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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버지!”
매우 놀라 굳어 있던 노아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이안을 밀어냈다. 일단 급한 대로 옷을 대강 추스르며 노아가 완전히 성이 나서 이안을 거의 들이 박으려는 테너 앞을 막아 섰다. 얼굴이 완전히 시뻘겋게 변하도록 화가 난 테너가 노아의 앞에서 잠시 주춤했다. 대신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런… 파렴치한 놈! 어떻게, 어떻게 감히…!”
얼마나 불 같이 화를 내던지 노아는 안 그래도 높은 제 아버지의 혈압이 다 걱정될 정도였다. 너무 화가 나다 못해 테너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걸 보며 노아가 몹시 당황했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25년 생애 살아오면서 정말이지 지금처럼 당황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이안을 위한 생일파티를 열었지만 정작 원하는 막내 아들은 아프다고 오지 않고, 이 맘 때쯤이면 항상 크게 끙끙 앓곤 하던 노아를 기억하는 테너는 걱정이 많았다. 요즘 들어서 이안이 폭력적이라느니 손찌검을 잘 한다느니, 혹은 바람을 피운다더니 하는 온갖 부정적인 소문을 들었기에 더욱 그랬다. 이안에게 맞아 시름시름 누워 앓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퇴근하고 그냥 잠시 들려 노아 얼굴을 보는 김에 거기에 불시에 방문했을 때면 진실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을지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렸는데… 테너가 저택에 방문하자마자 고용인들이 허둥거리는 게 한 눈에 보이는 게 아닌가.
그에 불현듯 든 생각이 있어 고용인들이 곤란하다는 걸 다 무시하며 한 달음에 올라온 테너의 눈에 보이는 건 벽에 짓눌린 채 아프다고 놔달라며 울먹거리는 제 막둥이었다. 그 순간 계속 내도록 설마 설마 해왔던 이안에 대한 모든 소문들이 테너의 마음 속에서 사실로 변하며 열화와 같은 분노가 몰아쳤다. 저 놈이 내 아들을!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온갖 정성을 들여 키운 내 새끼를!!
“아버지, 잠시만요…”
이렇게 화를 내는 테너는 베니가 사고 쳤을 때 이후로는 처음인 노아가 당황해서 말렸다. 그러나 테너는 노아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성난 곰처럼 사납게 포효하며 이안의 멱살을 잡았다.
“내가 이런 꼴 보려고 노아를 네 놈과 결혼시킨 줄 알아?!”
멱살이 잡혀 마구 흔들리자 이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일 났다… 노아도 테너가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모... 른 건 아니지만, 적어도 오기 전에는 연락이라도 하실 줄 알았지... 그 사이 테너는 몸도 아픈 애를 이렇게 험하게 다뤄?! 네가!!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노아는 잘 놀고 즐기다가 조용히 이혼 하자는 제 계획이 와르르 무너지는 게 한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진정하시고 이 손부터 좀 놓으시죠.”
“뭐? 진정? 진정하게 생겼어 내가?!”
노아는 이안의 얼굴에 슬핏 짜증이 서리는 걸 보며 몹시 불안해졌다. 이안의 성격은, 좋지 않다. 그냥 옆에서 지켜봐도 좋지 않은 게 한 눈에 보이지 않나. 그리고 테너의 성격도 만만치 않았다. 성격이 불 같아서 한 번 열이 오르면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데 설상가상 둘 다 자기 원하는 대로 해야 성이 차는 아주 골치 아픈 성격인 것이다… 게다가 테너는 화가 나면 물건을 집어 던지는 버릇이 있다… 거기서 더 열이 받으면 손이 나가고… 이안이 테너에게 얻어 맞는 것까지 상상한 노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제는 즐기고 자시고 간에 일단 둘을 말려 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노아가 이안의 멱살을 틀어 잡은 테너의 손부터 놓게 하려고 손목을 잡아 당겼다. 그러나 몹시 분노한 테너의 힘은 평소의 몇 배는 솟구친 것 같아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둘 다 노아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테너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알파 페르몬을 풀풀 피워대고 이안도 질 세라 만만찮게 흘려내고 있으니 노아는 현기증이 좀 나는 것도 같았다.
“내가 너에게 해준 게 얼마인데!! 결혼까지 시켜 줬더니 그 걸 이 따위로 갚아!”
현장을 바로 들켜 놓고도 조금도 놀란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이안 때문에 테너의 열은 끝도 모르게 높이 솟구쳤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며 길길이 날뛰는 테너의 말은 이안의 성질을 건드리고도 남음이라… 안 그래도 노아를 괴롭혔던 이유가 회사 자금까지 협박 받아가며 억지로 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던 지라 멱살까지 잡힌 상황에서 이안도 몹시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말씀은 바로 하시죠. 결혼을 시켜 주신 게 아니라 결혼 하라고 명령하신 거나 다름 없지 않습니까.”
“뭐가 어쩌고 어째!”
이안이 대꾸하자 테너는 거의 뒤로 넘어가려고 했다. 노아도 입을 딱 벌렸다. 아니… 맞는 말이긴 지금 상황에서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좀… 성격 나쁘기라면 각자 손에 꼽는 알파들이 격돌하자 노아는 도로 머리가 다 지끈지끈했다. 계속 소란스럽자 저만치서 고용인들이 안절부절 못하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테너가 입만 열었다 닫았다 하는 걸 본 노아는 테너의 분노가 이제 위험 수위에 근접한 걸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분명 일이 난다. 나도 아주 크게 난다. 일단 거리부터 떨어트려 놓자고 노아가 접근했다.
“아버지, 일단 좀 진정하시고…”
베니가 테너를 열 받게 하면 달래는 것이 일이었기에 노아가 살살 달래가며 팔을 잡는데 퍽 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결국 머리 끝까지 화가 치솟은 테너가 주먹을 쥐어 팔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바닥에 나가 떨어진 것은 이안이 아닌 노아였다.
“노아!”
타이밍 나쁘게도 눈먼 테너의 팔꿈치에 얼굴을 맞아 거의 한 바퀴 구르다시피 바닥에 쓰러지고 난 뒤에도 노아는 한참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눈 앞이 순간 껌껌해지더니만 이내 몹시도 욱신거리며 참기 힘든 통증이 몰려 들어왔다. 그럴 수 밖에… 주먹도 아니고 팔꿈치에 얻어 맞았으니.
아무리 노아가 고통을 즐긴다고는 해도 제 아버지에게 맞고 즐기는 변태는 아니다. 아니, 애초에 엉덩이나 등이나, 아님 허벅지나 손은 맞아도 얼굴은 한 번도 맞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물론 엄연히 따져 보자면 얼굴을 맞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볍게 뺨을 맞아 본 정도지 이렇게 주먹 따귀… 아니 팔꿈치 따귀는 맞아 본 적이 없는데… 못 견디게 욱신거리는 오른쪽 뺨을 움켜쥔 노아가 신음 소리도 내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아니, 이 바보 같은 놈아. 거길 왜 끼어들어 끼어들긴!”
마치 이안 대신 맞아주기라도 했다는 테너의 뉘앙스에 눈물이 절로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파 고개도 들지 못하고 끙끙거리던 노아가 몹시도 억울해졌다. 절대로 나도 맞고 싶어서 맞은 게 아닌데… 노아가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자 다른 아들들을(특히 벤자민이라던가 벤자민을) 두들겨 패 본 적은 있어도 막둥이인 노아에게는 절대 함부로 손 댄 적 없던 테너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괜, 괜찮아요…”
테너가 제 등에 손도 제대로 얹지 못할 정도로 안절부절 하는 바람에 노아가 애써 괜찮다고 말하는데 그 순간 뚝뚝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입술이 찢어졌는지 턱을 타고 흐르는 피였다. 테너가 대경실색했다.
“일어 나거라, 병원에 가자.”
노아가 엉거주춤 일어나려는데 도로 어깨를 잡으며 누르는 손이 있었다. 그에 다시 앉으며 반사적으로 노아가 고개를 들자 부드러운 손수건이 입가를 꾹 눌렀다. 아파서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낸 노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노아가 맞거나 말거나 멀찌감치 서서 보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안이 아파서 고개도 못 들고 끙끙거리는 사이 어느새 다가 와 행커 치프를 꺼내 찢어진 입가에 대주고 있었다.
“아으…”
“아 해봐.”
명령 조에 노아가 습관적으로 입을 벌리자 안을 들여다 본 이안이 지그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벌린 입 안에 냅다 손가락을 집어 넣는 게 아닌가. 노아가 놀라 입을 다물고 말았는데도 신경 쓰지 않고 이빨을 하나하나 꾹꾹 눌러 보더니 이안이 손을 빼며 지혈이 되게끔 손수건을 좀 더 세게 짓눌렀다. 눈물이 찔끔 나오게 아픈 가운데서도 희미하게 흥분이 일어 노아가 잠시 이런 상황에서도 지조 없는 제 몸에 대해 아주 잠시 회의감이 들었다.
“주치의에게 연락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노아가 쓰러지자 마자 손짓하여 고용인을 부른 이안이 지시했다. 워낙 기함하여 잠시 분노도 잊어 버리고 있던 테너가 다시 벌컥 화를 냈다. 이게 뭐 하는 건가? 그나마 다행히도 몹시 놀랐던 탓인지 아까와는 달리 그 분노는 어느 정도 한 풀 꺾여 있었다.
“피가 나잖아. 병원에 데려 가야지!”
“주치의를 부르는 것으로도 충분한 정도의 상처 입니다. 병원에 갔다 뒷말이 나오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이안의 말이 맞긴 했다. 개인 소유의 병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그런 사립 병원의 입구에는 파파라치나 기자 따위의 인간들이 몸을 숨기고 주시하고 있었다. 기자나 파파라치 말고도 어디서 새어 나갈지 모른다. 누가 봐도 맞은 게 분명한 얼굴을 하고 노아 프로스트가 병원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순간 온갖 불화 설이 파다하게 퍼져나가며 주식이 오르락 내리락 할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이안의 말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테너가 다시 불끈 주먹을 쥐었다.
본의 아니게 이안 대신 맞아준 꼴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이렇게나마 말렸으니… 이 희생(?)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 수는 없어 일부러 더 크게 끙끙거리며 뺨을 감쌌다. 그러자 스파크가 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신경전을 벌이던 테너와 이안의 시선이 대번에 노아에게 쏠렸다.
“저, 일단… 좀 어디에 앉으면 안 될까요…”
노아가 최대한 애처로워 보이도록 말하고는 아주 살짝 울먹거렸다. 효과는 아주 좋았다.
***
“오늘 저녁에 한번 더 연고를 발라주면 내일까지는 완전히 나을 겁니다.”
하루 만에 다시 저택으로 불려온 조세프가 별로 썩 분위기가 좋지 않은 테너 프로스트와 이안 밀러를 흘깃 흘깃 바라보면서 진찰을 마쳤다. 다시 와 달라는 요청에 또 열이 낫나 싶어서 헐레벌떡 달려왔다가 얼굴에 맞은 흔적이 있는 노아를 보고 조세프가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아무리 봐도 이 상처는 얻어 맞은 자국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이 노아를 때렸을 것 같진 않고, 그렇다고 더더욱 테너는 더욱 아닐 것 같으니 궁금했지만 이 분위기에서 물을 수는 없어 조세프가 꾹꾹 참았다. 대신 거칠게 숨을 쉬고 있는 테너의 팔 목에 감긴 혈압 측정기를 떼어냈다.
“혈압이… 아주 높으시군요.”
조세프가 중얼거렸지만 테너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씩씩거리면서 이안을 노려보았다. 진정하라고 해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조세프가 진정 효과가 있는 패치나 팔에 붙여 주었다. 물론, 별로 효과는 없었다…
“너, 당장 이혼하거라.”
“네??”
얼얼한 뺨을 문지르고 있던 노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혼 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반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이혼이라니… 어느 날 갑자기 약혼자가 있으니 결혼하라고 한 것만큼이나 갑작스러운 선고였다. 그리고 테너는 노아가 제 말에 따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이기도 했다. 노아가 이안을 흘깃 보니 별로 썩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나는 저 놈이 네게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건 절대 못 본다! 그것도 어디서 사람들 다 지나다니는 곳에서 싫다는 애에게 그 따위로 해!”
앗… 노아가 파란 눈을 조금 데굴데굴 굴렸다. 테너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안이 목줄이니 개처럼 기니 뭐니 하는 부분은 못 들은 것 같았다. 만약 그 부분을 들었으면 이런 반응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더 다행인건 이안이 그걸 실행으로 옮기고 있을 때 들키지 않았다는 거고…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발각 당하거나 지켜 보는 와중에 희롱 당하는 걸 좋아한다고 해도 노아도 그 다른 사람이 아버지가 되는 건 절대 원치 않았다.
“저기, 아버지께서 보신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뭐가 그런 게 아니야?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얘야, 결혼 한 사람이라고 애써 변호할 필요 없다.”
내가 뭐 꼭 굳이 오늘 한 번에 두 개를 넣어야 한다거나 아니면 이런 저런 걸 할 수 있던 게 아쉬워서 이런 건 아니고… 노아는 아직은 이혼할 마음이 없었다. 좀 더 즐기고 싶은 것도 싶은 것이었지만, 비록 겉으로 보기엔 아버지가 결혼을 주도했어도 결혼하고 말고는 노아가 결정 했듯이, 이혼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도 노아가 할 일이었으니까.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전자가 더 끌리긴 했다. 여하간 재빠르게 머리를 굴린 노아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뭔가 중대한 것이라도 말하려는 모양에 이안이 눈썹을 치켜 올렸고, 테너는 뭔가 말할 게 있으면 주저 하지 말고 제게 말해보라며 다독였다. 노아가 뺨을 붉게 물들이고는 (이미 한 쪽 뺨은 붉다 못해 시퍼랬지만) 머뭇거리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저, 사실은… 그런 거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