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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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수면을 취하고 있던 노아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눈가에 비치는 햇빛 때문이었다. 눈이 부셔서 시트에 얼굴을 파묻었지만 일단 한 번 깨어났더니 잠이 슬그머니 달아나 버리는 바람에 노아는 느릿느릿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밖에 없었다. 하품을 하면서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전면 유리창으로 마감된 곳에 보기만 해도 숨이 탁 트이는 전망이 펼쳐져 있었다.

 큐브 아일랜드의 아침 풍경은 어젯밤 불빛이 별과 같이 은은하게 반짝거리며 흘러나오던 야경과는 완전히 달랐다. 해가 중천을 향해 기어 올라가고 있는 새파란 하늘 아래 정육면체의 모양으로 디자인 된 인공 섬의 흰 모래사장 해안이나 건물들의 유리창이 마치 진주처럼 햇빛 아래 반짝거리며 빛났다. 아직 잠에서 덜 깨었던 탓에 노아는 정육면체의 모서리를 따라 흐르도록 고안된 개울가에서 사람들이 물장구를 치며 노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죽 기지개를 펴 마저 나른한 몸을 일깨웠다.

 노아는 일어나고 난 뒤에도 침대에서 게으름을 한참 피운 뒤에서야 방에 이안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나 해서 어젯밤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욕실도 들어가 보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이안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음… 노아가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방에 침대가 하나 밖에 없는데, 설마… 이안이 침대에서 같이 잔 건가? 

 “에이, 설마…”

 저택에 있을 때도 단 한번을 이안과 같이 잠자리에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침대는 무슨, 아예 각방까지 쓰지 않나… 심지어 이안이 자는 부부 침실과 노아의 침실은 거의 저택의 끝과 끝일 정도로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만 어젯밤에 바로 귀국했다고 하기에는 뭐 하러 굳이 호텔을 1박 2일로 예약해 두었나 싶기도 했고, 다른 방을 썼다고 하자니 이안은 자신이 방을 옮기기 보다는 노아를 다른 방으로 내쫓을 사람이었다. 정말 한 침대에서 같이 잔 걸까…? 그야 뭐, 침대가 충분히 넉넉하긴 하지만.

 뭐 같이 잤으면 잔 거겠지. 노아가 이내 ‘이안과 동침을 했는가 안 했는가’에 대한 주제에서 신경을 껐다. 날 마다 온갖 하드한 플레이를 하는데 동침 따위가 대수랴. 벌써 아침 10시에 가까워져 가는 시간이라 지금은 배가 고픈 게 더 신경이 쓰였다. 아침 식사를 룸 서비스로 주문하기 위해 침대에 앉아 호텔 안내 책자를 뒤적거리던 노아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아, 어제 이안이 주문한 게 이거구나.”

 안내 책자의 거의 뒷장쯤에는 커플 룸 전용 특별 서비스 카테고리가 있었는데, 목록의 일부를 설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핑크 로즈 : 신혼 부부를 위한 가볍고 달콤한 세트입니다. 기본 옵션 : 콘돔, 젤, 로터]

 [레드 와인 : 색다른 분위기 전환을 원하는 연인들에게 추천 드리는 세트입니다. 기본 옵션 : 콘돔, 젤, 로터, 딜도]

 [블루 라이드 : 라이딩(Riding)을 즐기는 분들에게 추천 드리는 세트 입니다. 기본 옵션 : 콘돔, 젤, 딜도, 흔들 목마 (삼각 목마 변경 가능)]

 [블랙 펄 : 특별한 취미를 가지신 분들을 위한 구성품. 기본 옵션 : 콘돔, 젤, 특대형 바이브레이터, 승마 채찍]

 그 외 카나리아 케이지, 퍼플 포켓 등 기본 세트에다 다른 원하는 기구들을 옵션으로 추가할 수 있었는데… 노아는 솔직히 좀 아쉬웠다. 난 네이비블루 라이드가 훨씬 마음에 드는데. 이안이 이런 걸 주문하는 줄 알았다면 어제 옆에서 은근히 네이비블루 세트를 선택하도록 부추길 걸 그랬지. 

 이내 시큰둥하게 책자를 다시 뒤적거린 노아가 룸 서비스로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주문한 식사가 오는 동안 욕실에서 가볍게 샤워를 한 뒤 가운을 걸치고 나오자 때마침 노크 소리가 똑똑 들렸다. 문을 열어주니 직원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트레이를 밀고 들어와 보기만해도 먹음직스러운 아침 식사를 테이블에 차리고 나갔다.

 저택의 요리사가 해주는 것보다는 덜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축에 속하는 식사를 하며 핸드폰을 살펴보니 다니엘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아침 8시쯤에 온 것으로,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는데 이른 시간에 노아를 깨울 수가 없어 본의 아니게 회장님과 먼저 비행기를 탔다는 사과였다. 물론 안 봐도 훤했다. 분명 이안이 쿨쿨 자고 있는 노아를 그냥 버려두고 먼저 떠난 것이다.

 성질 더러운 고용주에 비해 몹시도 착한 다니엘은 노아를 위해 다시 전용기를 보내 두었다. 출국 시간을 보니 오후 느지막한 시간이기에 노아는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큐브 아일랜드에 온 거 좀 느긋하게 보내지 뭐. 

 호텔에서 체크 아웃 한 뒤, 노아는 캐리어는 미리 보내두고 여권과 지갑만 든 채 큐브 아일랜드의 쇼핑몰에 들려 느긋하게 여기저기 둘러 보았다. 쇼핑을 하던 중 가장 많이 구매한 건 큐브 아일랜드의 기념품으로, 저택의 고용인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본래도 저택에서 고용인들과 꽤 친밀하게 지내던 노아는 여행을 갈 때마다 고용인들을 위해 선물을 사는 습관이 들었는데, 이번에도 선물을 구입한 건 습관도 습관이었지만 밀러 저택의 고용인들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도 있었다.

 그게… 저택에서 고용인들에게 얼마나 못 볼 꼴을 많이 보였던가. 음란행위(?)를 남에게 강제로(?) 보이는 것도 엄연한 성희롱에 속한다. 본래 상류층에서도 대저택에 고용된 이들은 그 어떤 걸 듣고 보더라도 절대 못 본 척 못 들은 척 입이 무거워야 하기 때문에 내내 이안과 노아의 낯뜨거운 모습들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나 아무리 입 뻥긋 안 한다곤 해도 고용인도 엄연히 사람이다. 못 본 게 정말 못 본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안이 구박할 때마다 하이든과 미리엄을 비롯해 고용인들은 나름의 방식대로 노아를 잘 챙겨 주었다. 이안이 심술로 식사를 제대로 못 먹게 하면 몰래 식사를 가져다 주거나… 저택에서 제일 좋지 않은 방에서 지내는 노아를 위해 언제나 정성스럽게 방을 정돈하고 치워주니, 노아로써는 고용인들이 고마울 수 밖에.

 그리하여 갈 때는 가볍게 떠났으나 올 때는 기념품과 함께 무겁게 돌아온 노아에게서 선물을 받은 고용인들은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고맙게 선물을 받아 주었다. 게다가 항상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정성에 특별히 노아에게서 고급 와인을 선물 받은 요리사는 몹시 감동한 모양인지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평소의 배는 정성이 들어간 디저트를 내주었다.

 “이거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수줍게 말하면서도 노아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미 포크를 집어 든 상태였다. 노아가 사랑해마지 않는 달콤한 디저트들이 테이블 위에 한 가득 차려져 있었다. 케이크부터 조심스럽게 포크로 잘라 입에 베어 문 노아가 몹시 감동했다. 생크림이 혀 위에서 달콤하게 스며들었고 얹어져 있던 딸기는 싱싱했으며 빵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그 다음으로 먹은 치즈 케이크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이안과 이혼할 때 어떻게 요리사만 빼갈 수는 없을까…? 노아가 막 가장 좋아해 마지 않는 파르페와 갓 구운 마카롱, 그리고 카놀리(*튜브 모양으로 된 빵을 튀겨 그 속을 크림이나 당류, 리코타 치즈 등으로 채우는 후식)를 마지막으로 앞두고 있었을 때였다. 노아보다 먼저 저택으로 돌아와 있던 이안이 산책을 하기 위해서였는지 홀로 내려왔다가 흐뭇해하는 고용인들과 행복하게 디저트를 먹고 있는 노아를 발견했다. 불만족스럽다는 듯 이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정신 사납게 왜 거기서 노닥거리고 있어?”

 이안의 말 한 마디에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와장창 깨져 나가면서 둘의 시중을 들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고용인들이 제각각 기념품을 챙겨 들고 뿔뿔이 사라졌다. 그들은 이안과 노아가 함께 있을 때면 항상 되도록… 그 자리에 있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이유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다들 알 것이다.) 순식간에 포크를 문 채로 정지 상태가 된 노아가 파란 눈만 데구르르 굴려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음… 그러니까… 기념품을 잘 포장해둔 상자가 두 세 개 아래 남아 있긴 한데… 줘야 하나?

 “저기, 이안…”

 고용인들만 선물을 줘 놓고 이안만 안 주기엔 뭐 했던 노아가 어색하게 테이블 아래에서 선물 상자를 꺼내 이안에게 내밀었다. 이안이 가까이 다가와 선물을 집어 드는 걸 노아가 조마조마하게 올려 보는 동안, 이안은 포장을 까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시큰둥하게 툭 다시 노아에게 내던졌다.

 “이딴 싸구려 안 받아.”

 그 자리에 있던 고용인이 또 다시 구박 받는 노아를 가엾게 여겼으나 그와는 반대로 노아는 이안의 말에 뜨끔해 하고 있었다. 그게 좀 싸구려인 거 어떻게 알았지… 그게, 딱히 싸구려를 주려고 한 건 아닌데 고용인들 선물을 주다 보니까 이안의 것은 깜박하고 제일 좋지 않은 선물만 남았던 것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애초에 이안 선물은 사지도 않았다. 노아 혼자만 갔다 온 것도 아니고 이안과 같이 간 건데 이안 기념품까지 살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이안이야 큐브 아일랜드는 수도 없이 많이 가봤을 테고.

 그런데 어째 이안이 시선을 내려 노아의 앞에 놓여 있는 접시를 바라보며 관심을 보였다. 접시 한 가운데에 연한 베이지 색과 흰 색의 마카롱이 어여쁘게 금가루까지 뿌려 데코레이션 된 접시였는데, 이안이 손을 뻗어 흰 마카롱을 집어 들자 노아의 눈이 커졌다.

 아… 안돼! 내 마카롱! 노아가 속으로 안타깝게 외쳤으나 이미 마카롱은 접시를 떠나 이안의 입을 향하고 있었다. 노아는 울망울망한 얼굴로 한 입에 마카롱을 먹은 이안이 다른 마카롱까지 해치우는 모습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마음이 몹시 아팠다. 내가 왜 제일 맛있는 걸 마지막으로 남겨 두었을까… 마카롱 먼저 먹을 걸. 노아가 안타깝게 텅 빈 접시와 이안을 번갈아 바라봤다.

 “뭐, 불만 있어?”

 “아니요…”

 노아가 몹시 시무룩해서는 포크를 내려 두었다. 이 디저트 깡패, 아니 강탈자 같으니라고. 이건 요리사가 특별히 나 주려고 만들어 준 건데… 그런데 산책을 가려던 게 아니라 아예 여기에 볼 일이 있었는지 이안이 노아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노아가 입을 조금 벌렸다. 이안이 고용인에게 지시했다.

 “커피 좀 줘.”

 “예, 알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테이블 위에 있던 카놀리에 손을 뻗어 한 입 먹은 이안이 강렬한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들어 보니 노아가 매우 풀이 죽은 얼굴로 시선을 내리 깔고 있었다. 그게 노아의 디저트를 뺏어 먹은 탓이라고는 요만큼도 생각하지 못한 이안은 자신이 선물을 거절해서 그런 거라고만 여겼다. 어찌나 노아의 표정이 슬퍼 보였던지 잠시 빤히 노아를 쳐다보다가 이안은 고용인이 커피를 내오자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노아의 표정을 무시했다.

 커피를 내온 고용인이 둘의 조용한 대화를 위해 물러나자 이안이 커피를 마셔 카놀리의 단맛을 중화시키며 입을 열었다.

 “사흘 뒤에 손님들이 저택에 오실 예정이니 그리 알아.”

 “손님…들이요…?”

 우울해있던 노아가 기운을 조금 되찾았다. 손님이라면, 이전에 헤더 같은 손님일까? 이안이 Tear의 사장이니만큼 노아는 이안이 Tear에서 온갖 조련에 능숙한 이들을 끌고 오는 걸 생각하자 상상만해도 행복해졌다. 어쩌면 자신의 생일 날 성공하지 못한 갱뱅 플레이를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약간 들뜬 노아가 조심스럽게 이안을 떠 보았다.

 “혹시 전에… 헤더와 같은 손님이신가요?”

 노아의 질문에 이안이 이상하게 조금 불쾌한 얼굴로 커피잔을 탁, 내려 놓았다. 그리고 노아를 한번 힐끗 바라보더니 평소보다 더 쌀쌀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중요한 손님들이니 처신에 주의해야 할거야. 평소처럼 헤프게 구는 일 없도록 해.”

 “네…”

 평소처럼이면 헤더가 왔을 때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어제 사교 모임 때를 말하는 건가. 궁금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손님들이라니 이안 말마따나 제법 금실 좋은 부부인 척 굴라는 이야기일 터다. 하긴 노아도 일반인을 상대 하는 건 썩 내키지 않았다. 클럽에서 만났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과 달리 일반인은 몸의 한계를 잘 알지 못하니 다칠 위험성이 높았다. 노아가 괜히 그 동안 클럽 매니저가 소개해준 사람들만 골라 만난 게 아니다.

 말을 마친 이안은 기어코 카놀리를 다 먹어 치워 노아를 슬프게 만든 뒤 본래의 목적대로 산책을 하러 나갔고, 노아는 덩그러니 테이블 위에 남겨진 빈 접시들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안 앞에서는 맛있는 걸 먹지 않을 거야… 

 우울하게 포크나 집적거리고 있던 노아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디저트의 향이 달달하게 남은 가운데 낯선 냄새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몸 어딘가를 살짝 간지르는 것도 같고, 아니면 좀 긴장시키게 만드는 것도 같은 냄새는 알파 특유의 것이었다. 설마 이안의 알파 페르몬인가?

 저도 모르게 이안이 앉았던 자리에 몸을 가까이 하며 정확하게 냄새를 맡으려 했던 노아가 제 앞에 놓여지는 푸딩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것도 아기 주먹 조금 될까 말까 한 크기로 나오던 평소와 달리 완전 특대형 푸딩이었다. 노아가 눈을 별처럼 반짝거리며 올려다 보자 고용인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죄송합니다, 주방에서 마지막 디저트를 내오는 것을 깜박했다고 합니다.”

 노아는 곧 아까 맡았던 페르몬 냄새 따위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노아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달콤한 시럽이 잔뜩 뿌려진 푸딩을 행복하게 떠 먹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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