한 자에 대한 무시무시한 분노는 상대가 오메가라고 해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안은 곧장 잔인한 폭력을 가브리엘에게 쏟아 내었다. 가브리엘이 대항하려 몇 번 주먹질을 하고 발로 걷어 찼으나 이안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 가소로운 고통은 오히려 이안의 분노를 더욱 키울 뿐이었다. 그런 이안의 폭행을 멈춘 것은 노아가 끙끙거리며 내는 소리였다. 이안은 그제서야 노아가 퍽 불편한 상태일 것임을 가까스로 인지했다.
일단 가브리엘을 내려두고 난 뒤 이안은 노아의 결박을 풀었다. 노아의 입에 덧대어진 테이프 뿐만 아니라 안에 물린 손수건까지 보건데 가브리엘은 상당히 치밀한 놈이었다.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자 이안은 명치 부근이 끓어 오르는 것 같았으나 간신히 참았다…
그러나 수갑을 푸를 때에 이르러서, 감히 이 어리석은 자가 처지도 모르고 싫다는 소리나 지껄이기에 이안이 참지 못하고 창문에서 던져 밀어 버리려고 할 때였다. 가브리엘에게 그러지 말라는 의도가 명백한 어조로 노아가 제 이름을 부르자 이안은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도 없는데다가 한 편으로는 질투까지 솟아 올라 이를 악물었다.
“설마 내가 저 녀석을 봐줘야 한다느니 같은 소리는 하지 마.”
“봐, 봐달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아버지가, 이런 일을… 아시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가해자는 분명 저 자식일 텐데도 피해자인 노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작게 말하는 걸 듣고 이안은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 같았다. 테너 프로스트. 제가 노아를 괴롭혔던 이유였지 않나. 그리고 노아도 마찬가지로 왜 이안이 자신을 이토록 괴롭히고 있을지 알고 있을 이유이기도 했다… 가해자는 가브리엘 뿐만이 아니라, 자신까지도 포함되는 것임을 이안이 새삼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런데도 자신은 지금 얼마나 노아에게 이기적으로 굴고 있나. 노아가 거의 반 벗은 상태로 수치스럽게 놓여 있는데도 이안은 제 분노에 급급해 가브리엘에게 제 분노를 풀어놓는 것에 열중하고만 있었다.
그제서야 겨우 이성을 되찾은 이안이 가브리엘에 대한 분노는 뒤로 미뤄둔 채 입을 꽉 다물고 노아를 돌보았다. 중간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매를 맞은 것이 틀림 없는 흔적을 보고 다시 마음이 흔들렸으나 이안은 더 이상 후회할 일을 늘리고 싶지 않았기에 먼저 노아의 안정과 치료를 우선으로 했다.
침실로 노아를 데려가 치료를 하는 동안 이안은 케인으로 맞은 게 분명한 엉덩이에 이를 악물었다. 이전에는 이렇게 매를 맞은 엉덩이를 보았을 때 노아를 더 괴롭히고 싶기만 했다. 노아가 귀엽게 우는 것을 보고 싶은 건 요즘도 마찬가지였으나... 지금의 이안은 결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들 수가 없었다.
“저, 가브리엘은…”
끝까지 가브리엘에 대한 일을 걱정하는 노아를 보자 무언가 울컥 치솟아 오르는 걸 억지로 누른 이안이 겨우 평이한 어조로 알려질 일은 없으니 걱정 말라 대답할 수 있었다. 겨우 노아의 치료를 마친 이안이 노아에게 푹 쉬라 하며 방을 나섰다.
그는 이 끔찍한 기분을 풀 곳이 필요했다.
***
“여기 있습니다.”
다니엘이 거슬리지 않도록 아주 조용히 오늘 Tear의 관리자에게서 받아온 서류를 이안에게 내밀었다. 이안이 손짓으로 다니엘을 내보내고 무표정하게 서류 봉투를 뜯어 열었다. 그가 미하일에게 의뢰한 가브리엘 후퍼에 대한 정보였다.
이안은 지금 같은 기분에서는 가브리엘을 죽여 버릴 것 같아 일단 가브리엘은 가두어두고 자신은 회사로 돌아왔다. 가브리엘을 죽여 버리면 곤란하게 된다. 그건 뒤처리가 곤란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은 굉장히 관대로운 처사였다. 세상에는 차라리 죽음을 바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안은 결코 가브리엘을 조금이라도 편히 살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흉흉한 제 모습에 사람들이나 다니엘이 보고 놀랐지만 지금의 이안에게 다른 사람은 알 바가 아니었다.
미하일의 서류를 내려다 보던 이안의 얼굴이 점차 싸늘하게 굳었다. 가브리엘 후퍼. 나이는 34살로 지극히 알파 우월적이기로 유명한 집안의 장남으로 아래에 알파인 동생 둘이 있었다. 집안의 차별적인 대우에 알파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써 있었으나 이안에게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분노를 삭히기는커녕 일부러 불리도록 내버려 두며 이안이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먹을 듯 모조리 읽었다. 가브리엘은 성인이 되어 대학에 진학한 후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왔다. 그 후로는 프랑스어 가정 교습을 주된 직업으로 삼으며 활동해 왔다고 쓰여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정보는 그 다음에 언급되어 있었다.
가브리엘은 15세에 12살의 어린 여자 오메가의 추행 혐의로 체포 당했다가 합의로 풀려 났고, 17세에 15살짜리와 성관계를 한 일에 대한 소문이 퍼진 후로는 부모가 아예 먼 곳으로 전학을 시켜 버렸다. 그 뒤 대학교 졸업을 할 때까지는 비교적 얌전히 지냈으나 졸업 후부터는 달랐다.
그는 25살에 16살 여자 알파를 과외 중에 성적으로 학대한 일로 기소가 되었지만 집안에서 막대한 합의금을 물어주며 덮었다. 그 후로는 아무런 기록이 없었지만 가브리엘에게 가정 교습을 받은 이들은 하나 같이 심한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거나, 혹은 돌연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리고는 했다. 개중에는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 가브리엘이 마지막으로 가르친 사람은 다름 아닌 노아 프로스트였다. 이제까지 가브리엘의 다른 학생들이 몇 달을 채 견디지 못한 것에 비해 4년이라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노아는 가브리엘의 가정 교습을 받아 왔었다…
4년. 저와 결혼하기 바로 직전까지의… 4년이었다. 이안의 손 안에서 서류가 구깃 구겨지며 파르르 흔들렸다. 제 마음 속을 턱턱 검게 채우는 묵직한 것을 일단 외면하려 애쓰며 이안이 다음 서류를 넘겨 보았다. 노아가 결혼한 뒤로 최근 가브리엘의 동태를 조사한 내용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노아를 가르쳐준 보상으로 프로스트 가에서 많은 보상을 받은 가브리엘은 Tear를 잠시 전전했다가 이내 다른 클럽에서 죽을 치며 살았다. 하나 같이 암암리에 미성년자를 ‘제공’하는 곳들이었다.
어떻게 프로스트 가에서는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막내 아들이 학대 당하고 있음을 모를 수가 있었을까? 오메가를 무슨 가련한, 꺾어 소유하기 쉬운 꽃 쯤으로 착각하는 멍청한 놈들은 많았다. 테너 프로스트도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으리라… 어떻게 감히 순종적이기 짝이 없는 오메가가 다른 누군가를 해할 수 있겠느냐고. 그리고 마침내 이안이 마지막으로 최근 가브리엘이 노아에게 보내왔던 문자 내역에 이르렀다.
[이렇게 날 무시해서 좋을 일이 없을 텐데.]
[네 알파나 가족들에게 내가 이 사진을 보내면 반응이 어떨까?]
[흠 있고 깨끗하지 못한 오메가를 좋아하는 알파는 세상에 아무도 없어.]
가브리엘이 보낸 협박 사진까지 빠짐없이 본 이안이 참지 못하고 서류를 내팽개쳤다. 그는 가브리엘 후퍼를 절대 편히 살지 못하게 만들 것이었다.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인생 자체를 지옥으로 만들어 주리라… 그 어느 곳에서도 가브리엘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안은 노아가 어째서 자신의 가혹하고도 거친 관계에도 저항하지 않고 순종했는지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노아는 저항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갓 성인이 되었을 때부터 저와 결혼하기 전까지를 가브리엘에게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했으니 그 사이 노아에게 무슨 말을 하며 세뇌를 해왔을 지는 가브리엘이 노아에게 보낸 문자만 봐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가브리엘 때문에, 노아가…
그러나, 자신은? 이안이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가브리엘 때문만이라고 말할 수 있나? 자신은 노아에게 대체 무슨 끔찍한 짓을 했단 말인가? 이제 겨우 제 가정 교사에게 벗어나 결혼이라는 것을 한 노아에게, 그리고 제가 좋다고 말해왔던 그에게 무슨 짓을 했나. 가브리엘과 한 치도 다를 것 없는 짓을 했다. 결혼 첫 날에 노아가 자신의 행동에 얼마나 좌절했을 지를, 그리고 오메가란 원래 이런 일을 감내해야 마땅하다고 여기며 체념했을 노아를 생각하자 이안은 제 가슴이 조각조각 부수어 지는 것만 같았다…
평범하고 다정한 섹스를 오히려 노아가 기피하는 건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노아가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되려 이상한 관계였을 테니까. 어쩌면 제가 노아에게 제 딴에게 다정하게 군 것도 노아에게 있어서는 가증스럽게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안은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노아…”
이안이 겨우 한 마디를 내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를 악물며 결국 고개를 숙여버린 이안의 아래로 툭 뜨거운 것이 떨어져 노아를 협박하던 가브리엘의 문자 내역을 적시었다. 이안은 감히 앞으로도 노아에게 미안하다는 말 조차 꺼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
“젠장, 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거야!”
가브리엘이 화를 내며 전화기를 집어 던졌다. 씩씩거리는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멀쩡했으나 바로 일주일 전만해도 코피며 멍으로 잔뜩 부어 있던 상태였다. 얼굴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이안과 경비에게 맞은 자국으로 얼룩덜룩 한 것을 가지고 있던 피부 재생 연고로 겨우 멍 자국을 없애 놓았다.
그는 이번이 굉장히 재수 없는 경우라고 생각했다. 그 동안은 제가 다른 사람을 예뻐해 주었을 때 보호자들에게 들킨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만에 하나 들키게 되었더라도 집안의 명예가 손상되는 걸 꺼려한 부모가 덮어주었으니까. 오메가란 이유로 다른 형제들을 내도록 편애했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지못해 합의금을 지불할 때마다 그 얼굴이 얼마나 통쾌 했던지...
“빌어먹을, 노아…”
수치스럽게도 이안 밀러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 다니며 목숨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얻어 맞았을 때를 떠올린 가브리엘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리고 약한 아이들이면 모를까 일부러 성인 알파들은 피해 다녔기에 가브리엘은 단 한번도 그렇게 지독한 페로몬에 위압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 순간은 정말 죽겠구나 싶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가브리엘은 노아 프로스트가 아깝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노아를 어떻게 길들여 놓았는데, 그걸 아무런 노력도 없이 이안 밀러가 한 입에 삼켜버릴 것을 생각하니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프로스트 가에서 받은 돈으로 클럽을 다니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는 하였으나 노아만한 사람이 도통 없었다.
마침 돈도 다 떨어졌기에 돈도 뜯어낼 겸 협박 문자를 보냈지만 수십 수백 번을 보내도 노아는 답장 하나 없었다. 번호를 바꿨나? 아니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나? 그 동안 혹시나 증거가 남을까 그 동안 동영상은커녕 사진 한 장, 삽입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던 가브리엘은 그 아름다운 몸을 빌어먹을 알파가 차지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참을 수 없어 결국 노아 프로스트를 찾아가고야 말았다.
자신이 너무 부주의하게 행동했다고 가브리엘이 몹시 후회했다. 기회가 날아갔을 뿐만 아니라 알파에게 걸려 이렇게 치욕스럽게 얻어 맞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무리 부모의 편애가 있었다고는 해도 가브리엘은 기본적으로는 못 하는 것 없이 편히 자라왔다. 남들을 때리면 모를까 남에게 맞아 본적은 없었다.
이안 밀러가 제게 보내는 시선만으로는 틀림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자신을 풀어 준 걸 보면 분명 그도 더럽혀진 오메가에 실망한 것이라 가브리엘이 생각했다. 그 어느 알파가 남의 손을 탄 오메가를 좋아하겠는가? 가브리엘은 아쉽지만 이안이 노아를 버릴 때까지 기다리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가브리엘의 생각은 단단히 틀린 것이었다. 노아 프로스트의 저택에서 두들겨 맞고 쫓겨 난지 이틀 째의 일이었다. 가브리엘이 지내고 있는 곳으로 고소장이 날아왔다. 다름 아닌 저택 무단 침입 및 이안 밀러에 대한 폭행 건에 대한 고소였다.
정작 폭행의 피해자인 자신을 두고 이안 밀러에 대한 폭행이라니! 가브리엘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물론 자신도 이안을 때리긴 했다. 그러나 맞은 정도로 치자면 자신이 이안을 때린 것은 반의 반은 무슨, 10분의 1도 되지 않는 것이다.
이안 밀러는 가브리엘의 폭행으로 전치 2주가 나왔다고 하며, 그에 대해 최고 경영자의 건강 악화로 회사가 입은 손해까지 막대한 합의금을 요구했다. 당연히 그런 돈을 낼 수가 없던 가브리엘은 제 부모에게 연락했으나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번호까지 바꾸어 버린 모양이었다. 폭행 합의금을 내지 못하면 남은 것은 감옥뿐이다. 이안 밀러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가브리엘이 초조하게 손톱만 물어 뜯는 가운데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하나 왔다. 돈을 마련했으니 어디어디로 나오라는 문자로, 가브리엘은 그게 제 부모가 보낸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여 의심 없이 나갔다. 그러나 가브리엘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목이 뻐근해지는 감각과 함께 멀어지는 의식이었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옆구리를 세차게 걷어차는 발길질 때문이었다. 고통에 신음하며 일어나니 왠 체구가 커다란 사내가 저를 내리깔아 보고 있었다. 놀라 가브리엘이 벌떡 몸을 일으키다가 목에 가해지는 충격에 악 소리를 질렀다. 목에 짤막한 길이의 쇠사슬이 매여져 바닥에 말뚝이 박혀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가브리엘이 몸을 떨었다. 소리를 질렀으나 입에 무언가가 물려져 있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안녕, 가브리엘 후퍼.”
가브리엘은 그제서야 방에 사내 말고도 다른 남자가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브리엘이 읍읍거리는 동안 남자, 미하일은 연신 전자 패드에 무언가 바쁘게 입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브리엘에게 말을 걸었다.
“인사해, 이 분은 네 주인이 될 사람이야. 그리고 난 주인에게 넘겨주는… 중간 상인 정도라고 하나.”
주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가브리엘이 미친 듯이 머리를 젓고 몸부림을 쳤으나 쇠사슬에 피부가 집혀 고통이 가해질 뿐이었다. 미하일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이런 귀찮은 일은 하지 않지만, 이번만은 이안 밀러가 네게 특별히 상황을 알려주라고 의뢰했거든. 어디 보자, 지금 상황을 뭐라고 해야 하냐면… 용감 무쌍하게도, 아니 이 경우에는 만용이라고 해야겠지, 이안 밀러가 최근 ‘끔찍이도 어여쁘게’ 여기는 노아 프로스트를 건드렸다가 러시아로 팔려 나가는 거라 해야겠군.”
러시아가 오메가 인권이 굉장히 낮은 건 잘 알지? 거기서 오메가는 거의 사고 팔리는 수준의 존재거든. 미하일의 말에 두려움에 질린 가브리엘이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 부모는 네가 이안 밀러를 건드렸는데도 그래도 자식이라고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고 애를 쓰더군. 뭐, 합의금 액수를 보더니 곧 포기했지만.”
아, 이런 걸 보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어도 덜 아픈 손가락은 있다고 하는 건가? 미하일이 엉뚱하게 묻자 가브리엘을 걷어차 깨운 남자가 러시아 억양이 짙은 발음으로 약간 어색하게 그렇다고 충실히 대답해 주었다. 그 모습으로 가브리엘은 이 남자 또한 만만찮은 상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전혀 자신을 봐주지 않을 거란 것도….
“미리 말해두자면 아마 앞으로 사는 게 좀… 고통스러울 거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 네가 막대한 합의금을 못 견뎌 잠적했다고 여기지 러시아로 팔려나갔다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을 테니까… 찾는 사람도 없을 거고. 참, 프랑스어는 해도 러시아 어는 못하지? 잘 되었군. 사실 말을 이해 못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는 더 나을지도 몰라.”
가브리엘이 결국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며 읍읍거리며 뭐라 애원했으나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는 그를 조금도 가엾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할 일을 마친 미하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기 전 아, 하고 막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애처롭게 애원하는 소리를 내고 있는 가브리엘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거 아나? 노아 프로스트는 Tear의 VIP 회원이야.”
“…?”
절망감과 두려움에 금방 알아듣지 못한 가브리엘이 곧 미하일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미하일이 진심으로 재미있어하는 얼굴로 덧붙였다. 노아 프로스트가 연기를 좀 잘하긴 하더라고. 그리고는 완전히 좌절한 가브리엘을 뒤에 두고 이내 미하일이 방을 나갔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것을 가브리엘이 절망적으로 바라보았으나 그 뒤로는 문이 다시 열리는 일도, 가브리엘이 미하일이나 노아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는 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