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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파르페를 거의 반쯤 먹어갈 때쯤이었다. 누군가가 덥썩 노아의 어깨를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노아가 뒤를 돌아보자 알렉스가 활짝 웃고 있었다.
“알렉스??”
여기서 볼 줄은 몰랐기에 알렉스를 보고는 노아가 놀라서 일어났다. 알렉스는 몹시 반가운 얼굴로 노아를 끌어 안으려다가 움찔하며 어설프게 노아를 조금 토닥이고는 몸을 바로 떼어냈다. 알렉스의 얼굴이 조금 떨떠름한 것도, 혹은 굳은 것도 같아 노아가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유를 곧 깨달았다. 오늘 아침도 이안과 한판 하고 나온데다가 한 사흘 전에는 또 노팅을 당했으니까 아마 이안의 페로몬에 절어 있다시피 한 상태겠지. 이젠 하도 이안의 페로몬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노아도 지금에서야 새삼 깨달았다.
제 행동이 너무 티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알렉스가 다소 어색하게 웃었다. 가족이 아니라면 알파에게 있어 알파의 페로몬은 절대 달갑게 여겨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대게 알파의 페로몬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곤 했으니까.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신기하게 여기며 노아가 알렉스에게 반대편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이안의 볼일이 언제 끝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안은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를 테니 연락이 올 때까지 오랜만에 알렉스와 대화나 나눌 생각이었다. 노아가 알렉스를 위한 음료를 주문하는 동안 알렉스는 잠시 씁쓸한 표정으로 노아를 바라보다 이내 활발한 태도를 취했다.
“말했잖아, 워커가 호텔 앞에서 너 봤다고. 그런데 네가 타고 온 차는 있는데 넌 클럽에 없으니까 이 근처에 네가 자주 가던 곳을 찾아봤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호텔 근처에서 노아가 갈 곳이라곤 자주 오던 카페나 와인 바 밖에 없긴 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
“나야 뭐 똑같아. 네가 결혼하고 나서 요즘엔 엘리와 지내고 있는 것 빼곤 그냥 그래.”
마침 알렉스를 위해 주문한 게 나와 대화가 끊겼다. 노아는 전에는 없던 어색함을 느끼면서 눈을 조금 굴렸다. 알렉스는 제 앞에 커피가 올려진 걸 마시진 않고 잠시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건 너무 오래간만에 만나서 그런 건가, 아니면 알렉스가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인 건가… 전자라면 오랜만이라고 해도 두 달이면 그렇게 오래간만도 아니고, 후자라면 노아의 생각보다도 알렉스는 자신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참, 그런데 이 근처는 어쩐 일이야? 난 네가 다시는 클럽엔 안 올 줄 알았는데.”
“아, 그게… 말이지.”
노아는 잠시 알렉스에게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Tear에서는 이미 결혼하거나 약혼한 상태로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거나 친구 사이가 아니라면 대부분 서로에게 자신의 신원을 잘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게 예의이기도 했고. 노아가 알렉스의 성을 모르고, 알렉스도 노아의 성을 모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만 친해짐에 따라 어렴풋이 상대방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다 정도만 눈치 챌 뿐이었지…
하지만 알렉스는 아무래도 몇 년 동안이나 알아온 사이였고, 또 몇 번 도움을 받았으니 거짓으로 꾸며 말하는 것은 오히려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노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음… 그게… 나와 결혼한 알파가 클럽에 들릴 일이 있었거든.”
“너와 결혼한 사람이 네 취향을 아는 거야?”
알렉스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노아는 우물쭈물 대답을 미루었다. 그러니까, 초반에 클럽에 와서 헤매고 뭣도 모르고 제 몸을 함부로 다루는 노아를 가르쳐 준 것이 알렉스였다. 지나치게 노아가 고통을 즐기려 들 때 브레이크를 걸어주거나, 혹은 자제하는 법을 알려준 것도… 말하자면 클럽에서 알아서 보호자를 자처했다고 해야 하나. 예전에는 그저 알렉스가 좋은 사람일 뿐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이유를 좀 알 것도 같고…
“그게 말이야, 알렉스. 나 너한테 말할 게 있는데.”
노아가 알렉스에게 솔직히 털어 놓았다. 아버지가 독단적으로 약혼자를 정해준 것이며, 그 약혼자를 만났다가 우연히 자신을 괴롭혀 줄 계획을 가진 걸 듣고는 유혹에 못 이겨 홀랑 결혼한 것, 그리고 알고 보니 Tear의 사장이었던 것까지… 아니나 다를까 알렉스가 입을 딱 벌렸다.
“노아! 그 사람은 진심으로 널 싫어해서 괴롭히는 거잖아!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기나 한 거야?”
알렉스가 항상 노아에게 누누이 주의를 주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절대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Tear에서 엄격하게 불법적인 일이나 폭행, 약물들의 일을 엄금한다고는 해도 파트너 사이에 오가는 학대까지 어떻게 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노아는 알렉스에게서 즐기고 인내할 수 있는 고통 이상으로 파트너가 자신을 함부로 다루지만 금전적인 문제나 약점을 잡혀 빠져 나올 수가 없어 괴로워 하는 섭(Sub)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봤고, 혹은 본인이 지나치게 고통을 즐기는 탓에 상대방이 심하게 가혹행위를 해도 자제하지 못하고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을 굴리는 섭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봤다. 그런데 노아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느 쪽이냐면… 당연히 후자에 가까웠다.
“너 내가 에블린 때 뭐라고 했어.”
이제 좀 화를 내면서 알렉스가 나무랐다. 노아가 이리저리 알렉스의 시선을 피하며 회피했다. 에블린은 노아가 알렉스를 막 만났을 무렵 뭣도 모르고 만난 알파 여성으로, 클럽에서는 꽤나 악명이 자자했던 알파 우월주의 돔(Dom)이었다. 딱 봐도 ‘나 이 클럽 처음이에요’ 하고 구는 듯한 노아가 에블린에게는 좋은 목표로 보였음이라. 당시에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노아는 에블린이 온갖 심한 짓을 했어도 원래 이렇게 좀 힘들고 지치는 건가 보다 하며 고분고분히 따랐고, 에블린은 일부러 노아에게 자신이 없을 때조차도 험하게 몸을 굴리도록 유도하여 가르쳤다.
노아야 뭣도 모르는 상태였기에 에블린이 가르쳐 주는 것이 올바른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러다 하루는 에블린이 가르쳐 준 것처럼 가혹하게 뒤를 다루다가 심하게 찢어져 피가 영 멈추지를 않길래 부른 사람이 알렉스였고… 그 후로는 조언에 따라 에블린을 떠나와 쭉 알렉스와 알고 지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처음 습관을 잘못 들여놓은 탓에 노아가 걸핏하면 자제하지 못하는 걸 알렉스는 항상 걱정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결혼한 후로는 한번도 피가 난 적은 없었는걸.”
노아가 약간 자신 없게 변명했다. 항상 클럽에 알렉스와 함께 있을 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노아도 종종 다른 사람과 플레이를 할 때가 있었기에 알렉스가 노아에게 최소한의 기준을 두라 말한 것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몸에서 피를 낸다면 당장 관계를 끊는 것이었다. 피가 난다는 것은 최소한의 보호막인 피부가 손상을 입어 찢어졌다는 이야기고, 그건 고로 몸이 굉장히 감염되기 쉬워진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래? 그럼 세이프 워드는? 최소한의 룰이나 상벌 제한 규칙은? 끝나고 난 뒤의 치료는?”
“그건… 음…”
한 두 번 치료해주긴 했는데, 하고 노아가 애꿎은 파르페만 쿡쿡 쑤시면서 대답했다. 그나저나 되게 오랜만이다, 알렉스 잔소리… 클럽에서도 일주일에 한번은 꼬박 이 잔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노아… 오메가는 알파의 동의 없이 이혼하기도 힘든 걸 잘 알잖아.”
이렇듯 걱정하는 알렉스를 보니 노아는 양심이란 게 쿡쿡 쑤시는 것 같았다. 당장 눈 앞의 유혹에 홀랑 넘어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결혼을 결정하고 난 뒤에도 이따금 노아는 생각했다. 자신이 만약 이브였다면 뱀이 굳이 유혹하지 않았어도 선악과를 죄다 따먹어버리지 않았을까 하고, 아아아주 쬐금 후회하면서… 지금은 알렉스의 질책에 쬐금 후회하는 중이었고…
물론 결혼이란 게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란 걸 잘 알지만 노아에게는 사실 이제까지 살면서 한번도 결혼이 중요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는 윌리엄처럼 프로스트 가문을 이어 받아야 할 장남도 아니었고, 벤자민처럼 한 눈에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이안과의 결혼을 지나치게 철없이 너무 손쉽게 생각했다는 건 노아 본인도 조금 인정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안은 알렉스가 지금쯤 상상하고 있을 것처럼 그렇게 가혹하게 노아를 다루지는 않았다. 에블린과는 달리 이안은 입 밖으로 꺼내 노아에게 알려준 적은 없었지만 나름대로의 플레이 룰은 있었다. 가령 얼굴이나 배 같은 급소에는 절대 매를 가하지 않는다거나… 브레스 컨트롤을 할 때는 절대 1분을 넘기지 않는 것, 나름 다른 상대로부터 노아를 보호하는 것 등등… (어디까지나 나름.) 그러나 알렉스의 얼굴을 보아하니 별로 그런 이야기들이 통할 것 같지는 않아서 노아가 약간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어차피 나중에는 이혼할 텐데, 뭐…”
알렉스가 으이구, 이 철딱서니 없는 것… 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따금 노아가 알렉스 없을 때 클럽에서 심하게 놀고 절뚝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목격했을 때 잘 짓던 얼굴이었다.
“그래, 이혼한다니 그나마 다행이네. 그 사람도 애초에 널 좋아해서 결혼한 건 아니니까 이혼하긴 쉽겠어.”
차라리 다행이라는 얼굴로 알렉스가 말하는데 노아는 왠지 가슴 한 구석이 불편하게 걸리적 거리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파르페를 너무 많이 먹었나? 노아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난 이만 가봐야겠다. 엘리와 같이 있던 중이었거든.”
“아, 나도. 같이 나가자.”
파르페를 먹었더니 이젠 슬슬 춥기까지 해 좀 몸을 움직일 필요성을 느낀 노아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Tear근처에는 되도록 접근하지 않으려 하는 노아를 이해한 알렉스가 막 헤어지기 전 노아의 어깨를 꽉 붙잡고 단단히 당부했다.
“노아, 몇 번이고 말하지만 몸 좀 조심해, 제발.”
“난 정말 괜찮아. 진짜 잘 지내고 있다구.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러나 그 동안 노아를 봐온 것이 있어 알렉스는 노아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대신 조금 한숨을 쉬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네가 최대한 빨리 이혼했으면 좋겠어.”
“알렉스…"
사실은 최근 들어 이혼할 생각도 슬금슬금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하면 알렉스가 화를 내려나? 노아가 그냥 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정말로 알렉스와 막 헤어지려고 할 때였다. 문득 뒤에서 음산하기까지 한 기운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거짓말처럼 이안이 뒤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알렉스와 노아를 노려보는 얼굴 표정이 마치 무슨 불륜의 현장이라도 잡은 듯한 모습이었다. 눈치 빠르게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 차린 알렉스의 얼굴은 이미 확 굳어진 상태였고 노아는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아니, 대체 이안이 여긴 왜 있지? 여긴 Tear에서도 꽤 떨어진 곳이고, 또 이 카페로 온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이안의 뒤로 완전히 쩔쩔매고 있는 다니엘과 운전 기사가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안이 경호 겸 노아에게 몰래 가드 한 명을 붙여 놓은 것이었는데, 가드가 알파가 접근하자 마자 이안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이안이 흉흉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이건 또 뭐야?”
알렉스가 믿기지 않는 다는 눈으로 이안과 노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호텔에서 종종 봤던 저 알파는 알렉스가 알기로는 Tear에서 마피아가 연계되었다느니 하며 소문만 무성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섭도록 짙게 깔리는 페로몬으로 미루어 보아하니 노아의 알파이기도 했고. 거기에 한 두 달쯤 전 클럽에서 이안이 오메가 두 셋을 끼고 다녔던 걸 떠올린 알렉스가 입을 딱 열었다.
“노아, 네가 결혼한 사람이 혹시 저 사람은 아니겠지?”
“그게, 저…”
여기서 삼자대면을 하게 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한 노아가 당황했다. 아니 대체 저번부터 왜 이러는 거야? 한 번은 아버지와 만나고, 또 한 번은 알렉스와 만나고… 그러는 사이 이안은 점점 기분이 바닥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혼이 뭐가 어째?”
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대화를 들었구나… 이번에는 테너 때처럼 운이 따라주지 않은 모양이다. 노아가 일단 그런 게 아니라고 이안에게 말하면서도 알렉스에게는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내는데, 그걸 본 이안의 얼굴은 더 안 좋아진데다가 뜻밖에도 알렉스는 영 협조를 하지 않았다. 아니, 협조하기는커녕 갑자기 이안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그래, 이혼이 뭐? 당신 같은 사람과 노아가 결혼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노아가 입을 조금 벌리거나 말거나 알렉스가 이안과 맞섰다. 보통은 이렇게 클럽 밖, 난처한 상황에서 서로를 보았을 때는 모른 척 해주거나 최대한 상대방에게 협조해주는 게 불문율이란 걸 알렉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아에게 결혼한다는 소리를 말로만 들었을 때와, 실제로 노아와 결혼할 상대를 눈 앞에서 보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많이 달랐다.
그렇게 딱히 애달프거나 목숨을 걸 정도로 노아를 좋아하는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자신은 원래 생각한 것보다는 조금 더 노아를 좋아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알렉스가 이안을 노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