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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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요?”

 노아가 저도 모르게 방금 전까지 마시고 있던 차를 내려다 보았다. 찻잔에 담긴 건 디저트만큼이나 아주 훌륭한 품질의 홍차다. 평소에 마시던 것에 비해 그렇게 색이나 향이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 아직 몸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은 것 같고. 노아가 차를 빤히 바라보자 사샤가 거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허둥지둥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타지 않았어요… 여, 여기요…”

 사샤가 걸치고 있던 가운에서 서둘러 무언가를 꺼냈다. 테이블 위에 내려 놓은 걸 보니 아주 작은 팩에 담긴 흰 가루였는데, 얼마나 사샤가 만지작거렸는지 비닐로 된 봉지가 꾸깃꾸깃해 보일 정도였다. 노아가 말 없이 눈만 깜박이며 약을 바라보자 사샤는 몹시 안절부절 못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가 붉어졌다가 몹시 후회하기도 하면서 시시각각 사샤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화했다. 

 그녀가 내민 약을 보아하니 노아의 생각보다도 드미트리는 굉장히… 질이 나쁜 인간인 모양이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좋다 못해 그 사람과 같이 자고 싶다고 해도 마음으로 상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보통 약을 쓰지는 않는데… 그것도 남의 저택에서! 대담한 건지, 멍청한 건지…

 “이게 무슨 약인가요?”

 “…그게, 그게…”

 겁에 질린 사샤가 다시 울먹리기 시작하자 노아가 일단 달랬다. 막 울음을 터트리려는 얼굴도 그렇고 차마 약을 타지 못해서 노아에게 알려주는 걸 보니 본인이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원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곤 했지만 사샤는 어딜 보나 이제 막 성인이 되어 앳된 티가 남아 있는 마음 약한 어린 아가씨일 뿐이었다. 그녀는 노아가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많이 안심한 얼굴을 했다.

 “정말 죄송해요, 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어 사샤가 솔직히 털어 놓았다. 원래 시작이 어렵지 일단 한번 입을 열게 되면 그 다음을 말하는 건 어렵지 않은 법이다. 사샤는 드미트리가 넣으라고 한 약의 정체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드미트리의 말로는 일단 먹이면 상대를 몹시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약이라고 했다. 드미트리도 없는데 약을 먹여서 뭘 어쩌려고 그러나 싶었지만 드미트리는 생각보다도 치밀한 자였다.

 “그리고, 야, 약을 먹인 다음엔… 사람 없는 곳에서, 그… 노아 씨의 사진을 찍으라고 했어요.”

 “내 사진을요?”

 사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마 노아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테이블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드미트리가 찍으라고 한 사진이 어떤 종류의 사진일지는 말 하지 안 해도 훤한 일이었다.

 참으로 멍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교활한 인간이라고 노아가 생각했다.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대신 사샤에게 시킨 건 단순히 귀찮아서가 아니라, 만약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그녀에게 덮어 씌우려는 수작일 터였다.

 노아는 상대를 고분고분하게 만들거나 아예 인사불성으로 만드는 약들에 대해서는 대강 들어본 적은 있었다. 그가 다니던 Tear의 클럽에서는 그 어떤 약물의 반입도 허용하지 않았고, 그 기준이 매우 엄격하여 플레이를 위해 룸을 대여할 때에 사용자가 조금이라도 취한 상태라면 절대 대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약을 사용한 적도 (물론 사용하려는 생각도 없었다) 한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아는 지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은 많았다.

 가령 뉴스에도 자주 나오듯이 술 깨는 약이라 하여 먹었는데 다음 날 지난 밤 동안 아무런 기억도 없이 낯선 곳에서 깨어난다 던지,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눈 뜨고 당할 수 밖에 없다던가 하는 일들 말이다. 아는 사람이 당한 걸 들은 사람도 있었고, 자신이 실제로 당한 사람도 있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사샤. 하지만… 괜찮겠어요? 시켰는데 아무것도 안 한 걸 알게 되면…”

 “괘, 괜찮아요. 하루 이틀 맞은 것도 아닌 걸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애써 웃는 사샤의 모습은 퍽 가여워 보였다. 사샤라고 그런 남편을 만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사샤가 드미트리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을 도와줬기에, 뭐라도 해주고 싶었던 노아가 사샤에게 제 연락처를 적은 종이를 쥐어 주었다. 사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거든 연락해 주세요. 당신이 나를 도운 것처럼 저도 도와줄게요.”

 사샤는 잠시 멍하니 노아를 바라보다가 목이 메인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해 주었다. 마치 아무도사샤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이가 노아 외에는 없었던 사람만 같았다. 어쩌면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훌쩍거리더니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약간 눈가가 붉었지만 그래도 아까처럼 몹시 불안했던 모습에 비하면 한결 후련한 얼굴이었다. 아까 사샤가 몹시 불안정했던 모습은 단지 맞은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게 아니라 죄책감 때문이라는 걸 노아가 뒤늦게 깨달았다.

 다시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고 사샤가 떠난 뒤 노아는 남은 디저트를 냠 한 입 베어 물면서 약을 이리저리 손 안에서 굴려 보았다. 음… 이걸 어떻게 할까.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노아가 주머니 안에 밀어 넣었다. 혹시 나중에 무슨 증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 날 저녁이 다 되어갔을 때에서야 이안과 다른 사람들이 승마를 가장한 비밀스러운 회의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회의 결과가 혼자서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드미트리만이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매우 멀쩡해 보이는 노아를 보고는 그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약을 먹고 이런저런 짓을 당했을 텐데 왜 이렇게 멀쩡하냐 이거인 거겠지. 노아는 일부러 방긋 드미트리를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 다들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기 위해 각자의 방에 들렸다. 드미트리는 이번에도 저택에 초대 받은 손님들 중 가장 늦게 식당에 도착했는데, 다들 마지막 식사라 화려한 정찬이 차려진 테이블에 신경이 팔려 있던 지라 노아만이 드미트리와 동행한 사샤가 조금 절룩거리고 있다는 건 눈치 챘다. 노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 또 사샤에게 손을 댄 모양이었다.

 어젯밤 응접실에서 그랬듯 저녁식사 내내 드미트리가 사샤에게 대하는 태도는 자신의 정부인을 대하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무례했다. 그러나 다들 이따금 눈살을 찌푸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요즘 오메가에 대한 처우가 나아졌다고는 해도 베타라면 모를까 알파가 자신의 오메가를 대하는 행동에는 간섭할 수 없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니까.

 일단 한 오메가가 알파와 맺어진 이상 알파가 오메가에게 무례하든, 무례하다 못해 폭력을 휘두르든, 오메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대로 범하든 간에 남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 이안이 이렇게 마음 편하게(?) 노아를 괴롭히는 게 아닌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메가를 알파의 소유물인 마냥 생각하는 인식은 점차 옅어지고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정말 옅어진 정도였다. 최근에는 가정 폭력 사건 신고가 들어오면 경찰이 말리는 시늉이나마 하는 게 그나마 많이 나아진 형편이었다. 그러니 드미트리가 사샤에게 아무리 무례하게 대한다 한 들 눈살을 찌푸리고 혀를 차는 것이 고작일 수 밖에.

 드미트리를 제외한 모두가 다소 불편한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노아는 제 뒤에 끈적하게 달라 붙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며 이안과 함께 다정하게 부부침실로 향했다. (사실은 끌려 들어간 게 맞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랬다.) 이안은 아침에 경고한 대로 부부침실에 들어가자마자 노아를 홀딱 벗겨 놓은 뒤 목줄을 도로 맸다. 

 뭐, 이제 와서 이안 앞에서 발가벗는 것 쯤이야… 별 거 아니니까… 하지만 어쨌든 좀 부끄러운 척 좀 해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옷을 밀어 두던 노아가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약이 떠올랐다. 힐끔 이안을 보자 옷을 갈아입고 있기에 그 사이 노아가 뒤적거리며 약을 찾았다. 어디에 뒀더라… 조금 옷을 뒤적인 끝에 작은 봉지를 끄집어 내는데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뭐야?”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저만치 있었으면서 언제 다가왔는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이안이 셔츠 목 깃의 단추를 풀어내며 바로 뒤에 바짝 붙어 서서 노아가 옷을 뒤적이는 모양을 보고 있었다. 노아가 저도 모르게 죄 지은 사람 마냥 약을 감추려고 했지만 이안은 이미 노아가 뭘 꺼냈는지 다 본 상태였다.

 “그게 뭐냐고.”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걸 그렇게 숨겨?”

 코웃음을 치면서 이안이 간단하게 노아에게서 약 봉지를 빼앗아 갔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저 하얀 가루로 밖에 보이지 않는 봉지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렇게 보니 봉지가 굉장히 수상쩍어 보인다. 노아의 눈에도 그러니 이안에게는 얼마나 수상쩍어 보일지는... 이안이 잘그락거리는 사슬을 잡아 당겨 노아가 휘청 바닥에 엎어지게 만들며 윽박질렀다.

 “이게 뭐냐고 묻잖아.”

 노아가 고민했다. 사실 그는 오늘 일을 이안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말 해서 뭘 어쩌겠나? 이안이 자신을 위해 복수를 해줄 것도 아니고 뭐 실제로 일어난 일도 없는데. 괜히 소란 일으키고 싶지 않아 조용히 넘어가려 했지만 이안의 눈에 약이 보인 순간부터 글러먹은 일이었다. 노아는 그냥 솔직히 털어 놓기로 했다. 

 “그게, 오늘… 사샤 양이 제게 준 건데요…”

 입을 열다 말고 노아가 목줄에 끌려 거만하게 앉은 이안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안이 괴롭히려고 할 때면 항상 그렇듯이 바짝 몸에 기분 좋은 긴장이 어렸다. 노아는 이안이 목줄을 손에 쥐고 있는 걸 보며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다. 나 도그 플레이 되게 좋아하는데…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이안의 얼굴을 보니 오늘은 평소보다 가혹할 것 같아 설레기도 하고… 노아가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잠깐 말을 안 하자 이안이 다시 윽박질렀다.

 “준 건데, 뭐. 왜 말을 안 해.”

 목줄이 목을 죄여와 조금 콜록거리며 노아가 머뭇거렸다. 냅다 불면 좀… 그렇겠지? 아무래도 이안이 알고 있는 노아 프로스트란 되게 착하고, 온순하고 고분고분하고... 또 순진한 사람이니까. 어떻게 해야 그 캐릭터에 걸맞게 보일까 하고 노아가 고민하고 있자 이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좋게 대할 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오늘 밤 새우고 싶어?”

 오늘 밤 새면 나야 좋지. 어차피 내일은 저택에 손님들도 없으니 노아는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늦게까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따금씩 궁금한 게 있는데, 자신이야 밤에 그렇게 시달리고 난 뒤에는 낮에 수면을 보충한다 쳐도, 이안은 대체 언제 잠을 자는 걸까? 같이 관계를 가질 때에도 어렴풋이 체력이 장난 아니라는 건 어렴풋이 알겠는데… 어쨌든 잠시간 말하지 말고 버텨서 괴롭힘을 받아볼까 하는 유혹에 시달리던 노아가 이내 결정했다. 노아가 겁 먹은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몇 번 달싹여 주고는 입을 열었다.

 “그게, 이안 손님 분들 중에… 미스터 솔로브요프 씨가,”

 “그 자식은 왜?”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이안이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면 이안은 드미트리가 저택에 도착한 이후부터 내내 그를 매우 싫어했다. 하긴 드미트리가 이안이 좋아할만한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 (사실 이안이 좋아하는 종류의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업과 관련 일로 어쩔 수 없이 초대한 것 같았으니까. 이왕 싫어하는 사람, 더 싫어하게 만들어도 상관은 없겠지...

 “제게, 약…을 먹이고…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고… 사샤 양이, 알려줬어요.”

 “……”

 이안은 아무 말 없이 노아가 말하는 걸 듣기만 했다. 노아가 머뭇거리며 조금 더 말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까 약을 제가 가지게 되어서요… 아무 곳에나 버리면 또 안 될 것 같고…”

 사실 노아는 내심 이안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가 예상한 이안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고 재수없게 대답하면서 무시해 비즈니스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려고 하든가, 아니면 제 영역을 침범하려고 하는 상대에게 화를 내든가… 그러나 이안은 미간에 골이 파이도록 미간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노아는 이안의 다리 사이에서 얌전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파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는 동안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을 하던 이안은 마치 노아에게 뭐라도 말할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려다 말고 꾹 다물어 버렸다. 그건 노아가 예상한 반응 중 그 어느 것에도 포함되지 않은 반응이었다.

 하긴, 이안에게 있어서 자신은 그저 싫어서 내쫓아 버리고 싶어하는 사람일 뿐이었지. 노아가 납득했다. 지퍼를 내리고 제 것을 꺼낸 이안이 목줄을 잡아 당기며 거만하게 빨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노아는 곧 약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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