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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실은… 그런 거 좋아해요.”
“그런 거라니, 뭐가 말이냐?”
처음에 노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테너가 의아하게 물었고, 테너에게 멱살을 붙들린 이래로 내내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이안이 묘한 얼굴로 노아를 빤히 쳐다 봤다. 노아는 일부러 이안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 따라 배는 성질이 급해진 테너가 답답해하며 캐물었다.
“대체 무슨 말이야, 그게?”
“그, 그러니까… 저는… 거, 거칠게 하는 게… 좋다고요.”
“……”
부끄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하며 말하는 노아를 보면서 테너는 온갖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일명 ‘매 맞는 아내’의 전형적인 변명을 듣고 있는 것 같은데. ‘그이는 가끔 폭력적이지만 그래도 저를 사랑해서 때리는 거에요’ 테너의 머리 속에서 순식간에 어느 날 봤던 ‘긴급 상담 SOS – 부부 폭력, 그 심각함’ 이라는 제목의 시사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매일 같이 남편에게 맞다 보니 오히려 맞지 않으면 불안한 지경에 이른 한 오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무의식적으로 그 오메가에 노아를 대입시키고 만 테너가 도로 노발대발했다.
“너, 이 자식! 도대체 애를 어떻게 한 거야!”
“어르신, 여기서 혈압 더 올라가면 위험합니다.”
매우 흥미진진하게 이 대화를 조용하게 지켜 보고 있던 조세프가 엄하게 말하며 테너의 팔뚝에 진정 패치를 하나 더 붙였다. 강제로 쑥 분노가 내려가게 되면서 테너가 비틀거리며 소파에 털썩 앉았으나 분노로 부릅뜬 눈은 여전했다.
“제가 뭘 어떻게 했단 말입니까?”
노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이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테너의 혈압이 다시 슬그머니 오르려는 가운데 노아가 아버지, 하고 테너의 손등을 잡았다. 마치 반사 작용마냥 테너의 노여움이 슬그머니 누그러졌다. 20년 간 테너가 열 받을 때마다 진정시키곤 했던 노아의 효과라 하겠다.
“혹시, 10년쯤 전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억 하세요? 베니가 집에 애인을 데리고 온 날이요…”
10년 전이란 말에 기억을 더듬느라 테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얼마 안가 테너는 금새 그 날을 떠올리고 말았다. 어찌나 인상적이던지 잊을 수가 있어야지…
정확히는 9년 전, 벤자민이 막 성인이 된 달이었다. (벤자민의 생일은 12월 달이었으므로.) 성인이 되자마자 벤자민은 옳다구나 하고 어른으로써 즐길 수 있는 건 모조리 즐겼다. 술, 담배, 클럽, 성인 사이트 등등… 테너는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그건 혹여나 이 망아지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지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알파가 그 정도는 해야지 않나.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어 노아는 항상 그렇듯 크리스마스 날에는 온갖 행사로 바쁠 테너를 위해 미리 그 전 날 식사도 하고 사교 클럽에도 방문하면서 즐겁게 하루를 보냈다. 벤자민과 윌리엄은 크리스마스 날 어떻게 보내던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테너는 노아에게만은 함께 하지 않으면 서운함을 보였고, 노아도 아버지와 보내는 휴일을 즐거워 했으니까.
그런데 그 날 따라 이브 날 어찌나 일정이 꼬이던지 보통 밤 늦게나 돌아오던 평소와는 달리 테너와 노아는 일찍 귀가해야만 했다. 그래도 기분을 내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 들고 돌아왔더니… 벤자민이 응접실 소파 팔걸이에 수갑으로 묶여서 제 애인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드로즈를 입고 있는 모습인게 다행이었다.
케이크와 와인을 들고 테너와 노아가 할 말을 잃은 채 서 있는 동안 넥타이로 눈이 가려져 둘이 들어온 걸 모르는 벤자민이 몹시 당황한 연상의 애인에게 자기야? 하고 물었다.
“어… 베니? 아무래도 네 가족들이 온 것 같은데…”
“오… 메리 크리스마스!”
수갑에 묶인 채로 벤자민이 뻔뻔하게 인사하는 가운데 섹시한 선생님처럼 차려 입은 벤자민의 애인이 황급히 풀어헤친 가슴팍 단추를 잠그고는 손에 들고 있던 회초리도 뒤로 얼른 감추었다. 노아는 겉으로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둘이 그저 특별한 분위기를 내보려고 가볍게 SM 흉내를 내고 있었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그 당시 노아가 얼마나 많은 동영상(?)을 섭렵했던가. 게다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는 저 회초리, 아니 케인은 상당히 아픈 종류의 매였다. 엄살도 많은 벤자민이 절대 케인으로 맞는 걸 좋아할 리가 없을 터…
그런데 마초적인 성격과는 달리 이따금씩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사귀는 연인들에게 굉장히 로맨틱하게 행동하곤 했던 데다가 굉장히 엄격하면서도 청교도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반 생애를 살아온 테너는 이런 것에는 전혀 면역이 없었던지 기함을 했다.
당연하지만 대낮부터 응접실에서 체면도 없이 동생 앞에서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냐고 테너가 소리지르면서 둘이 또 한판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벤자민은 연인 사이에 이런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냐고 용감무쌍하게도 수갑에 묶인 상태에서 대들었고…
여하간, 그 때 벤자민의 모습을 떠올린 테너가 있는 대로 미간을 구겼다.
“그러니까 너도… 그…런 걸 좋아한단… 말이냐?”
이런 종류의 대화를 굉장히 불편해 하는 테너가 가능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려 빙 돌려 물었다. 물론, 테너가 생각하는 그런 것과 노아가 생각하는 그런 것과는 완전히 천지 차이였다. 일반인들도 몸을, 주로 손목을 묶거나 손으로 때리는 가벼운 스팽킹 정도는 한다. 그러나 노아처럼 발로 짓밟아가며 모욕을 주거나 엉덩이에 심한 피 멍이 들도록 심하게 때리거나… 아니면 고문에 가까울 정도로 괴롭히는 걸 즐기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진 않았다.
“그게… 네에…”
대답하면서 노아가 다시 이안을 흘깃 바라봤다. 이안은 이제 뭘 생각하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아가 일부러 ‘이렇고 그런 걸’ 좋아한다고 말한 목적은, 테너에게는 이안이 자신을 더욱 심하게 대한다는 걸 가리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이안에게 있어서는 사실은 괴롭힘 당하면서도 이안이 좋아 아버지에게 애써 순화(?)해서 변명…하는…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데… 잘 통하고 있는 건가?
사실 이안이 협조하지 않으면 이 변명은 말짱 도루묵이었다. 노아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 봤자 이안이 아니라고 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안이 묵묵부답이자 테너의 눈초리가 더욱 의심스럽게 변했다.
“저기, 저 진짜 잘 지내고 있어요. 이안이 제게 얼마나 잘 해주는데요.”
노아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의 시선이 더욱 강렬해진 것 같았다. 얼굴 옆면이 왠지 따끔거리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게다가 저 아플 때는 밤 늦게까지 간호해주기도 했구요… 그렇죠, 조세프?”
“예? 아, 예… 그렇죠.”
표정관리를 잘 못하는 타입인지 대놓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입까지 조금 벌려가며 듣던 조세프가 뒤늦게 무의식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여전히 이안은 대답이 없었기에 노아가 조금 실망했다. 좋아, 난 여기까지야. 난 최선을 다했다고…
아무리 노아가 즐기고 싶다고 해도 이안이 이혼하려는 마음을 먹으면 별 수 없었다. 어차피 노아가 알고 있기론 이안이 원하는 건 테너를 열 받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고… 그런데 갑자기 뱀처럼 허리에 팔이 감기더니만 노아가 이안에게 쑥 끌려갔다. 노아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관자놀이 가에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잠시 꾹 눌렸다.
으엉? 노아가 잠시 멍해졌다. 방금 이안이 뭘 한 거지? 하도 이안의 행동이 자연스러웠기에 노아가 멈칫하는 사이 이안이 그 동안 내내 무겁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아까 제가 말을 다소 무례하게 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사전에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신 건 그렇다 쳐도, 다짜고짜 멱살부터 잡으시니…”
노아를 굉장히 다정하게 끌어안고는 매우 유감이라는 어조로 이안이 말 꼬리를 흐리자 테너는 영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노아와 이안이 이렇게 나오니 문득 자신이 앞 뒤 사정을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화부터 낸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때는 분명 이안이 노아를 억지로… 하는 것 같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눈에 보이자마자 달려 들었으니…
“정말 아니란 말이냐?”
“그럼요. 아니에요. 그리고 복도에서 한 건, 아시잖아요… 저희 신혼인걸요.”
일이 잘 풀린다 싶어 노아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테너는 영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혹시나 노아가 뭔가 숨기고 있지는 않나 빤히 바라봐도 노아가 짓고 있는 웃음은 한 치도 어색한 구석이 없었다. (당연히, 진심이었으니까.)
“미리 말도 없이 갑자기… 방문한 건 일단 미안하게 되었구나.”
마지못해 테너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의구심을 놓지 못했다. 물론 자신도 애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도중 사전에 연락도 없이 방문한 이에게 방해를 받으면 아주 기분이 좋지 못할 것이다. 무릇 알파란 남들보다 더욱 그런 면이 있지 않나. 이안도 자신처럼 아주 강력한 알파였고…
그러나 아까 이안이 제게 매우 건방지게 굴 때 기분이 상한 건 둘째치고, 이상하게 꺼림칙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랬기에 완전히 납득하지 못한 테너가 으름장을 놓았다.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 걸세.”
“유념하도록 하지요. 얼굴에 절대 멍 자국 하나 내지 않을 겁니다.”
이안이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원래 이런 놈이고 자신에게도 절대 지지 않는 성격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전에는 대담하다고 여겼던 성격이 오늘따라 새롭고 부정적으로 보였다. 이건 제 기분이 상한 탓이리라 테너는 애써 합리화 하기로 했다. 그러나 어쨌든간에 이제부터 테너는 아주 유념하여 이안을 주시할 생각이었다. 그는 자꾸만 드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잠시 들린 거니 난 이만 가보도록 하마.”
테너가 신경질적으로 팔에 붙은 진정 패치를 떼어 버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테너가 아직 감기 기운이 남아 있을 테니 마중은 나오지 말라며 사양했다. 테너가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이안을 지그시 쏘아 보고는 저택을 떠났다.
마중은 나오지 말라 했지만 그래도 홀까지는 나온 노아가 아직은 좀 더 즐거운 신혼 생활을 즐길 수 있겠구나 싶어 안도했다. 고개를 돌리자 테너가 떠나자마자 얼굴에서 미소를 싹 지워버리며 이안이 아무런 대꾸 없이 3층으로 걸어가 버렸다. 홀에 혼자 남겨진 노아가 눈을 조금 굴리는 동안 졸지에 홀까지 자신도 마중을 나와 버린 조세프가 어색하게 말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오늘 치료 감사했어요.”
“그게 제 일인걸요, 미스터 프로스트.”
게다가 오늘 좋은 구경도 하지 않았느냐고 조세프가 속으로만 생각했다. 노아가 시간이 늦었으니 손님방에 머무르다 가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하는 걸 정중히 거절한 조세프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꼭 뭔가 말하려는 눈치였기에 노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아닙니다. 얼굴 치료 꼭 잘 하시고, 혹시라도 흉터가 남았다면 말씀해 주세요.”
조세프가 정중하게 말했다. 그는 아까 응접실에서 이안의 표정이 내내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아무래도 친척이다 보니 그가 이안이 어른들 앞에서 착한 척 행동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았나.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지라 보다 세련되어진 지금에도 이안이 속내와 다른 행동을 하면 금방 눈치 채곤 했는데 아까 노아를 끌어 안던 이안은 정말 다정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안의 연기가 안본 사이 한층 발전한 걸 수도 있었으니까.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네, 다음에 뵈어요."
웃는 얼굴로 조세프를 떠나 보낸 뒤에 노아는 한숨을 푹 쉬면서 몸을 돌리며 이안이 방금 올라간 3층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할 건가…?”
아니, 사람이 말을 꺼냈으면 뭐라도 해야지... 아까 내 편 좀 들어주기에 얼마나 기대를 했다구. 아버지에게 멱살을 잡힌 게 그렇게나 기분이 상했나? 조금 고민하다가 노아가 3층으로 올라갔다. 이안의 서재 앞에 선 노아가 똑똑 노크를 했다. 뭐야? 안에서 들려오는 사나운 대답에 은근히 기대하면서 노아가 서재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노아가 들어가자마자 등을 돌린 채 책상을 보고 서 있던 이안이 휙 몸을 돌렸는데, 순간 그 시선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노아가 움찔했다. 평소에도 이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아 차릴 수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더했다. 아까 응접실에서 내내 이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노아는 도통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노아는 이안이 화를 내는 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안의 눈은 짜증을 내는 것도, 혹은 몹시 당혹스러워 하는 것도 같았다.
“너.”
이안이 성큼 노아에게 다가오면서 으르렁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노아가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나와 이혼하기 싫지?”
너무나 직설적인 질문에 노아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즉시 대답하지 못하고 노아가 입술만 달싹이는 동안 이안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는 방금 막, 자신이 노아 프로스트와 이혼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