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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노아는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이안이 바로 옆,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도 미동조차 없었다. 붉게 달아오른 뺨이 지금 열이 얼마나 높이 올랐는지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몸이 안 좋다고 하더니 정말 안 좋은 모양이다.
발간 뺨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이 한 쪽 장갑을 벗어 노아의 뺨에 얹었다. 밖에 나갔다 왔던 지라 서늘한 손이 닿자 끙끙 앓으면서 작게 찡그려져 있던 미간이 조금씩 조금씩 풀렸다. 그리고는 뭔지 모를 말을 웅얼거리며 노아가 고개를 틀어 이안의 손에 이마를 문댔다. 마치 어린 동물이 애교를 부리는 것도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흐트러진 노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이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어제 자신이 한 게 이렇게 몸살을 앓으며 드러누울 정도란 말인가? 뭐, 평소보다 좀 오래도록 해대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자신이 아주, 아주 조금 심하게 몰아 붙인 것… 같기도 하고. 노아의 상태를 보고 어딘가 불편해지는 마음에 마지못해 이안이 인정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제의 자신은 조금 이상한 상태이긴 했다. 평소에 이안이 노아를 범하는 목적은 노아를 괴롭히기 위해서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테너를 열 받게 만드는 것… 그러나 어제는 노아를 괴롭게 만들기 위해 범했다기 보다는, 어느 사이엔가 주객이 전도되어 범하기 위해 괴롭혔다는 게 더 적절한 말일 것이다. 이안이 손을 슬쩍 떼어내며 노아를 지그시 노려 보았다. 그 중에서도 살짝 벌어져 뜨거운 숨결을 내뱉고 있는 마른 입술을 노려 봤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왜 이 오메가에게 키스를 한 걸까? 물론 자신이 노아에게 한 일들에 비교해보자면 키스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안은 상대방을 괴롭히기 위해 키스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애초에 키스는 상대를 괴롭히기보다는 오히려…
어렴풋하게 어떤 생각이 떠오르려 했지만 노아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뒤척이는 바람에 훅 날려 사라져 버렸다. 이안이 곧 방금 생각은 완전히 지워버리며 노아의 뺨을 툭툭 손으로 쳤다.
“어떻게 할거야? 조셉이 얼마나 잔소리가 심한 줄 알아?”
심술궂게 말해보아도 노아는 미간만 조금 찡그릴 뿐이었다. 반응이 없으니 재미도 없어진 이안은 무심코 노아의 뺨을 꼬집어 보았다. 평소보다 체온이 높으니 적당히 기분 좋게 따끈하고 말랑하니 잡히는 감촉이 기분이 좋았다. 꼬집듯이 주물거리니 으응 하고 미간을 더 찡그리며 길게 끙끙거리면서도 노아는 도통 눈을 뜨지 못했다.
“이안, 지금 뭐하고 있는 겁니까?”
이안이 깊게 잠들어 깨지 못하는 노아를 괴롭히는데 슬슬 재미를 붙여가고 있을 무렵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손을 떼면서 태연하게 인사했다.
“조셉, 오랜만입니다.”
“반 년 만이죠.”
이안이 환자를 괴롭히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본 조세프가 못마땅한 얼굴로 인사했다. 이안이 워낙 건강체라서 건강검진으로 1년에 한 번, 이따금씩 두 세 번 만나는 주치의이자 머나먼 외가 쪽 친척이기도 했다. 사실, 친척이라고는 해도 남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머나먼 관계다.
조세프는 잠시 노아와 이안, 그리고 방 내부를 둘러 보았다. 사람이 지내기에 부적절한 장소는 결코 아니지만 만약 침대 위의 환자가 제가 아는 그 이안과 결혼한 오메가가 맞는다면 이 곳은 ‘노아 프로스트’에게 적절한 곳은 아니었다. 결혼 첫 날부터 무슨 미움을 샀기에? 조세프가 속으로 쯧 혀를 차며 에둘러 말했다.
“당신이 오메가를 차별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오, 차별하는 건 아닙니다. 이건 그냥… 괴롭히는 거지.”
어릴 적부터 봐와 이안의 성격이 얼마나 나쁜지 잘 알고 있는 조세프가 잠시 말끄러미 이안을 바라보았다. 꼬맹이 시절 이안은 작은 천사 같이 생긴 외모로 주위 사람을 다 녹여 버리곤 했지만, 실상 알맹이는 외모와 달리 소 악마나 다름 없었다. 얼마나 영악했던지 주변 어른들은 왜 또래 아이들이 이안을 무서워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었지… 그런 이안은 커가면서 점점 성격이 좀 나아지나 싶더니 하필 그 사고가 있고 난 뒤에는 이렇게 참… 퍽도 아름다운 성격이 되었다.
뭐… 그래도 아플 때 최소한 의사인 자신을 부르기는 하는 걸 보니 노아 프로스트에게 그렇게 악감정(?)을 가진 건 아닌 듯 싶다. (진심으로, 조세프는 이안이 악의를 가지고 상대방을 물 먹이려고 할 때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음…”
진찰 도구를 꺼내 들며 노아에게 다가간 조세프가 잠시간 지그시 미간을 찌푸리며 이안을 바라봤다가 다시 노아를 바라봤다. 방 안에 들어설 때부터 눈치 챈 거긴 하지만, 노아 프로스트에게서 물씬 풍겨오는 페로몬으로 미루어 보면 노팅을 한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오늘… 은 아닐 테고, 어제쯤?
노아를 진찰하던 조세프가 옷깃 사이로 훤히 드러난 순흔과 치흔을 발견했다. 가슴에 청진기를 대는 척 슬며시 옷깃을 벌려 살펴보니 이건 무슨 짐승에게 물린 건 아닌가 싶게 여기저기 말도 아니게 잔뜩 남겨 두었다. 원래 알파란 소유욕과 지배욕이 강하다 못해 집착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폭행까지 이어지기에 조세프가 진찰 하는 척 노아의 양 소매를 걷어 올려도 보았다. 폭행을 당할 때 자주 나타나는 방어흔은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네. 아까 이안이 노아 프로스트의 곁에 앉아 잠을 방해하며 성가시게 굴고 있을 때를 떠올려본 조세프가 의아해 했다. 이안이 어디 다른 사람 귀찮도록 치근덕거린 적이 있던가? 제게 이익이 되거나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만사 무관심한 이안이었다. 이안이 노아에게 이러는 정확한 사정은 잘 몰라도 뭔가 짚이는 게 있어 조세프가 저도 모르게 다시 빤히 이안을 바라봤다.
“왜 자꾸 날 쳐다 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까부터 조세프가 자신을 흘깃거리는 모습이 영 거슬렸던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조세프가 다시 노아를 진찰하는데 뭔가 영 찜찜했다. 기분 탓인가…
그때 둘이 대화하던 소리에 잠이 깼는지 노아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아까 뺨을 꼬집어가며 그토록 괴롭힐 때는 자기만 하더니만 그다지 크지도 않은 대화소리에 잠을 깨고 만 것이다. 거기엔 조세프가 들어오면서 환하게 켠 조명 때문도 있었다. 미심쩍은 얼굴로 조세프를 바라보던 이안이 바로 노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열에 들뜬 눈동자가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느리게 깜박거렸다.
“오, 미스터 프로스트.”
조세프가 바로 노아에게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평소의 배는 되도록 친절한 태도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밀러 가의 주치의 조세프 피셔 입니다. 편할 대로 불러 주십시오.”
“…안녕하세요, 닥터.”
쉬다 못해 다 갈라진 목소리를 듣자 이안은 아주 약간 양심이 찔렸다. 하긴 어제 노아가 얼마나 흐느끼고 애원했던가… 아, 참 좋았지. 조금 양심이 찔리다가 금새 이안이 다시 어제를 떠올리며 입맛을 슬쩍 다셨다. 노아는 힘 없이 이안을 한 번 보다가 조세프가 다가오자 움찔했다. 노팅을 막 처음 경험한 오메가가 페로몬에 예민해지는 탓에 다른 사람, 특히나 알파가 다가갈 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하긴, 노팅이고 뭐고 내가 처음이었겠지. 이안이 흡족하게 생각했다.
조세프는 이안에게 좀 면박을 주면서 노아의 진찰을 마쳤다. 이안이 괴롭혀도 아예 푹 쉬라는 마음에서 조세프가 수면을 유도하는 패치를 피부에 붙였고, 노아가 곧 까무룩 잠에 들었다. 가물거리며 잠겨가는 파란 눈을 바라보던 이안이 조세프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이안, 개인적인 물음입니다만… 미스터 프로스트와 일주일에 몇 번이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글쎄… 안 세봤는데, 한 최소 일곱 번?”
하루에 한 번씩은 꼬박 노아를 찾아가고, 가끔씩 아침 저녁으로 들려 괴롭힐 때도 있으니 많을 때는 한 여덟 내지 아홉 번은 될 것이다. 이안의 대답에 조세프가 몹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 표정은 엄하게 바뀌었다.
“알았습니다, 그럼… 잠깐 좀 나가 주십시오.”
“…나가라고요?”
“아… 아니지, 생각해보니 당신은 여기 계속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군요.”
이안의 물음에도 대꾸 없이 천연덕스럽게 말한 조세프가 노아에게 다가가 덮고 있던 이불을 젖혔다. 그리고 편한 잠옷 바지춤을 잡아 당기려 하자 아니나 다를까 바로 덥썩 손목이 이안에게 꽉 쥐였다. 이안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을 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진찰하고 치료를 하려 합니다. 하루에 한 번이나 그 짓을 해댔는데 아래가 멀쩡하겠습니까?”
비난이 역력한 조세프의 목소리에 이안이 더욱 미간을 구겼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얼굴을 보고 바로 입을 다물겠지만… 조세프가 괜히 이안의 주치의를 오랫동안 맡고 있는 게 아니었다.
“둘의 부부관계에 대해 내가 뭐라 충고할 주제는 되지 않지만, 좀… 작작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짓을 하도 많이 해서 과로에 걸렸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내참, 민망해서…”
젠장, 이 놈의 잔소리 또 시작이군. 몇 년 전 이안이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에 잠도 제대로 자지 않으며 일을 하다 쓰러졌을 때 조세프가 어찌나 구박을 해댔는지… 하지만 과로라는 말에는 이안도 좀 찔리는 바가 있어 입을 다물었다. 그것 좀 했기로서니 과로라니 황당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괴롭히더라도 나름 상태 봐가면서 했거든…? 게다가 보니까 알아서 잘 치료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노아도 좀 더 잘 괴롭히라고 매일 잘 관리했으니…) 그러나 조세프가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있으랴…
“아무리 한참 때라고 하더라도 자제 좀 하세요.”
조세프가 이안에게 야단을 치면서 도로 꼼꼼히 노아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래서 조셉을 부르기 싫었다며 이안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노아의 열이 제법 높았기에 조세프는 다음 날까지 저택에 머무르기로 했다. 이안은 조세프에게 손님 방을 내준 뒤 자신은 서재로 돌아갔다. 오늘 그 파티에 참석하느라 업무를 미처 다 끝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이안이 한참 일한 지 새벽 2시를 좀 넘었을 때였을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조세프였다.
“미스터 프로스트의 열이 잘 내리지 않아 해열제를 처방하려고 합니다. 미리 알려 드리려고요.”
이안이 힐끔 시계를 바라봤다. 아까 미리엄이 전화 했을 때가 저녁 9시 때쯤이었으니 그 전부터 열이 났다고 치면 꽤 오래도록 열이 나는 상태인 것이다. 이안이 조금 한숨을 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요즘 와이즈 바이오텍에서 새로운 해열제를 출시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 해열제 말이죠. 확실히 부작용도 거의 없고 진통 효과도 좋긴 합니다만…”
이안이 해열제를 알고 있는 건 항상 새롭고 유망한 신제품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보고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해열제가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 출시 되자마자 주가가 크게 상승했고, 이안도 꽤 재미를 보았다. 조세프가 말 꼬리를 흐리자 새 약이 출시 되었다 정도로만 알고 있던 이안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성인들은 그 약을 달가워하지 않아서 응급 상황 때에나 쓰기에… 주사를 놓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효과가 제일 좋으면 그걸 써야죠.”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항상 효율적인 것을 따지는 이안이 딱 잘라 말했다. 효율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알파건 베타건 오메가건 상관 없이 고용해 본의 아니게 공평하게 모든 인종을 고용하는 기업으로 알려질 정도였으니. 그러나 조세프의 다음 말에는 이안도 납득했다.
“좌약 해열제인데 괜찮겠습니까?”
아, 좌약… 약이라면 응당 주사하거나 삼키는 형식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안이 그제서야 조세프의 말을 이해했다. 아무 생각 없이 다른 해열제를 쓰라고 하려던 이안이 생각을 바꿨다. 뭐… 굳이 효과 좋은 약을 피해 쓸 이유가 없잖아?
“내가 할 테니 이리 주세요.”
이안이 태연하게 말했다. 하긴 타인인 자신보다는 이안이 넣는 게 좋긴 할 터이다. 그리 생각 하고 잠시 밖에 나갔다 온 조세프는 미심쩍은 얼굴을 지우지 않은 채 작은 파우치 하나를 내밀었다. 자신이 그렇게 말했는데 설마 또 그 짓을 하진 않겠지… 이안은 즐겁게 파우치를 받아 들고는 노아의 방으로 향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