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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기분 좋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예?”
오늘도 월급이라는 주인에게 목줄이 매여 회사로 출근을 하러 나온 다니엘이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어쩐지 요즘 따라 기분이 저조한 이안이 지그시 다니엘을 노려 보았다. 이안이 두 번 말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걸 알기에 정신을 차린 다니엘이 저도 모르게 오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서류를 껴안고는 떠듬떠듬 말문을 열었다.
“글… 쎄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선물한다던가… 아님, 그 사람이 좋아한다는 걸 해준다던가…”
“……”
다니엘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이안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지기에 다니엘이 기겁하고 말았다. 이안의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뭐, 워낙 자주 있던 일이니까. 하지만… 저렇게 의, 의… 의기소침한 것 같은 모습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대체 이안이 왜 저런 걸까 고민하면서 다니엘이 어떻게든 이안의 기분을 회복시킬만한 답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안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다니엘의 하루가 괴로워진다. 아니, 제 상사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나날이 직장이라는 이름의 지옥일 게 틀림 없었다.
“혹시… 좋아하시는 분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믿기지는 않지만 ‘누군가를 기분 좋게 만드는데’ 저렇게 고민하는 이안은 처음 봤기에 다니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 이안에게는 엄연히 결혼한 상대가 있긴 했지만, 이안이 노아를 괴롭히는 것에 본의 아니게 많은 조력을 하면서 지금까지 내내 제 상사의 행동을 지켜봐 온 다니엘은 그가 새삼 바람을 피우는 대상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놀랍지는 않을 것 같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는 말에 핀잔을 주기는커녕 이안이 눈썹을 찌푸리기만 하자 그 표정을 수긍의 의미로 받아들인 다니엘이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러나 저러나 노아만 불쌍하게 되었다. 그러면 차라리 지금 정리하고 갈라서는 게 노아나 이안에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저, 그럼… 일단… 노아 님과 이혼부터 하시는 게 각자에게 좋지 않을...”
“뭐?”
이안의 눈이 희번득거리자 다니엘이 몹시 쪼그라들었다. 이, 이게 아닌가 봐. 이안의 반응에 다니엘은 자신이 헛다리를 짚어도 아주 단단히 짚었음을 깨달았다.
“이혼이 뭐가 어째?”
“아, 아닙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하하… 제가 잠시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네…”
다니엘은 재깍 이혼이란 단어가 금기어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안은 노아와 이혼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왜? 곧 이어 다니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왜긴 왜야, 그 이안 밀러가 좋아하는 사람이 노아 프로스트인거지! 그 순간 다니엘은 제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참느라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언젠가 자신이 이안을 쩔쩔매는 모습을 단 한번이라도 보여주는 사람에게 한달 월급을 바친다고 했는데 그 날이 오늘인 모양이다.
사실 이렇게 이안이 심기가 좋지 않을 때는 자리를 피하는 게 현명한 처사였으나 다니엘은 이안이 제게 조언을 구한다는, 전에 없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그 분이 좋아하시는 게 무엇인지 알려 주시면 제가 괜찮은 브랜드를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수석 비서인지라 다니엘은 이안 대신 여러 중요한 인사들의 생일 및 기념일 등을 기억해 선물과 축하 메시지를 일일이 보내곤 했는데, 그 때문에 누군가의 입맛에 맞는 선물을 찾아 보내는 것은 거의 달인 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능숙해 있었다. 그런데 다니엘의 질문에 이안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지기만 했다. 그 표정에 의기양양했던 다니엘이 다시 쪼그라들었다. 설마 이번에도 잘못 짚었나? 그러나 다니엘의 예상과 달리 이안은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몰라.”
“예?”
“좋아하는 걸 모른다고!”
다니엘이 재차 묻게 만들자 이안이 짜증을 냈다. 그는 요즘 심적으로 몹시도 불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안드로이드로 괴롭힌 것 때문인지, 아니면 그 빌어먹을 알파 놈을 가지고 협박한 것 때문인지 전에 없이 노아가 시무룩하고 우울했던 것이다. 뭘 잘 해주려고 해도… 한번도 남에게 진심으로 신경 써 잘 해준 적이 있어야지. 이안은 이제까지 단 한번도 남의 비위를 맞춰 준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짐짓 심각하게 고민한 척 하면서 다니엘은 몹시 통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아, 하늘 같은 상사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면 안… 되기는! 돼! 다니엘은 지금 이안을 저렇게 절절 매게 만드는 노아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뭐가 절절 매냐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거의 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안의 비서를 해온 다니엘의 눈에는 달랐다.
“저번에 보시니 달콤한 디저트 류를 좋아하시던데 그 쪽은 어떻습니까?”
너무 즐거운 나머지 직설적으로 물어 놓고는 다니엘이 아차 했다. 의외로 이안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는지 무심한 얼굴을 했으나 다니엘이 보기에는 조금 솔깃한 듯한 표정이었다.
“…디저트?”
그러고 보니 요즘 회사에 데려올 때마다 노아는 항상 다니엘이 재깍재깍 가져다 주는 쿠키니 차를 앉은 자리에서 잘도 먹었었다. 자신이야 입이 짧고 까다로운 편이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지만… 문제는 이안의 요리사가 지나치게 잘하는 바람에 노아가 과연 다른 곳에서 사다 주는 디저트를 좋아하느냐였다. 일단 숙지해두며 이안이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다른 건?”
“음… 다른 거라면…”
다니엘의 말문이 조금 막혔다. 최근 들어 노아와 자주 만나긴 했어도 그게 노아 프로스트라는 사람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인지라 다니엘이 머리를 굴렸다. 뭐가 좋을까… 과연 뭐가… 아! 다니엘의 머리에 자신에게도 좋고 이안에게도 좋으며 노아에게도 좋을지도 모르는 계획이 하나 떠올랐다.
“신혼여행을 가는 건 어떻습니까?”
“신혼여행이라…”
그러고 보니 결혼 초, 이안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신혼 여행을 가기로 한 것을 취소해 버린 적이 있었다. 물론, 당연히 고의다. 고의였지만… 결혼 초부터 지금까지 내도록 해온 일들을 다시 떠올리면 가슴 언저리가 꽉 죄여왔다. …그래, 아직 결혼하고 1년이 지난 것도 아니고 이제 두 달 좀 넘었을 뿐이었다. 아직은 가기에 늦지 않았으리라 이안이 애써 생각했다.
“그럼 이번 주 주말로 한 번 알아봐. 스케줄 조정 좀 해두고.”
“예, 알겠습니다.”
다니엘이 속으로 뛸 듯이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공손히 대답했다. 가능한 길게 잡아서, 며칠이라도 이안의 독설과 갈굼이 없는 편한 생활을 즐겨 보자고 다짐하며 다니엘이 물러났다.
***
“벌써 사흘 째야…”
노아가 몹시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환상적이었던 안드로이드 이후로 이안이 노아에게 손도 대지 않은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부부침실로 옮겨온 뒤 노아는 사실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같은 방에서 지내면 괴롭히는 시간이 더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기대였다. 그러나 늘어나기는커녕 요즘 이안은 침실에 들어서면 숨막히도록 노아를 꽉 끌어안고 자기 일쑤였다.
잘 때 뭔가 단단한 무언가가 허리쯤에서 느껴지는 걸 보면 이안도 분명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참고 있는 이유를 노아는 알 수가 없었다. 참지마! 그냥 막… 개방(?)하란 말이야. 이안의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노아니, 졸지에 이안뿐만이 아니라 노아도 허벅지를 찌르며 잠을 청하는 날이 지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노아는 침대에 머리만 닿으면 잘만 잤다.)
원래 노아가 이렇게 성욕이 넘쳐나는 건… 아니다. 사실 이전에는 가브리엘의 가정 교습을 듣는 날 하루, 혼자서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자위를 하는 날 하루… 그리고 클럽에서 마음껏 노는 날 까지 일주일에 세 번 쯤이면 족했던 것이다. 노아가 조금 좌절했다. 너무 이안에게 길들여졌어... 매일 같이 괴롭힘을 당하다 보니 이젠 익숙해져서 노아는 전처럼은 만족하지를 못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결혼한 상태니 다른 사람과 잘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이안이 노아를 괴롭히기 위해서 데려온 사람과 하는 것과, 노아가 스스로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서 하는 건 엄연히 큰 차이가 있었다.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건 엄연히 결혼이었고, 이혼을 한 뒤면 모를까 지금 다른 사람과 하는 것은 바람을 피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노아가 시무룩하니 하릴없이 응접실에 늘어져 소파만 박박 긁고 있는데 문득 똑똑, 하고 노크가 들려왔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 오라고 한 노아가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활짝 웃었다.
“하이든! 오랜만이에요.”
이안이 휴가를 보낸 하이든이 드디어 돌아온 것이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한 달은 족히 넘도록 하이든을 못 본 것 같았다. 언제 휴가를 떠났냐는 듯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하이든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비해서 피부가 조금 탄 것도 같았다. 쉬고 온 덕인지 전보다 훨씬 혈색이 좋기도 했고.
하이든은 노아가 이안의 부부침실에 들어가게 된 데다가 서재까지 받게 된 것에 몹시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하긴 이 저택의 고용인들은 대부분 노아에게 무한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확실히 하이든이 있으니 편안함이 다르긴 해서, 노아가 그간 하이든이 휴가로 다녀왔던 곳이나 손녀들에 대해 물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요즘 들어 출근은 늦어졌는데 퇴근은 부쩍 빨라진 이안이 귀가했다. 그런데 어째 이안을 보는 하이든의 시선에 흐뭇함이 가득한 게… 노아는 생각보다도 하이든이 이안과 저의 합방을 몹시 기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만이네, 하이든.”
인사를 하던 이안도 하이든의 흐뭇한 표정에 뭔가 좀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안에게는 하이든의 표정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안이 노아에게 뭔가 할 말이 있음을 눈치 챈 하이든이 자신은 저녁을 준비하겠다며 조용히 응접실을 나갔다. 무슨 일인가 해서 노아가 눈만 굴리는 동안 이안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결혼 초에 못간 신혼여행, 다시 가는 게 어때?”
“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노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못간 신혼여행이 아니라 안간 신혼여행이겠지만 이안은 노아의 반응을 살피느라 사소한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신혼 여행이요?”
몹시 어리둥절해 노아가 물었다. 신혼여행이라니, 그 결혼식 초에 냅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취소한 그거 말이지? 노아야 딱히 가던 말던 상관은 없었지만 그 동안 내도록 좀이 쑤시도록 저택에서만 지낸 데다가 요즘 조금씩 욕구불만이 되어가던 찰나여서 좀 이안의 제안이 솔깃했다. 아무래도 신혼여행이면 뭔가… 있겠지. 명색이 신혼인데!
“왜… 싫어?”
“아, 아뇨! 좋아요.”
이안이 뭔가를 하자고 제안 할 때마다 특별한 것이 있었기에 벌써부터 설렌 노아가 활짝 웃으면서 대답하자 이안이 잠시 빤히 노아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가 좀 다정한 것도 같고, 한편으로는 씁쓸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인지라 노아가 잠시 의아해하는데 작게 헛기침을 한 이안이 손을 슬쩍 내밀었다. 노아는 그제서야 그가 오른 손에 작은 쇼핑백 하나를 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받아 들고 보니 쇼핑백 안 쪽에서 단 향이 솔솔 올라오는 것도 그렇고, 투명한 플라스틱 뚜껑 아래로 잘 포장된 타르트 하나가 보였다. 생크림 위, 아주 새빨갛고 탐스러운 딸기가 알알이 빼곡하게 채워진 위로 반들거리는 시럽이 덮인데다가 설탕이나 초콜렛 따위로 화려하게 장식이 된 위로 살짝 반짝거리는 금가루를 뿌린 디저트였다.
노아가 그 화사한 자태에 홀랑 정신이 팔려 말이 없는 사이 이안의 얼굴은 점점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리고 노아가 고개를 들었을 때쯤에는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나가버린 상태였다. 노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세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어… 뭐지? 아니,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냅다 주고 가면 어떻게 하라고?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노아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먹지 않는 건 사람으로써 할 도리가 아니야, 그렇고 말고.
그래도 혹시 몰라 노아는 혹시나 이안이 다시 돌아올까 잠시 기다렸다. 그러니까, 한 1분...? 기다림 끝에 이내 행복한 얼굴로 노아가 조심스럽게 잘 포장된 타르트를 꺼내 동봉된 포크를 뜯어 손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