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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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보다 이안을 구슬리는 건 매우 쉬웠다. 그저 이안이 자신이 원하는 것은 절대 해주지 않으리란 걸 잘 숙지하고 있기만 하면 됐으니까.

 첫 날 노아를 범하고 난 뒤 이안은 다음 날 밤도 또 찾아왔다. 새벽에 찾아온 건 첫 날 뿐으로, 노아가 저녁을 먹고 난 뒤 방으로 돌아와 쉬고 있으려면 가타부타 말 없이 엎어놓고 박았다. 문제는 윤활제도 없이 하는 것 조차 그 놈의 속 궁합이란 게 너무나 잘 맞아서 이안이 제 좋을 대로 욕구를 푸는 건데도 너무 느낀 나머지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궁리한 끝에 노아는 사흘 째 되는 날 이안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애원했다. 

 “얌전히 있을 테니까 제발 아프게만 하지 말아 주세요…”

 두 말할 것도 없이 부탁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 날 밤 노아는 윤활제도, 뒤를 풀어주는 것도 없이 힘든 자세로 버텨가며 이안의 밑에서 괴롭게 울어야 했으니까. 노아는 뒤가 아프다고 그만해달라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이거야. 존나 끝내주네.’

 노아도 존나 정도의 욕은 마음 속으로나마 할 줄 안다. 

 여하간 그렇게 노아가 이 저택에 온지 일주일째, (혼자서만) 행복한 신혼 생활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럼요, 아버지. 정말 잘 지내고 있어요.”

 결혼을 한 이후로 테너는 거의 매일 노아에게 전화하고 있다시피 했는데, 매번 걱정 가득한 기색으로 안부를 묻는 테너에게 노아는 항상 밝은 목소리로 잘 지내고 있다 말을 해줬다. 아침 10시인데도 노아는 침대에서 한 없이 늘어져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상태였다. 요즘 밤 늦게 마다 이안에게 시달리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는 게 더더욱 힘들었던 지라… 그런데 오늘따라 테너의 걱정이 심해 노아가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아버지?”

 [그게… 밀러와 관련된 껄끄러운 소문을 좀 들어서… 하지만 아니다. 네게 잘 해준다니 괜찮은 거겠지.]

 껄끄러운 소문? 그게 뭘까… 혹시 이안이 그 클럽에 드나드는 것에 대한 소문일까? 하기 사 거기서 꽤 유명인사라고 했으니 누군가 알아보는 사람이 있긴 하겠지. 노아는 최선을 다해 테너에게 자신이 잘 지낸다고 말했다. 그가 지금 생활을 알아서 노아에게나 테너에게나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노아는 지금 신혼 생활이 지나치게 빨리 끝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테너와의 통화를 끝내고 난 뒤 노아가 그제서야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배가 고팠다. 보통은 아침이나 점심까지도 잘 음식을 먹지 않기 일수였지만 대체 어떤 요리사를 고용했는지 밀러 가의 식사는 하나 같이 혀에서 살살 녹는 듯 맛있었다. 흐아암 하품을 하면서 문으로 어슬렁 걸어갔다가 노아가 멈칫했다.

 ‘표정 관리, 표정 관리.’

 이안이 대놓고 구박하고 있는 사람 얼굴이 너무 밝고 여유로우면 안 되니까… 노아가 일부러 시무룩하니 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문을 나섰다. 저택 고용인들은 노아가 부부침실에 발도 못들이고 햇빛도 잘 들지 않는 구석진 방에서 지내는 건 알았지만 이안이 밤마다 노아를 찾아와 이러저러하게 괴롭히는 건 모르고 있었다. 노아의 방을 청소하는 고용인은 매일 밤 얼룩지는 시트를 보고 눈치 챈 것도 같지만… 뭐…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노아 주인님.”

 노아가 홀로 내려오자 하이든이 정중히 인사했다. 그는 이안과 달리 노아를 항상 아주 정중하게 대하고는 했는데, 이안도 하이든이 있을 때면 노아를 그렇게 노골적으로 차갑게 대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다른 고용인이 있을 때처럼 대놓고 구박하진 않았다는 의미다. 가끔씩 하이든을 대하는 이안의 태도는 마치 아버지를 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매일 늦잠을 자서 미안해요, 하이든.”

 “아닙니다. 이제 막 들어오시지 않았습니까. 아직 새 집에 적응하시려면 그러실 수도 있지요.”

 밀러 가의 저택에 와서 좋은 점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아 보자면 아침까지 늦잠을 자도 성가시게 구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침을 굶으면 안절부절 못하며 먹이려고 하거나 8시가 넘기만 해도 커튼을 활짝 열어 하는 수 없이 잠에서 깨어나게 만드는 프로스트 가의 고용인에 비하면 밀러 가의 고용인들은 결혼하자 마자 매일 냉대를 당하는 그를 가엾게 여긴 탓인지 아무도 노아를 터치하지 않았다.

 미리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어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식당에 들어서자 테이블에 정성스럽게 온갖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크림 색의 매우 맛있어 보이는 수프나 희고 부드러운 빵, 계란으로 만든 요리와 싱싱한 샐러드에 디저트까지… 노아가 눈을 반짝거리며 약간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푹신했는데도 어제 이안에게 맞아 부은 엉덩이가 닿자 쓰라렸다. 물론 밖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하이든은 노아가 맛있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흡족하게 지켜보며 시중을 들었다.

 마침내 노아가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크림 치즈 위에 메이플 시럽을 끼얹은 뒤 산딸기로 데코레이션을 한 푸딩을 냠 먹고 있을 때였다. 하이든이 노아의 앞에 푸딩을 하나 더 놓으며 입을 열었다.

 “노아 님, 오늘 회사에서 같이 점심을 하자는 이안 님의 전언이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노아가 달짝지근한 산딸기를 꼴깍 삼키면서 눈을 깜박였다. 하이든은 그저 묵묵부답 노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엥… 이안이 회사에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고? 저택에서는 한 번도 같이 식사한 적이 없으면서? 이 저택에 온지 일주일 째, 이안은 아침과 점심은 저택에 없으니 그렇다 쳐도 저녁까지도 노아와 같이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점심을 같이 하자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이안이 매일 밤 노아를 가혹하게(?) 괴롭히고 있는 걸 모르는 하이든은 그저 두 분 사이가 좋아지려고 하나보다 하며 내심 기쁜 표정이었다. 노아가 눈을 굴렸다. 이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주일 만에 외출을 하니 노아도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알겠어요. 몇 시까지 회사로 가면 될까요?”

 “가능한 1시까지 도착하길 바란다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지금이 열 한시니까 시간은 넉넉했다. 여기서 이안의 회사까지 그렇게 거리가 먼 것도 아니었고, 차를 타고 갈 거니까. 노아는 남은 푸딩도 맛있게 해치 운 다음 방으로 돌아와 외출할 준비를 했다. 클럽에 가는 게 아니므로 노아 프로스트 다운 얌전한 옷으로 고르기도 했다. 준비를 마친 노아가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체크했다. 와이셔츠에 감색 가디건, 진한 색의 청바지에 회색 코트까지… 음, 난 뭘 입어도 참 잘 어울려. 노아가 자화자찬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의 모습에 만족한 뒤 홀로 내려가 차가 대기하고 있는 앞 뜰로 나가는데 하이든이 심플한 쇼핑백을 들고 서 있었다. 이게 뭔가 궁금해하자 하이든이 노아에게 설명했다.

 “주인님께서 회사로 가져 오라 말씀하신 물건입니다.”

 “그게 뭔데요?”

 아무 생각 없이 물으며 쇼핑백 안에 든 걸 보니… 뜻밖에도 3단으로 된 꽤 큼직한 도시락 통이 들어 있었다. 아니, 도시락이라고? 외식하는 게 아니었어?? 요즘 세상에 누가 도시락을… 하며 궁금해 하는데 하이든이 노아의 옆 좌석에 도시락이 담긴 쇼핑백을 가지런히 놓아두며 설명했다.

 “오늘 주인님께서 같이 점심을 하신다면서 주방에 도시락을 싸놓으라고 직접 지시하셨습니다. 부디 즐거운 식사 되십시오.”

 도시락 때문에 오늘 아침이 간소한 편이었던 걸까… 지금 상황이 영 이해가 가지 않아 노아가 하이든을 바라봤지만 하이든은 매우 뿌듯하기 그지 없는 표정인데다가 눈빛으로는 파이팅… 하고 말하기 까지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하이든에게는 기쁜 듯 활짝 웃으며 배웅을 받으며 리무진에 올라탄 노아였지만,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고민하느라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젯밤에도 자신을 찾아와 (노아에게는 매우 만족스럽게도) 괴롭혀 대던 이안이다. 어젠 침대도 아니고 맨 바닥에서 무리한 자세로 이안을 받아 내느라 아직도 등이며 무릎과 손바닥이 얼얼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무릎에 쓸린 자국이 좀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도시락 데이트 같은 로맨틱한 일정이라니… 이안에게 요만큼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도시락 통 안에 막 이런저런 도구가 들어 있을지도 몰라! 딜도는 크기가 크기니 만큼 힘들겠지만 로터 쯤은… 기대하면서 노아가 도시락 통을 열어 보았으나 잘 썰려져 담긴 채소와 소스 통이 담긴 샐러드 박스, 샌드위치와 잘 조리된 치킨이며 따뜻한 수프가 담겨진 보온 통, 싱싱한 과일과 수제 요플레가 담긴 디저트 박스까지 어딜 보나 혼신의 힘을 다해 도시락을 만들어낸 요리사의 정성만이 듬뿍 담겨 있을 뿐이었다. 방금 막 아침(?)을 먹었으면서도 노아는 잠시 침을 흘리며 도시락을 들여다 보다가 혹시 음식이 식을까 다시 닫았다.

 리무진은 점심 시간대라 한적한 도로를 쌩쌩 잘도 달려 밀러의 회사 앞에 섰다. 기사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노아가 도시락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내렸다. 노아는 회사 까마득한 꼭대기에 위치한 로고와 쇼핑백의 로고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제 보니 쇼핑백에 있는 로고가 밀러의 회사 로고였다.

 도시락을 덜렁거려 음식이 안에서 굴러다니는 일이 없게 하려고 노력하며 노아가 회사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에 있던 시계를 보니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미 건물에 들어왔으니 시간이 넉넉해 노아가 로비 안에 있던 카페에 들려 커피도 샀다.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이 마실 커피만 샀다가 그래도 혼자 마시기는 좀 그렇겠지, 하고 마음 써서 이안의 커피도 샀다. 점심 후에 마실 거라고 하니 상냥한 종업원이 커피가 식지 않도록 보온용 캡에 싸주기까지 했다.

 문제는 대체 어디로 올라가느냐였다. 노아는 잠시 로비 중앙에 서서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고민했다. 아버지나 형의 회사였다면 이미 입구부터 경비가 알아 보고 비서가 자신을 맞이하러 나왔을 터니 별 확인 조치 없이 바로 회장실에 올라갈 수 있을 텐데… 여기는 이안의 회사였다. 그것도 자신을 싫어하는 이안 밀러. 

 어쨌든 1시까지 오라고 했으니 말은 해두었겠지. 노아는 한 손에는 보온 포장된 커피가 있는 갈색 종이 백을, 다른 한 손에는 도시락을 들고 데스크로 걸어갔다. 손이 부족할 정도로 뭔가 들어본 건 처음이야, 하고 한편으로는 부잣집 도련님답게 감격스러워하면서…

 척 봐도 온 몸을 나 비싸요라고 외치고 있는 명품으로 휘감은 데다가 노아가 무시 못할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가자 로비 안내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노아 프로스트, 1시에 회장님과 약속이 잡혀 있을 텐데요.”

 프로스트 가의 애지중지하는 막내 아들이 이안 밀러에게 한 눈에 반해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는 현재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사방팔방 퍼졌기 때문에, 안내 데스크의 직원이 잠시 놀란 눈빛으로 ‘당신이 바로 그 노아 프로스트?!’ 하는 표정을 잠시 지었다가 간신히 다시 사무적인 표정을 지었다. 직원은 좀 당황했는데 그건 노아가 그 노아 프로스트이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노아가 눈을 깜박이며 기다리는 동안 직원은 컴퓨터로 뭔가 확인해 보았다가, 당황해 하며 어디론가 전화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했다. 보통 회사로 손님을 부를 때면, 그것도 그 손님이 회장과 결혼한 사람일 정도면 로비부터 비서가 마중 나와있지 않던가? 이렇게 직접 찾아와 회장실로 올라가는 길을 묻게 만드는 건 좀... 방문 고객에 대해 단단히 지시를 받았을 안내 데스크의 직원까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한참을 여기저기 연락해 보던 직원은 마침내 쩔쩔 매면서 노아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비서실이 바쁜 모양인지 통화가… 되질 않아서…”

 “아… 그런가요?”

 항상 연락이 가능해야 할 비서실이 바빠서 통화가 되지 않는다는 건, 결혼식 날 사업상 바쁜 일이 갑자기 생겨 신혼 여행을 취소해야겠다는 이안의 통보만큼이나 억지스러운 냄새가 풀풀 나는 소리였다.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시라며 허둥지둥하던 직원이 직원 휴게실로 보이는 장소로 노아를 안내하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귀엽게도 녹차에 간식으로 먹고 있던 것 같은 쿠키까지 작은 접시에 소담하게 담아 내주었다.

“저… 일 보세요. 저는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녹차랑 쿠키 고마워요.”

 괜히 이안이 자신을 괴롭히는 통에 직원까지 고달파진 것 같아 노아가 죄책감 반 진심 반을 담아 감사 인사를 했고 직원은 안절부절 못하다가 연락이 되면 바로 알려 드리겠다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 보면서 조용히 휴게실 문을 닫았다. 노아는 아작아작 직원이 놓고 간 쿠키를 먹으면서 결론을 내렸다. 

‘이안이 대 놓고 나를 엿 먹이려고 하는 거구나.’

 노아도 존나와 마찬가지로 엿 먹인다 정도의 비속어는 마음 속으로나마 할 줄 알았다.

 그나저나 이 쿠키 맛있네. 직원의 간식을 뺏어 먹는 것 같아 하나만 먹으려 했던 노아가 슬그머니 접시에 다시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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