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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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이 관심을 보이자 다니엘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제게 맡겨 달라더니 오후에 Tear에서 사온 게 틀림 없는 제품이 포장된 작은 쇼핑백을 가져왔다. 제 손바닥 좀 될까 말까 한 쇼핑백을 이안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다니엘이 설명했다.

 “원래 성인용품은 적절히 사용하면 서로간에 즐거운 법이지 않습니까.”

 그 동안 이안의 심부름에 Tear를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김에 다니엘은 제 여자친구와 사용할 제품들도 눈 여겨 보면 몇 개 구매했다. 물론, 커다란 크기에 흉흉하게 돌기가 돋은 바이브레이터라던가, 전기 충격 주의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문이 붙은 에그라던가, 아니면 크고 울퉁불퉁한 구슬이 줄줄이 달려있는 기구 같이 이안이 전에 사용했던 무지막지한 제품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귀여운 것들이었다.

 다니엘이 고른 것은 그 중에서도 여자친구가 제일 만족스러워 했던 물건들이다. Tear에서도 마냥 변태적인 것만 파는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는 호텔, 비공식적으로는 SM 클럽이긴 해도 가벼운 SM이나 색다른 걸 즐기기 위해 온 일반 성향의 사람들을 위한 물건들도 많이 팔고 있었다. 다니엘은 특별히 직원에게 SM플레이에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추천까지 받아 왔던 것이다.

 “……”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니엘이 사온 물건을 들여다 보았다. 무언가 해서 상자를 열어보았더니 평범하기 짝이 없는 로터와… 이건 또 뭐야? 이안이 흐물거리는 작은 콘돔 같은 게 여러 개 포장되어 들어 있는 걸 뒤적였다. 그런 이안에게 다니엘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게 가장 최고입니다. Tear의 인기 상품이에요.”

 영 미심쩍긴 했지만, 시도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하며 이안이 일단 쇼핑백을 챙겨 두었다. 하긴 그 동안 굉장히 하드코어하기 짝이 없는 도구들로 노아를 괴롭혀왔으니, 이런 애들 장난감 같은 물건이라도 어쨌건 최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게 좋으리라 이안이 생각했다.

 ***

 -그 사람, 그 사람이 변했어…

 이사벨라가 가녀린 어깨를 들썩이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남 몰래 이사벨라를 사랑하고 있던 스티브가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이사벨라를 빼오고 싶었지만 스티브는 아무런 힘도 없었고, 그와 이사벨라 사이에는 너무나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아요. 더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이혼이라도 하십시오!

 스티브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며 자리를 벅찼다. 이사벨라가 눈물이 그렁거리는 얼굴로 스티브를 올려다 보았다. 당신이 그런 대접을 받으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이혼 후에도 잘 살 수 있다고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사벨라가 스티브… 하면서 부르는 순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엠마였다.

 -어머, 이게 뭐야? 그렇게 착한 척 하더니만 뒤에서는 바람 피면서 할거 다 하고 있었던 거야?

 엠마의 손에서 카메라가 흔들렸다. 남편의 내연녀가 뻔뻔하게도 하는 소리에 이사벨라가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안이 변했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인 악녀의 정석을 보던 노아가 중얼거렸다. 헤더가 저택에 왔을 때에는 마냥 신나서 악녀의 정석에 이입을 했는데, 지금의 노아는… 진심으로 이사벨라의 심정을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노아의 상황은 이사벨라의 상황과는 완전 정 반대였지만.

 소위 신혼 여행 이래로 노아는 이안이 자신과 관계를 가지려는 기미가 보이기만 해도 바짝 긴장하게 되고 말았다. 첫째 날 그렇게 잔인하고 가혹하게(?) 노아를 괴롭혀 댄 것은 그저 이안의 변덕이려니 생각했지만 그 뒤로 이어진 잠 자리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단 한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참으로 괴로운… 지난 밤을 회상하던 노아가 으으 하고 몸을 한번 부르르 떨었다.

 애초부터 노아는 ‘이안이 괴롭혀도 좋아하는 마음으로 꿋꿋이 버티는 가련한 사람’을 가장하고 있었기에 이안이 뭔가를 하자고 하면 이래저래 순순히 따라왔다. 이안이 시키는 대로 하면 몹시 달콤한 고통의 과실을 매일매일 맛 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며칠 전부터의 이안은 퍽 다른 것이다... 게다가 가장하던 모습이 있기에 이안이 자신을 안으려 할 때 어찌 거부할 방법이 없었다. 자는 척 해버리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어쩌지…”

 이게 아닌데… 이안이 질릴 만큼 괴롭히고 알아서 자신을 내쫓던가, 아니면 자신이 충분히 즐긴 다음에는 못 견디는 척 이혼을 하려고 했는데. 그냥 딱 두 달 정도만 즐기고 이혼할 걸. 하지만 이안이 너무 끝내줬단 말이야. 지난 번 테너의 방문 이후 서재에서의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린 노아가 잠시 헤… 하고 웃었다가 이내 시무룩해졌다.

 결혼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며 혼내던 알렉스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자 노아가 조금 한숨을 쉬었다. 언제든지 이안이 이혼을 해줄 것이라 생각했건만 어째선지 최근 이안은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두어 번이나 이혼은 없을 거라 못을 박아놓은 상태였다. 그 때야 이안이 워낙 끝내줬으니 노아도 굳이 이혼을 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으나 지금은 달랐다. 아주, 엄청 많이 달랐다.

 소위 신혼 여행 이후로 이안은 노아가 조금이라도 아파하거나 조금이라도 못 느끼는 것을 못 견뎌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거기에 밤이 아닌 낮에도 전과 달리 잘 대꾸도 해주고, 말도 걸고… 노아도 좀 다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행동을 하니…

 설마, 정말 설마 이안이 자신을 좋아하게 된 건가? 애써 외면하려던 노아가 결국 한 가지 가정을 떠올리고는 완전히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그가 결혼 내내 별다른 죄책감 없이 자유롭게 이안이 괴롭히면 괴롭히는 대로 응했던 건 이안이 자신을 거의 미워하는 것에 가깝도록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이안도 테너를 위한 복수에 노아를 이용하고, 노아도 자신의 유흥을 위해 이안을 이용하는 거니까… 서로서로 좋게 두 달 동안 지내고 이혼한다. 그리고 노아는 자유롭게 독립하여 이후로 내도록 즐거운 싱글 라이프를 보낸다. 이게 바로 노아의 계획 아니던가.

 그러나 이제는 이혼을 해도 절대 깔끔한 기분으로 이혼을 할 수가 없었다. 첫째로는 그저 성격차이의 이혼일 뿐이라 제 아버지에게 둘러댈 생각이었지만 그것도 지난 번 테너가 저택에 방문하면서 망했고, 둘째로는 이안이 순순히 이혼해주는 건데 그것도 그른 것 같았고, 셋째로는 그래도 아무도 상처받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만에 하나 이안이 자신을 좋아하는 거라면 그건… 더더욱 망했다.

 “하아…” 

 오늘로 몇 번인지 모르는 한숨이 또 노아의 입에서 쏟아졌다. 어떤 마음에서 갑자기 자신에게 태도가 변한 건진 몰라도 이제는 이안이 제게 다정하게 잘해줄 때마다 노아의 양심이 이리저리 쿡쿡 찔려댔다. 그냥 이안이 더 큰 상처를 주려고 아예 아주 악독하게 마음 먹고 뒤통수를 칠 목적으로 잘 해주는 거라면 차라리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이제까지 해온 행동을 떠올리면 그 쪽에 가까운 것 같긴 한데 왠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자 찜찜하기만 했다.

 머리를 쥐어뜯던 노아가 한 가지만은 확신했다. 이안이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던, 아니면 더큰 괴롭힘을 위해 다정한 척을 하는 것이던 최소한 이안이 노아의 성적인 취향을 알아서는 안 된다. 이안이 그 사실을 아는 순간… 그 성격에 어떤 난리가 벌어질지 생각만해도 눈 앞이 아찔했다.

 “뭘 그렇게 봐?”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노아가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서재에서 업무를 마쳤는지 이안이 샤워까지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며 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드라마요. 악녀의 정석이라고… 재미있어요.”

 “지난 번에도 보고 있지 않았나?”

 이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막 이사벨라가 엠마에게 치욕적으로 굴려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악녀의 정석을 보다 보니 전의 괴롭힘이 떠올라 더 몸이 달은 노아가 속으로 엉엉 우는 소리를 냈다. 그냥 계속 날 괴롭혀 달라고! 엠마처럼 막, 이렇게 저렇게 막 다루란 말이야… 몸은 훨씬 안락하고 좋았지만 심적으로는 노아는 1층 구석방에서 지낼 때가 제일 편했다.

 그래도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안의 괴롭힘이 좋지 막 대하고 식사를 굶기거나 하는 게 좋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거의 쥐어짜다시피 느끼게 해서 문제인 거지 아주 조오금 정도는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마치 노아가 은근히 자신을 피한 걸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이안은 그제와 어제는 그저 조용히 침대에서 자기만 했다. 하지만 그러니 이번에는 노아가… 욕구불만이었다. 아아, 이것도 괴롭고 저것도 괴롭고… 그렇게 고뇌하던 노아의 눈에 보이는 게 있었다. 요 근래 며칠 동안 내도록 침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파란 상자인데, 지금 보니 하단에 금박으로 Tear라는 글씨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 아니 왜 마스터 박스인 까만 색이 아니라 파란 색인 거지? 다니엘이 직접 사다가 이안에게 준 건 모르는 노아가 어쨌든 눈을 반짝였다. 여하간 기구를 쓰는 게 그냥 하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았던 것이다. 노아가 모르는 척 물었다.

 “그런데… 저 상자는 뭔가요?”

 다니엘이 줘서 가지고 있긴 했지만 요 근래 노아가 별로 관계를 가지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아 써야 할 지 말지 고민하던 이안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다니엘이 선물해 준 건데… 성인용품이야.”

 다니엘! 그 동안도 내내 자신에게 퍽 잘해주어 고마웠지만, 노아는 지금처럼 다니엘이 고마운 적이 없었다. 노아가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사용하자고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안이 잠깐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상자를 들어 올렸다.

 “저, 저기… 전, 괜찮아요. 좋… 좋아요.”

 마치 버리려는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엉겁결에 말하고는 노아가 이안의 눈치를 보았다. 이안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노아를 보고는 이해했다. 하긴, 자신이 사온 게 아니라 다니엘이 선물해 줬다니 그렇게 불안하진 않은 모양이지. 요즘 들어 올가미에 걸린 것 같이 자주 옥죄여 오는 가슴 언저리가 좀 아팠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이안이 다시 물었다.

 “정말 써도 좋아?”

 노아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써! 얼른 써 버려! 작은 상자니까 로터려나? 아니면 에그? 노아가 잔뜩 기대하는 가운데 노아만큼이나 욕구 불만이었던 이안이 상자를 들고 침대로 다가왔다. 노아는 이안의 눈에서 무언가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최근 들어서 익숙해지기 시작한 이안의 간질거릴 정도로 부드러운 애무를 받아 들이면서 노아가 조금 단 숨을 뱉었다. 로터든 에그든 그냥 넣고 박아 줬으면 좋겠다… 마침내 이안이 상자를 열었을 때 툭 떨어진 로터를 보고 노아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얼른, 얼른… 그런데 다음으로 나온 것에는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어…”

 얼핏 보면 콘돔으로 보이는 것은, 콘돔이 맞았다. 다만 손가락 콘돔이라서 그렇지… 그것도 돌기가 마구 난 것으로… 

 노아가 제일 못 견뎌 하는 것이 핑거링이다. 지금 자신이 제 무덤을 파고 드러누웠다는 걸 깨달은 노아가 차마 제가 먼저 하자고 해놓고 취소할 수가 없어서 속으로만 울상을 지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냐… 그거, 그건… 그건 아닌데… 진짜 아닌데… 그러나 노아가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고 만 시점이었다.

***

 손가락 콘돔 진짜 싫어… 돌기 형 완전 싫어, 엄청 싫어… 아침에 일어난 노아가 불현듯 몸부림을 치면서 시트를 긁어댔다. 왜 다니엘은 이안에게 자그마치 5세트 짜리나 사다 줬을까. 1세트로도 충분히 차고 넘치는 걸!

 괜히 좋다고 나섰다가 일주일 내내 이안이 언제 저 무시무시한 물건을 쓰게 되는 걸까 두려워하게 된 노아가 좌절하여 푹신한 이불에 푹 잠겼다. 현재 지금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이안의 노팅과 겨우 손가락 한 마디만한 로터와 달콤한 디저트뿐이었다. 어쨌든, 오메가인 이상 노아는 본능적으로 알파의 페로몬을 반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세 세트가 남았는데 몰래 버려 버리면 티 나겠지. 노아가 멍하니 생각했다. 이안에게 좋다고 말한 것도 있고, 만약 나중에 정말 이안이 다정한 척 하고 뒤통수를 치는, 마치 막장 드라마와도 같은 일을 할 때를 대비해 일부러 좋은 척 하느라 노아는 죽을 맛이었다. 만약에 이런 걸 싫어한다는 걸 이안이 알게 되면… 그 땐 정말 괴롭히는 게 되지 않는가…

 “내가 왜 그랬을까!”

 요즘 이안의 패턴(?)을 보았을 때면 당연히 짐작하고 모르는 척을 했었어야지! 서재의 푹신한 소파를 퍽퍽 치다가 노아가 의미 없는 몸부림은 그만 하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 때가 다 되도록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오늘은 이안이 연락을 안 하는 모양이다. 

 최근 들어 이안은 종종 점심 때나 저녁 때 노아를 불러 어디서 찾아 냈는지 굉장히 음식을 잘하는 곳에서 식사를 같이 하거나 아니면 영화를 보곤 했다. 아니면 집에 올 때 손에 종종 노아의 입에 딱 맞는 수제 디저트 따위를 사오거나… 그러다 보니 노아는 요즘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길들여지는 기분이었다. 아니다, 좀 행복한 파블로프의 개인가.

 어쨌든 오늘은 혼자 점심을 먹는가 보다 하던 노아는 똑똑, 들리는 노크 소리에 네에, 하고 대답했다. 고용인이 정중히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입을 열었다.

“노아 님, 손님 한 분이 노아 님을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손님이요?”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요즘 들어 노아는 별다른 사교 활동을 하는 것이 없었다. 간혹 핸드폰으로 연락이 오긴 해도 워낙 노아가 두문불출 하고 있으니 사교 모임 초대도 오지 않는 상태였다. 하물며 손님이 방문할 리가… 누굴까 의아해 하는 가운데 고용인이 대답했다.

 “가브리엘 후퍼라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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