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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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가 결혼을 하고 이안 밀러의 저택으로 떠난 뒤 테너는 한동안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로몹시 침울하게 지냈다. 완전히 자신을 닮아 무뚝뚝한 윌리엄이나 만나기만 하면 제 혈압을 있는 대로 높여대는 벤자민과는 달리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항상 제게 살갑게 굴던 막내 아들이 보이지 않자 자연히 테너의 마음이 허할 수 밖에 없었다.

 테너가 보기에 이안 밀러는 그가 겪어온 젊은 놈들 중 가장 괜찮은 녀석이었다. 일단 척 봐도 나 알파요, 하고 외치고 있는 분위기부터가 마음에 들었고, 나이가 들면서 사이가 소원해지긴 했으나 한 때는 절친한 친구였던 아담 밀러를 꼭 닮아 이안은 사업 수단도 훌륭하고 배짱도 있었다. 처음에는 아담 밀러 부부가 비명 횡사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접하고 잠시 회한에 잠겨 있다가 문득 자식은 어찌 되었나 궁금해 만나보니, 갓 스무 살을 넘긴 나이에도 강단 있게 친척들에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 썩 대견했었다.

 옛 친구의 정을 보아 도로 친척들에게서 재산을 빼앗아 이안에게 돌려 줄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오히려 이안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테너는 그저 새파랗게 젊은 이 알파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게 지켜 보면서 자금이나 좀 대주었다. 세월은 참 빨리도 흘러서 그게 벌써 10년도 전의 일이 되었다. 그 사이 이안은 제 아버지인 아담 밀러보다도 뛰어난 사업가이자 같은 나이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덤빌 수 없는 알파로 성장했다.

 10년 가량 이안의 행보를 지켜온 테너로써는 아무리 생각해도 노아를 이안과 결혼시켜야겠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이토록 훌륭한 알파와 결혼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배가 아팠던 것이다. 노아도 이제 슬슬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나이었고, 이안도 노아와 좀 나이 차이가 나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딱 적절하게 결혼할 나이었다. 테너가 보기에는 둘이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물론, 노아에 비하자면 이안이 아주 조금… 아깝긴 했지만…

 그래서 슬며시(?) 이안에게 결혼 제안을 했더니 예상 외로 딱 잘라 결혼을 거절하는 게 아닌가. 테너는 약간의 으름장을 놓으며 구슬린 끝에서야 이안에게서 노아를 만나 보겠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고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결혼식에서 이안과 노아가 서있는 모습을 보니 상상했던 대로 너무나도 잘 어울렸던 지라… 테너는 이안이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자신이 좀 보탠 바도 있고, 노아가 또 워낙 주변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는 타입인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이안이 노아를 잘 보살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약간 부끄럽게도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온갖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했던 결혼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테너는 드물게도 애틋한 감상에 젖어 죽은 제 아내의 사진을 들여다 보며 쓰다듬었다. 액자 안에서는 젊은 시절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내가 미소 짓고 있었다. 윌리엄이나 벤자민과는 달리 노아는 어찌나 제 아내를 똑 빼 닮았던지… 자고로 사내 녀석은 험하게 구르며 자라야 한다는 나름의 철칙 하에 윌리엄과 벤자민을 엄격하게 교육시켰던 테너였지만, 노아에게는 영 그럴 수가 없었다.

 본인은 자신의 어머니를 아예 기억도 못하는 것과는 달리 정작 노아는 나이가 들수록 제 어머니를 닮아 사랑스럽게 자라났다. 화사한 금발과 새파란 눈동자니 온순하고 귀염성 있는 성격까지 자꾸만 죽은 제 아내를 연상시켜 테너는 윌리엄과 벤자민에게 한 것처럼 노아에게는 무르게 대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 그리고 윌리엄과 벤자민은 물론이요 외가에 친가까지 온 친척들의 사랑을 받으며 커서 응석받이가 되지 않을까 염려도 많이 했었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착하게 잘도 커주었다.

 그렇게 남다른 애정을 보이며 알뜰살뜰 키워온 막내 녀석인데… 어느덧 커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니. 이런 저런 생각에 테너는 그 날 밤 내내 뒤척거리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로 심란했다. 윌리엄과 벤자민이 결혼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아마도 윌리엄은 결혼 후에도 저택에서 살고, 벤자민은 나가서 살고 있지만 가까운 곳에 집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노아는 꽤 먼 곳에서 사니 더욱 그런 것이라 테너가 여겼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노아의 연락이 점점 뜸해져 테너에게 온갖 걱정이 들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결혼 첫 날 연락이 없는 건 뭐…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신혼이니 둘이 얼마나 좋을 때인가. 다음 날 노아가 잘 지내고 있다며 갑자기 이안에게 일이 생겨 저택으로 와야 했다고 말했을 때는 조금 찜찜했지만 그 때도 그러려니 했다. 같은 사업가로써 테너는 종종 집안 일보다 회사 일을 더 신경 써야 할 때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런데 그 뒤로는 하루에 한 번 전화 오던 게 이틀에 한번, 사흘에 한 번으로 줄어드는데… 잘 지내고 있나 걱정도 되고, 지금이라도 당장 밀러 가에 들려서 노아가 어떻게 지내나 얼굴 한번 보고 싶기도 한 걸 꾹 눌러 참았다. 한참 좋을 때인데 괜히 자신이 끼어들어 방해하거나 분위기를 깨긴 싫었으니까. 게다가 좀 씁쓸했지만 노아는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난 자식이 아닌가.

 테너가 좀 찜찜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 건 암암리에 돌고 있는 별로 썩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나서였다. 대체 어디서 퍼진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안과 노아의 관계가 소원하다 못해 같이 잠자리도 하지 않는다거나 노아가 바람을 피웠다던가(혹은 이안이 바람을 피웠다거나) 노아가 회사로 이안을 찾아갔는데 냉대를 당했다는 등의 상상만 해도 혈압이 오르는 이야기들이었다.

 처음에 테너는 말도 안 된다며 코웃음을 쳤지만 회사 일을 마치고 저택으로 귀가하는 길에 그 소문들을 곱씹어 볼수록 불안해 결국 참지 못하고 노아에게 전화를 하고야 말았다. 통화 음이 울리는 걸 초조하게 손가락을 달그락거리고 있으려니 마침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하필 막 전화를 받았을 때 노아의 목소리가 좀 잠긴 것 같아 테너의 가슴이 덜컹했다. 이제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했던 헛소문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 소문이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아닌가. (물론 노아의 목소리가 잠긴 건 이안에게 한참을 괴롭힘 당한 직후라 그런 것이었으니 어느 부분은 사실이기도 했다.)

 “잘 지내고 있나 전화 좀 해봤다. …그런데, 어디 안 좋니? 목소리가 별로인 것 같구나.”

 -아… 방금 막 자려던 참이어서 조금 잠겼네요.

 “그래…”

 막 자려던 참이라고 하는데 어째서 왜 사람 없는 구석에서 서러워서 울다가 목을 가다듬고 제 전화를 막 받아 드는 노아가 떠오르는지… 노아가 잠이 많은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테너의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막내 아들이 보고 싶은 거지?

 -자주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요. 이틀 전 저택에 손님들이 찾아와서 오늘 오후까지 꽤 바빴거든요.

 “아니, 바쁘면 전화 못할 수도 있지 안 그러니. 내가 전화해도 되고 말이다.”

 저택에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귀하게 자란 애가 바쁘게 지낸다는 말에 테너는 애가 꽤 고생이 많구나 싶었다. (실상 노아는 먹고 싶은 것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괴롭혀지고 싶을 때(?) 괴롭혀지며 결혼하기 전보다 배는 더 몹시 잘 지내고 있었으니…) 노아가 25살이 되었을 때는 다른 애먼 놈이 이안을 낚아채 갈까 봐 서둘러 결혼을 시켰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약혼만 시켜두고 한 일 이년은 곁에 끼고 있어도 괜찮았을 걸 하는 후회까지 새삼 들었다.

 -아버지는 별 일 없으시죠?

 “나야 무슨 일이 있겠니. 뭐 불편한 점은 없고?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느냐?”

 아무래도 이쁘다 이쁘다 하면서 키운 탓인지 노아는 편식이 꽤 심했고, 입맛도 짧았기에 테너가 걱정했다. 낯선 곳이라 음식 맛도 다를 텐데 입에 안 맞아서 잘 못 먹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저택의 요리사를 보낼까? 윌리엄이야 아무거나 줘도 잘 먹으니까…

 -참, 아버지도. 저 정말 잘 지내고 있다니까요. 여기 요리사가 얼마나 요리를 잘 하는데요.

 “음…”

 어디 불편한 점은 없는지 식사는 입에 잘 맞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매번 노아와 통화할 때마다 물어도 테너는 매번 걱정이 되었다.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마음이 편하지 못한지 모르겠다고 테너가 근심 어린 얼굴을 하는 동안 같이 타고 있던 비서가 눈치 빠르게도 테너의 심기를 알아차리고는 메모지에 무언가 써서 보였다. 이안 밀러의 생일이 쓰여져 있었다. 그 것도 바로 사흘 뒤였다! 테너의 안색이 환해졌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마침 사흘 뒤가 밀러의 생일이구나. 생일 축하 파티도 할 겸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함께 저택에 오는 건 어떠냐.”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탁월한 제안이었다. 이제 노아의 신혼 생활도 벌써 두 달 째다. 두 달은 이제 슬슬 신혼 생활을 즐기고도 남을 시간이었고(?) 노아를 끔찍하게 사랑하고 아끼는 테너에게 있어서는 지나치게 긴 시간이었다. (그 동안 노아가 두 세 번쯤 틈틈이 찾아온 건 테너가 싹 무시했다.) 마침 이안의 생일이기도 하니 둘이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고, 생일 파티도 하고, 우리 막둥이도 한 번 보고… 일석삼조구나. 금새 테너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다가 노아의 대답에 폭삭 무너졌다.

 -아… 생일 파티라니 정말 감사 드려요, 아버지. 그런데 요즘 이안이 많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제가 한 번 잘 말해 볼게요.

 “음, 그러냐. 신경 쓰지 말거라. 바쁘면 어쩔 수 없지.”

 -죄송해요, 아버지. 만약 생일 때 못 찾아 뵈면 가까운 시일 내라도 꼭 뵐게요.

 테너는 크게 신경 쓰지 말라며 이만 일이 있다면서 전화를 끊었지만 노아에게 한 말과 달리 얼굴은 심상치 않았다. 저택에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을 깊은 생각에 잠겨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던 테너는 저녁 식사 중간에서야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노아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테너가 아주 심상치 않은 어조로 말했지만, 만삭인 몸이라 아내 올리비아가 친정에서 지내는 동안 저택에 돌아와 있던 벤자민이 심드렁한 얼굴로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또 시작이시다. 그 말에 테너가 눈썹을 치켜 올렸으나 벤자민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아버지, 노아가 결혼 한 뒤로 그 말을 몇 번이나 하셨는지 아세요? 제가 들은 것만 다섯 번이에요, 다섯 번.”

 “시끄럽다, 이 놈아. 넌 네 동생이 걱정도 안 되더냐?”

 “아니… 나 결혼 할 때는 한 달에 한 번도 전화 안 하시더니 이거 순 차별 아니에요?”

 벤자민이 투덜거리다가 테너에게서 너와 노아가 같긴 하냐는 말이나 들었다. 다 같은 아들인데 어째서 이렇게 차별이 심한가… 벤자민이 고뇌하고 있는 동안 묵묵하게 식사를 하고 있던 윌리엄이 방울 토마토가 안 찍힌다며 칭얼거리는 딸 아이에게 포크로 찍어 쥐어 주면서 점잖게 물었다.

 “노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그 애야 워낙 착하고 순해서 전화 할 때마다 잘 있다는 이야기 밖에 하지 않느냐.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겠지.”

 “아니면 정말 잘 지내는 걸 수도 있다니까요.”

 벤자민이 끼어 들었지만 테너는 그 말을 싹 무시했다. 

 “아니 사람이 바쁘면 얼마나 바쁘다고 두 달에 한 번 오는 것도 쉽게 말을 못 꺼내게 해.”

 “갑자기 사흘 전에 스케줄 빼라고 하면 힘들죠.”

 “게다가 날이 갈수록 연락도 드물고…”

 “원래 연락이 드물수록 잘 지내고 있는 증거인 거에요.”

 결국 테너가 벌컥 성을 냈다. 넌 조용히 하지 못해?! 조카 앞에서 이 무슨 망신이냐고 투덜거리면서도 벤자민이 입을 다물었다. 지난 번에 계속 까불거리다가 테너에게 샐러리로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불안해 하는 테너를 달래는 건 언제나 침착하고 이성적인 장남 윌리엄의 몫이었다.

 “지난 번에 봤을 때도 노아 안색이 좋았으니, 베니의 말대로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그런 거면 좋겠다만. 그래, 네 말대로 내가 너무 과하게 걱정했나 보다.”

 벤자민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한 말이나 형이 한 말이나 다를 게 없는데요… 그러나 아무도 벤자민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잘 지낼 거라는 윌리엄의 말에 못 이겨 다시 식사를 하면서도 테너는 노아에 대한 생각을 접지 못했다. 뒤늦게 자신이 너무 급하게 결혼을 밀어 붙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도, 이번에 이안 밀러의 생일 때는 노아를 볼 수 있겠지. 테너가 애써 좋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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