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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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이안이 이 샵을 방문했는가는 일단 제쳐둔 채 노아가 즉시 바닥에 주저 앉아 상품 진열대 아래로 몸을 감추었다. 직원도 즉시 노아처럼 몸을 낮추며 물었다. 홀로그램 장치를 드릴까요? 이 샵에서 오랫동안 일한 직원은 노아 같은 반응을 보였을 때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 호텔은 떳떳한 사람만이 방문하는 게 아니니까.

 노아가 목소리도 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자 직원이 즉시 허리에 차고 있던 포켓 벨트에서 안면 인식 방해 홀로그램 장치를 내밀었다. 양 쪽 귀에 끼우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제품으로, 노아가 서둘러 귀에 끼우자 시야가 잠시 일렁이다가 흰 가면 홀로그램이 얼굴을 덮었다. 혹시 몰라 노아는 입고 있던 후드 모자까지 뒤집어 써 제 화사한 금발도 꼭꼭 가렸다.

 노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마치 신발이라도 묶고 있던 사람처럼 슬며시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워낙 돈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곳이다 보니 이 호텔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게 처음은 아니었다. 다만 테너가 워낙 노아가 집 안에서만 지내도록 싸고 돌며(덕분에 집 안에서 거의 모든 활동이 가능했다. 수영장, 승마장, 영화관, 도서관, 심지어 쇼핑조차 백화점에 전화하여 직원에게 상품을 저택에 들고 오게 하면 끝이었다.) 만나도 괜찮을 사람을 일일이 정해준 탓에 노아가 알고 지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곳엔 발도 들이지 않는 점잖은 이들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지만 노아를 알아보는 이들이 존재하긴 했다. 그러나 평소 노아와 지금의 노아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머리부터 발 끝까지 거의 다른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달랐기 때문에 상당수가 그냥 닮은 사람인가 하고 지나갔고, 이따금 노아 프로스트인 걸 알아차릴 때는 각자 이런 곳에 다니는 게 주변에 알려지면 곤란한 입장이었기에 이 호텔의 불문율에 따라 서로 모른 척 해주거나 아니면 좋은 섹스 파트너로 지냈다. 

 하지만 노아는 이안 밀러에게 지금 자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혹시라도 이안이 자신이 노아 프로스트임을 한 눈에 알아 차리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럼 자신의 행복한 신혼생활은 완전 망하는 건데… 홀로그램을 쓴 상태에서는 눈 부분이 까맣게 처리 되기 때문에 상품을 살펴보는 척 하면서 노아가 이안의 모습을 살폈다. 이안은 흘깃 노아를 보긴 했지만 이내 무심한 얼굴로 신경을 껐다. 노아처럼 안면 인식 방해 홀로그램을 장착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이 호텔에 널리고 널렸다.

 “조용히 다른 문으로 안내해드릴까요?”

 “아니요, 마음 써줘서 고맙지만 괜찮아요. 저는… 천천히 둘러볼 테니 일 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필요할 때 불러주십시오.”

직원을 보내놓고 노아는 물건을 고르는 척 하면서 연신 이안을 관찰했다. 이안은 카운터의 직원과 뭐라 대화를 나누고 난 뒤 매장 안을 둘러 보며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노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안에게도 직원이 달라 붙어 매우 사근사근하게 이것저것 설명하고 있었다. 노아는 흘끔 흘끔 이안을 바라보면서 그가 무엇을 구매하는지 유심하게 살폈다. 

 앗… 그건… 못 보던 제품인데! 노아가 마음 속으로 안달을 냈지만 이안은 무심하게 그냥 슥 지나칠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나다니면서 뭘 사기는커녕 계속 눈으로만 훑어 보기만 하니 노아는 애가 탔다. 왜… 쇼핑을 하러 왔으면 뭔가 사야 할 것 아냐… 무슨 성게마냥 고무 돌기가 사방에 돋아난 로터를 아무 생각 없이 쇼핑용 바구니에 다섯 개나 담으면서 노아가 생각했다.

 그 때 갑자기 이안이 방향을 틀어 노아에게로 향했다. 설마 들켰나 싶어 노아가 뜨끔하며 시선을 옮겼다. 노아가 서 있던 진열대로 온 이안이 바구니에 수북하게 담긴 고무 돌기 로터를 빤히 바라봤다. 혹시나 들켰을까 싶어 노아는 식은땀이 다 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외양을 바꿨어도 오메가 페르몬은 바꿀 수가 없지… 샴푸 향에 가렸으면 좋겠는데… 노아가 초조해하거나 말거나 이안이 직원과 대화를 나눴다.

 “이 제품이 잘 나가나?”

 “진동이 너무 세다는 불만 사항이 있어 잘 판매되는 제품은 아닙니다.”

 “흠. 그럼 이것도.”

 직원이 예, 하고 공손히 대답하면서 들고 있던 차트에 뭔가 표기했다. 진열대를 위 아래로 살펴본 이안이 지나가려고 할 때, 노아는 욕심을 참지 못하고 으흠, 하고 헛기침 하는 소리를 냈다. 뭔가 해서 이안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돌아 보자 노아가 일부러 보란 듯이 바구니에 아까부터 눈독 들이고 있던 신상 로터를 한 여섯 개쯤 와르르 담았다. 잠시 이건 뭐야, 하는 얼굴로 노아를 바라보던 이안은 완전히 신경을 끄고 다른 진열 상품대로 향했다. 

 노아는 시무룩하게 바구니에 담았던 상품을 다시 진열대에 하나하나 돌려 놔야 했다.

 “노아? 왜 그러고 있어?”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노아가 이안을 지켜보며 조마조마하고 있는 사이 알렉스가 다시 사복으로 갈아 입고 샵으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입고 있는 옷으로 겨우 노아인 걸 알아차린 알렉스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응… 내가 여기 드나드는 걸 들키면 안 되거든.”

 노아가 이토록 매우 조심하는 건 처음 본 알렉스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노아가 지켜보던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안이 막 중앙 스테이지 안드로이드 앞에 서서 직원과 뭔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노아가 눈을 반짝거렸다. 안드로이드 사려는 걸까? 안드로이드를 살 거면 다른 건 굳이 안 사도 되는데… 그런데 이안 밀러를 본 알렉스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어? 저 사람…”

 “왜, 아는 사람이야?”

 “직접적으로 아는 건 아니고 얼굴만. 워낙 여기서 유명해서.”

 여기에 거의 상주하며 살다시피 한 알렉스가 알 정도라니 그렇게 이안이 여기를 많이 들락거린다는 이야기인가? 하긴, 지난 번에 전화 통화를 하면서 [Tear]의 이름을 언급한 것도 그랬다. 아직도 안드로이드 앞에서 직원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안을 흘깃 보면서 알렉스가 설명했다.

 “여러모로 유명한 사람이지. 여기 들락거리면서도 같이 잤다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 듣기로는 이 호텔 건설하는데 투자를 제법 많이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사장 친척이라는 이야기도… 아, 맞아. 마피아일지도 모른다고도 하더라.”

 노아가 알렉스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곳에 자주 드나드는 이안 밀러는 잘 생기고 돈도 많을 것 같은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데다가 같이 잤다는 사람이 매우 드물어서 유명하다 못해 온갖 루머가 나도는 모양이었다. 노아는 다른 건 몰라도 마피아가 아니라는 건 확신했다. 이안이 마피아였으면 아버지가 절대 결혼을 승낙하실 리가 없겠지…

 “그럼 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야?”

 “아무도 없는 건 아냐. 같이 자도 되게 입이 무거운 사람만 골라서 자니까 그런 거지. 근데 내가 듣기론, 타냐 알지?”

 안다. 타냐는 뭐랄까… 이쪽 세계에서 엄청나게 유명한 남성 알파다. 그런데 별로 좋은 의미에서 유명한 건 아니고, 그는 또라이 같은 기질 때문에 유명한 사람이었다. 별명이 미친년이니 말 다했다. 타냐는 알파면서도 항상 깔리는 걸 선호했다. 물론 개개인마다 성적 취향이 있는 법이니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지만, 타냐는 그 수준이 달랐다. 타냐가 어느 날 자신에게는 더 ‘박힐 구멍’이 필요하다며 즉석에서 고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지하에서 생 라이브 인체 개조 수술을 한 건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다.

 “타냐의 친한 녀석이 그 사람이랑 잔 적이 있는데 아주…”

 “아주?”

 알렉스가 힐끔 이안을 보면서 목소리를 아주 조용하게 낮추었다.

 “끝내 준데, 거기가. 한 번 같이 자면 절대 잊을 수 없다던가. 딱 세 번만 같이 자면 안 매달릴 사람이 없다고 한다네. 그 이야기 듣고 타냐가 한동안 그 남자랑 자려고 엄청 애썼었지. 결국엔 실패했지만.”

 “와…”

 이 호텔에서는 웬만해서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기 힘든데… 정력이 끝내준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노아는 더더욱 빨리 이안과 결혼하여 맞이하게 될 첫날 밤이 몹시 기대가 되었다. 노아와 알렉스가 이야기를 하는 사이 샵 내부와 연결 되어 있던 사무실에서 누군가가 나와 이안에게 다가갔다. 샵 오너였다. 노아는 이안이 오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사무실로 향하는 걸 보면서 눈을 반짝거렸다. 알렉스가 그런 노아를 보고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이안을 빤히 바라봤다.

 “왜, 너도 저 사람과 자고 싶은 거야?”

 “뭐…”

 알렉스가 약간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고, 이안과 같이 자고 싶은 게 사실이긴 해서 노아가 말 끝을 흐리자 알렉스가 한숨처럼 웃으면서 노아의 등을 두드렸다. 넌 결혼하잖아, 노아. 이젠 한눈 팔면 안되지. 농담하는 알렉스의 말을 들으며 노아는 약간 양심이 찔렸다. 하지만 저 사람이 결혼할 사람이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기에 노아는 화제를 돌리며 알렉스와 함께 그간 클럽에서 친하게 지냈던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알렉스는 전환된 화제에 맞장구를 쳐주고는 다정하게 노아의 허리를 팔로 감싸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이안을 한번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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