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07)

26

 하이든이 없는 동안 이안은 노아를 실컷 괴롭혔다. 그냥 눈에 보이기만 하면 고용인이 있거나 없거나 지분거리고 희롱했는데, 대체 고용인들은 무슨 교육을 받은 건지 이안이 노아를 반쯤 벗기는 수준으로 농락하며 음담패설을 하건 말건 항상 무표정하게 일관했다. 

 덕분에 요즘 별 달리 신경 쓸 것 없이 매일매일 괴롭힘 당하는 노아만 잔뜩 신이 났다. 노아는 이안이 저택에 있을 적마다 그저 결혼한 의무를 다하려는 순진한 오메가처럼 굴면서 이안을 졸졸 쫓아다녔다. 노아는 이안이 서재에서 서류를 보고 있으면 차나 간식을 드시라고 주러 들어갔고, 정원을 같이 산책하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청했으며 저녁마다 이안과 꼭 식사를 같이 했다.

 물론 당연하지만 그 행동은 노아가 원하는 대로 서재에서 볼펜 꽂이가 되거나 정원에서 물이 조금씩 졸졸 흘러나오는 호스를 뒤로 물고 기거나… 아니면 식사 중에 테이블에 엎어져 박히는 결과로 이어졌다. 노아에게는 참으로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노아가 하루하루 매일을 뿌듯하고 알차게(?) 보내고 있을 쯤이었다. 이상하게도 하이든의 휴가가 매우 길어지는 바람에 저택에 집사장이 부재한지 3주 째 되는 날, 전 날도 만족스러운 밤을 지내고 난 뒤 느지막한 아침까지 침대에 푹 파묻혀 행복하게 잠을 자고 일어난 노아는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내려왔다가 고용인으로부터 이안의 외국 출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가족 동반 사교 모임이 있다고?”

 “네, 노아 님. 저택에서 1시에 출발한 뒤 공항에서 전용기에 탑승할 예정입니다.”

 어쩐지 전날 저녁 고용인들이 분주하게 왠 짐을 꾸리는가 했다. 노아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노아 자신은 결혼한 사람 치고 참으로 평온하고 느긋하게 지내고 있었다. 보통 결혼하고 난 뒤에는 반려자와 함께 다른 사교 모임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노아는 이안과 결혼하면서 일단 이전에 자신이 가입해 있던 온갖 클럽과 사교 모임의 활동을 그만 두었다.

 하지만 결혼 후 이안은 노아에게 그 어떤 사교 모임도 소개하지 않았다. 상류층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사교 모임이니 이안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무런 사교 클럽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고… 이건 그저 이안이 노아를 무시하는 행동일 뿐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몹시 속을 끓일 만할 태도였지만 노아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지금의 한가로운 생활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데 괜히 나서서 망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여하간 그런 이안이 노아도 같이 동반해야 한다는 걸 보면 꽤 중요한 모임인 모양이다. 아직은 프로스트와 밀러가 동맹관계에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는 거겠지. 노아도 저택에서 혼자 ‘심심하게’ 지내는 것 보다는 이안을 따라가는 게 더 좋았다. 매일 저택에서 지내다 보니 오랜만의 외출 다운 외출이 반갑기도 했다.

 “사교 모임이면 좀 격식 있게 입어야 하니까…”

 노아는 그 동안 대강 가족들을 따라 사교 모임에 다녔을 때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옷을 골라냈다. 1박 2일간의 일정이라 옷이 그렇게 많이는 필요하지 않았다. 정, 필요하면 가서 사도 되는 일이고. 노아가 옷을 고르자 얼른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이 바리바리 짐을 쌌다. 보통은 이런 일정이 있으면 최소한 전 날에 알려 주는 게 예의인데, 뭐… 언제는 이안이 노아에게 예의를 차린 적이 있던가.

 외출할 준비를 마치고 리무진에 탄 노아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안은 딱히 제게 사재를 마련해 주거나 활동 비용을 주지도 않았다. 에이, 어차피 바깥 활동은 못하는 거네. 테너에게서 받은 재산이 좀 되었지만 노아는 이안이 활동 비용을 안 주니 사교 활동 같은 거 굳이 안 해도 된다고 합리화 했다. 사교 모임에 참석하면 신경 쓸 게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어차피 오래 갈 결혼도 아닌 걸.

 공항에 도착하고 난 뒤 노아는 간단한 출국 심사를 거쳐 바로 전용기 게이트로 향했다. 승무원의 매우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탑승하니 안에는 승무원과 기장 말고는 아무도 없다. 분명 고용인이 말하기를 3시까지 도착해야 한다고 했는데… 노아가 완벽한 스마일 미소를 짓고 있는 승무원에게 물었다.

 “3시에 출발하는 게 아닌가요?”

 “아…, 아닙니다. 이 전용기는 5시에 이륙할 예정입니다.”

 하긴 이안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지. 먼저 와서 기다리기는커녕 아예 노아에게 2시간 먼저 일찍 도착하게까지 만드는 사람 아닌가. 이안이 올 때까지 푹 쉬고나 있자 생각하며 노아가 푹신한 좌석에 앉았다. 매우 친절하게도 승무원은 노아가 기다리는 내내 달콤한 디저트 류를 제공해 주었다.

 이안은 노아가 디저트를 종류 별로 하나씩 비우고 영화 하나를 다 보고 나서야 다니엘을 이끌고 나타나 전용기에 탑승했다. 그래 놓고는 힐끔 노아를 한 번 보고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없었다. 이안이 굉장히 싸가지 없고 재수 없는 성격인 걸 모르고 결혼한 것도 아니라서 노아는 기분이 별로 상하진 않았다. 서서 기다린 것도 아니고, 그저 방에서 뒹굴며 하던 걸 여기서도 하며 시간을 보낸 것뿐이니까.

 이안이 탑승하자 마자 내내 대기하고 있던 비행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이륙했다. 심심하기도 했고 또 혹시나 비행기 내에서의 이런 저런 걸 기대 하면서 노아가 슬쩍 말을 건네 보았다.

 “회사 일이 많이 바빴나 봐요?”

 탑승 시에도 (다니엘이 끙끙거리며 들고 온) 서류 한 무더기와 함께 들어온 이안은 노아의 질문에 아무런 대꾸하기는커녕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완벽히 노아를 무시하는 행동에 오히려 이안보다도 다니엘이 매우 미안해 하는 얼굴로 하하 어색하게 웃으면서 노아의 질문에 대답했다.

 “요즘이 연말이라서 일이 좀 많네요. 원래는 다섯 시까지 오려고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서…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아니에요, 그렇게 많이는 기다리지 않았어요. 저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걸요.”

 2시간 하고 30분 정도면 충분히 많이 기다린 거였지만, 눈 밑이 퀭하니 매우 피곤해 보이는 다니엘의 안색을 보자 혼자서만 여유롭게 놀고 있었던 게 조금 미안해진 노아가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이안이 크게 코웃음을 쳤다.

 “도착한지 얼마 안 되었다고? 내가 분명 3시까지 도착하라고 했는데… 지각을 했단 이야기지, 그건?”

 “아뇨, 지각 한 게 아니라…”

 노아가 반사적으로 해명하려고 했지만 이안은 오늘 따라 할 일이 많아서 스트레스를 받아 그랬는지 평소보다 매우 심술궂게 웃을 뿐이었다.

 “어디 한번 도착해서 두고 보자고.”

 헤헤… 도착해서 두고 보자면 나는 좋지… 그런데 아까보다 괜히 자기 때문에 노아가 이안의 심술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해 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쩔쩔 매는 다니엘을 보자니 양심이 찔려 노아는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지난 번 복도 때도 다니엘이 어지간히 당황해 해서 좀 미안했었다. 그건 그렇고 다니엘은 대체 얼마를 받기에 이안 밑에서 일하는 걸 감수하는 걸까?

 이안과 다니엘이 비즈니스 관련으로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동안 노아는 오늘 밤에도 있을 플레이를 대비하여 쿨쿨 잤다. 머리를 대자마자 금새 잠에 빠져들어 한잠 푹 잔 노아가 도착을 알리는 기장의 안내 방송을 듣고 일어 났을 때는 창문 밖으로 야경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불빛들이 반짝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탔네. 작게 하품을 하면서 깨어난 노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행기 내부 스크린에 도착한 장소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이란 이름만 보고 노아는 어디로 가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아, 큐브 아일랜드에 가는 거구나…”

 오랜만에 와보네, 하고 노아가 중얼거렸다. 큐브 아일랜드는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만들어진 인공 섬으로 주로 부자들의 호화롭고 화려한 휴양지나 마찬가지인데, 자주 사교 모임의 장소가 되기도 하는 곳이었다. 

 노아의 예상대로 전용기에서 내려 리무진에 타자 차가 향하는 방향은 바다 위에서 아스라하게 반짝거리고 있는 큐브 아일랜드와 연결된 도로였다. 오랜만에 밖에 나온 데다가 향하는 곳이 큐브 아일랜드라고 하니 노아는 조금 신이 났다. 큐브 아일랜드에는 볼 것도, 놀 곳도 제법 많았으니까. 물론 이안이 제대로 놀게 해준다는 가정 하에서만…

 불친절한 이안을 대신해서 다니엘이 설명한 바에 따르자면 큐브 아일랜드 정 중앙에 위치한 호텔이 이번 사교 모임의 장소였다. 호텔에 예약한 방에 들어가면서 노아는 아까 도착하고 나서 두고 보자는 말을 기대하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지만, 이안이 통화하기에 바빠 좀 풀이 죽었다. 하긴 시작 시간이 저녁 7시부터라고 했으니까… 시계를 확인하자 1시간도 채 안 남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빠듯하게 도착한 걸 보니 오늘 바쁘긴 참 어지간히 바쁜 모양이었다.

 노아가 모임에 적절한 옷으로 갈아입을 때까지도 이안은 기나긴 통화를 하다가 거의 시간이 아슬아슬해서야 서둘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노아가 눈을 데굴거리며 이안이 옷을 갈아 입는 모습을 지켜 보는데, 옷 매무새를 다듬으면서 이안이 노아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제법 상냥하게 허리를 한 팔로 감싸오면서 미소 지었다.

 매우 예의 바른 이안의 태도에 노아가 놀라서 흠칫했다. 뭐… 지? 보통 넘어트리거나 엎어트리거나 밀거나 여하간 셋 중 한 가지 유형의 행동을 했으면 모를까 이안은 결혼 직후 단 한번도 노아에게 지금처럼 다정한 제스처를 취한 적이 없었다. 노아가 좀 경계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안이 조금 삐뚤어진 노아의 옷깃을 바로 잡으면서 마치 그린 듯한 웃는 얼굴로 경고했다.

 “이 모임에서 우리는 사이 좋은 부부인 거야. 알겠어?”

 “네에…”

 그럼 그렇지. 하긴 뭐 딱히 이안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노아는 남들 앞에서는 가능한 다정한 부부 행세를 할 생각이었다. 노아는 아직 세간에 둘 사이의 불화설이 도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직 이안과 이혼할 생각이 없었을 뿐더러 (다른 말로는 즐기려면 한참 멀었다는 이야기다) 불화설을 듣고 머리 끝까지 화가 치솟은 제 아버지가 밀러 가의 저택에 들이닥치는 불상사를 원하지도 않았다. 노아는 이혼할 때는 조용히 합의하고 이혼하고 싶었다.

 결혼 한 뒤 처음으로 이안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노아가 모임 장소인 옥상 스카이 라운지로 향했다. 밀러 가의 저택 기후와는 다르게 큐브 아일랜드는 겨울에도 꽤 선선한 날씨를 유지하고 있어 겨울철에는 엄두도 못 낼 야외 모임의 개최가 가능했다. 노아는 화려한 정찬과 조형물이 불빛을 반짝거리며 한껏 차려진 라운지를 돌아 보았다. 분위기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오, 어서 오시게. 꽤 먼 곳인데도 참석해 줘 고맙네.”

 “아무리 멀어도 와야지요.”

 이안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모임 개최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모임 개최자인 하워드 맥밀란은 노아도 몇 번 모임에서 본 적이 있는, 익히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안과 노아는 맥밀란에게 결혼 축하 인사와 함께 덕담을 몇 마디 주고 받은 뒤 라운지 안으로 입장했다.

 라운지 안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반은 노아의 눈에 익은 사람들이고 나머지 반은 모르는 이들이었다. 종종 낯선 언어들도 들려오는데다가 모임 개최지가 샌프란시스코인 걸 보니 국제급 사교장 쯤 되나 보다, 하고 노아가 생각했다.

 모임에 참가하는 내내 이안은 라운지 내에서 굉장히… 노아에게 낯설게 굴었다. 한 마디로 노아를 좋아해서 결혼한 사람마냥 다정하게 굴었다는 이야기다. 이안이 매우 친절하고 상냥하게 와인을 마시지 않겠냐고 물어봤는데 솔직히 그 태도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노아는 팔에 쬐금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래도 노아는 몇 년간 갈고 닦은 연기 실력을 바탕으로 이안의 행동에 맞추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신혼을 보내고 있는 부부인양 다녔다.

 노아는 겉으로는 방긋방긋 웃으며 이안을 따라다녔지만 솔직히 재미는 별로 없었다.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모르는 이야기를 웃는 얼굴로 듣고 있자니 발도 아프고 배도 고프다. 저렇게 맛있는 정찬을 차려 두었는데 먹지 못하는 게 몹시도 안타까웠다. 저 정찬들… 호텔에서 제공한 거니까 방에서 따로 주문할 수 있겠지?

 이안이 러시아 출신인 것 같은 독특한 악센트를 구사하는 사람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노아는 슬금 눈치를 보다가 조금 떨어져 파티 테이블에 다가갔다. 노아가 꼴깍 침을 삼키며 테이블 위에 예쁘게도 진열 되어 있는 키시(*달걀, 우유에 고기, 야채, 치즈 등을 섞어 만든 파이의 일종)를 하나 골라 집어 들려고 할 때였다. 

 “노, 노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노아가 고개를 돌려 보니 왠지 어딘가 낯익은 남자가 제 눈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노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더라… 누구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데. 기억을 해내려고 노아가 애를 쓰며 일단 아는 척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남자의 입이 더 벌어졌다.

 아, 생각났다. 어거스트 기업의 차남… 올해 추수 감사절 기념 파티에서 만났었지. 노아가 마침내 남자를 어디서 보았는지 떠올렸다. 그런데 여전히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추수 감사절 기념 파티에서 만나 인사한 사람이 어디 한 두 명이어야지.

 그 사이 남자는 입을 벌렸다 닫았다 어쩔 줄 몰라 하더니만, 갑자기 대뜸 라운지를 장식하고 있던 장미 꽃을 화병에서 한 웅큼 뽑아 드는 게 아닌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