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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이라고요?”
전혀 뜻밖의 이름에 노아가 조금 놀랐다. 그 동안 내내 질기도록 협박문자를 보내오다가 최근 들어서는 뜸해졌길래 포기한 줄만 알았는데. 그건 그렇고 대체 어떻게 이 저택의 주소지를 알아냈는지가 의문이다. 프로스트 가에서 절대 알려줬을 리가 없으니까. 뭐, 가브리엘이 주소를 알아낸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일단 미뤄두고… 노아가 고민했다.
저택에 방문하는 손님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초대를 받아 오는 사람과, 초대를 받지 않고 오는 사람. 전자야 환영으로 맞이하지만 후자라면 바로 정문에서 걸려 경비에게 내쫓긴다. 아니면 주택 무단 침입으로 경찰에게 넘겨 버리거나.
“노아 님의 프랑스 어 가정 교사라며,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할까요?”
“아…”
노아가 잠시 고민했다. 만약 사전 약속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하면 고용인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가브리엘을 내쫓아버릴 것이다. 그리고 블랙 리스트로 등재되어 저택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되겠지. 하지만… 노아는 혹시나 하는 찜찜함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가브리엘도 이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진짜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안에게 좀 죄책감 비스무리한 것을 가지고 있는 요즘, 노아는 가브리엘을 그냥 간과할 수가 없었다.
물론, 노아는 가브리엘에게는 죄책감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가브리엘은 노아에게 단 한번도 잘해준 적이 없었고, 말로는 꺼내지 않았으나 분명 노아 이전에도 전적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안도 노아를 괴롭힌 것은 매한가지지만 최소한… 가브리엘과는 다르게 범죄의 선을 넘지는 않는다. 어쨌든 노아는 이안의 배우자였으니까.(물론 배우자라고 해서 괴롭혀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안은 노아에게 선택권을 주긴 했다. 이런 게 싫으면 저택에서 나가라고...)
게다가 이안의 행동이 옳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그는 최소한 테너에게 복수한다는 이유와 목적이라도 있긴 했다. 가브리엘처럼 남이 진심으로 괴로워하는 것 자체를 즐거워 하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아, 물론 이안이 자신과의 시간을 즐기지 않았다는 건 아니고…
굳이 따져보자면 둘 다 착한 사람은 절대 아니지만, 노아가 받아 들일 수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로 따져보자면 가브리엘은 옛날에 아웃이다. 노아도 나름 다른 사람과 즐길 때의 기준은 있었다. 드미트리와 같이 상대도 해서는 안 되는 사람, 가브리엘처럼 그다지 위험하진 않지만 상대를 해도 괜찮은 사람, 알렉스처럼 같이 즐기면 좋은 사람. 그리고 이안은…
“노아 님?”
고용인의 물음에 노아가 이안에 대한 생각을 멈추었다. 음, 어떻게 한다지. 일단은 대화라도 좀 나누어 볼까. 가브리엘에게 집착을 한다거나 스토커 같은 면모가 있는 줄은, 몇 년을 봐왔어도 이제 것 알지 못했기에 노아는 일단 대강이라도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다.
“미안해요, 약속이 있다는 걸 미리 말한다는 게 깜박하고 있었네요. 워낙 옛날에 잡아 놓았던 약속이라…”
“그럼 손님을 응접실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노아가 고용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모습은 손님을 맞이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니 옷 좀 갈아 입어야겠다. 어차피 가브리엘도 노아가 바로 맞아줄 거란 예상을 하고 오진 않았을 테니, 노아는 좀 늦장을 부리면서 느긋하게 응접실로 향했다. 옷을 차려 입고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사람이 눈에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가브리엘 선생님.”
“노아 도련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가브리엘은 전에 봤을 때와 달리 사뭇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전에는 머리가 단정하니 짧았는데 지금은 히피에 가까울 정도로 길었고, 전보다 살이 빠져 눈매도 좀 날카로워졌다. 가브리엘을 보지 못한지 이제 세 달째라는 걸 감안하면 상당히 많이 변화한 것이었다.
가브리엘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노아에게 비쥬를 (*뺨에 살짝 입으로 뽀뽀하는 인사 법)했다. 보통은 뺨을 부딪히고 말거나 가볍게 입술을 맞대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달라서 고용인이 보지 않는 쪽의 뺨에 비쥬를 할 때 노아가 흠칫했다. 방금 핥은 거 맞지? 분명 입술은 아니었는데…
잠시 머뭇거리다가 노아가 뺨을 문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소파에 앉으라고 제안했다. 가브리엘이 매우 예의 바르게 앉았다. 그가 고용인이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프랑스 어로 태연하게 물었다..
[그 동안 프랑스어 공부는 많이 하셨나요?]
노아는 그냥 본 모습으로 갈까 고민하다가 일단은 가브리엘에게 장단을 맞추어 주기로 했다. 가브리엘이 이전과는 사뭇 많이 달랐으니, 뭔가 하더라도 대강 상황 파악은 하도록 해야겠지.
[…여긴 어쩐 일로 오셨나요?]
[아무래도 신혼으로 많이 바쁘신지, 도련님이 제 문자를 잘 못 보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 문자라면… 아주 하루에도 몇 번씩 봤다. 질릴 정도로. 나중에는 다 그 내용이 그 내용이라서 몇 몇 개만 보관하고는 나머지는 삭제했다. 전에는 증거를 남기는 걸 그렇게 질색하더니만 이번에는 무엇 때문에 용감하게도 협박 문자를 보내왔는지 영 알 수가 없었다.
[저는 이제 도련님이 아니에요.]
[아뇨, 제게는 언제까지나 도련님으로만 보이는데요.]
가브리엘이 웃는 얼굴로 마치 제자에게 말하듯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노아는 가브리엘의 눈이 음험하게 번뜩거리는 것을 눈치채고 말았다. 이제까지 노아의 교습을 해주면서 일반 가정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의 수 십 배나 되는 돈을 받았으니 돈 문제는 아닐 것 같고… 역시 남은 건 가브리엘의 비밀스러운 그 ‘가정 교습’이 문제인 거겠지.
[원하는 게 무엇인가요, 선생님?]
[원하는 건 하나뿐이지요. 그 동안 공부를 하지 않아 프랑스 어 실력이 많이 떨어지신 것 같은데, 다시 노아 님의 가정 교습을 맡고 싶습니다.]
노아가 잠시 가브리엘의 가정 교습이라는 말에 혹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는 이안이 너무나도…지나치게… 다정했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엄연히 이안과 결혼한 사이가 아닌가. 독립한 후에도 딱히 가브리엘과 다시 연락할 생각은 없었으니 마찬가지로 결혼 생활에 가브리엘을 끌어 들일 생각도 거의 없었다. 그건 엄연히 말해 바람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건… 곤란해요. 전, 지금 프랑스 어 교사가 필요하지 않아요.]
되도록이면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기에 노아가 미소 지은 얼굴을 유지하면서 말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고는 웃어 보였다. 그러나 나온 말은 짓고 있는 표정과는 정 반대였다.
[네 아버지와 알파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는 걸 원해?]
[그게 무슨…]
[이 세상에 흠 있는 오메가를 좋아하는 알파는 아무도 없거든. 만약 거절한다면 난 감옥에 가는 것도 감수하고 기자에게 이 이야기를 팔아 치울 거야. 4년 내내 교사에게 성적인 학대를 받은 프로스트 가의 막내 아들이라… 기자들이 정말로 좋아하겠지.]
노아의 미소가 살짝 사라졌다. 그건… 좀 곤란하긴 하겠지만, 가브리엘은 프로스트나 밀러 가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았다. 이안이라면 모를까 아버지는 일단 자신이 끔찍하게 귀하게 여기는 막내 아들인 자신을 감히 건든 놈을 절대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테니까.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게 더 행복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리고 언론사에서도 기사로 내는 주제가 있고 안 내는 주제가 있다는 걸 알아야지. 그들은 프로스트 가의 기사를 내느니 그 기사의 이야기 거리를 제공한 사람을 프로스트 가에 팔고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 이익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노아가 가브리엘의 장단을 맞춰 주는 건 그만 두기로 할 때였다. 노크도 없이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는데, 이제는 보지 않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저택에서 노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가브리엘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손님이 있었는지는 몰랐는걸.”
“아... 이안.”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좋은 타이밍에 이안이 귀가를 한 모양이다. 오늘도 이안이 들고 온 쇼핑백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에 노아가 잠시 신경을 빼앗기고 말았다. 뭔가 생크림이 있는 종류인 것 같은데…
“안녕하세요, 노아의 프랑스 어 교사였던 가브리엘 후퍼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안이 가브리엘을 위 아래로 훑어 보면서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노아는 눈을 조금 굴렸다. 이안도 아마 프랑스 어를 알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지금 가브리엘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건 많이… 부적절하겠지. 노아는 가능하면 이안에게는 제 이런저런 취향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일단은 나중에 다시 만나서 가브리엘과 대화를 만나자고 생각하며 노아가 약간 성급하게 가브리엘에게 대답했다
“그럼 오늘 대화는 이만 하겠습니다... 선생님. 이번 주에 다시 뵙도록 해요.”
“잘 알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저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주에 다시 보자는 말에 가브리엘의 눈이 잠시 번득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 순간의 눈빛이 흡사 거의 미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으나 오로지 노아만이 눈치챈 것 같았다. 가브리엘은 남들 모르게 누군가를 괴롭히는 데에는 아주 능숙했으니까.
그나저나 가브리엘을 이대로 놔두면 안 되겠지. 노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갑작스럽게 결혼을 할 때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제 노아가 더 이상 가브리엘의 학생이 아닌 이상 다른 누군가가 그의 괴롭힘을 받을 터였다. 자신에게는 즐거움이었지만 노아는 피가학적인 성향이 없는 사람에게는 끔찍이도 괴로운 폭력일 뿐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아예 다른 사람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게 좋겠지.
가브리엘을 보내고 나서 노아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안이 들고 있는 디저트를 바라보았다. 아직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멀었으니까… 후식이 아닌 간식이 되지 않을까, 하고. 과연 짐작대로 이안은 노아에게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고 안에 든 것이 생크림이 가득 얹어진 케이크란 걸 확인한 노아가 고용인에게 차를 내오라고 부탁했다.
노아와 디저트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이안도 점차 단 것에 손을 대는 시간이 늘어 났는데, 노아가 보기에는 이안도 슬슬 단 디저트에 취향을 붙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단 걸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니까. 기린이 풀을 뜯고 호랑이가 고기를 먹는 것처럼 사람은 본능적으로 단 것을 원하도록 태어난 존재라고...
“아까 그 사람은 프랑스 어 교사라고 했지?”
“아, 네에… 그러니까, 그 동안 제 프랑스 어 실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서 이전에 배웠던 분을 다시 모셨어요.”
일단 둘러대기는 했지만 이안이 다른 사람을 저택에 들이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을 것 같아 노아가 잠시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혹시 원하시지 않으시면 다시 취소할게요. 아무리 봐도 이안의 얼굴은 썩 달가워 하는 표정이 아니었기에 안 된다고 해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래도 노아에게는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밖에서도 얼마든지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 아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봐지 않아도 되니까 밖에서 이야기 하는 게 되려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이안의 대답이 예상과는 달랐다.
“…배우고 싶은 게 있다면 배워야겠지.”
노아의 생각대로 이안은 그 가브리엘이란 놈을 저택에 들이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중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만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에서 거슬리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브리엘이 확실히 알파나 베타도 아닌 오메가였기에 뭐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성 알파가 같은 여성 알파에게 거의 끌리지 않은 것처럼 남자 오메가도 같은 남자 오메가에게 거의 끌리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최근 들어 이안은 노아에게 몹시 관대할 수 밖에 없었다. 노아의 앞에서는 한 없이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이다.
“가정 교사라도 엄연히 손님이니 고용인에게 미리 말해 둬. 준비해둬야 하니까.”
“네, 알겠어요.”
디저트 앞에서는 유달리 순하고 고분고분해지는 노아가 얌전히 대답했다. 그럼 이왕이면 빨리 처리해야 하니까 내일이나 모레에 불러야겠다. 가정 교습을 받아야 하고 일단 서재에서 이야기 좀 나눠야지. 증거도 좀 수집해 두고…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가브리엘과의 대화를 궁리하며 노아가 케이크를 차근히 폭 포크로 갈라 먹는 동안, 이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잠시 노아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괜한 질투…인 것 같긴 하지만, 역시… 그러는 편이 낫겠지. 이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