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케인이 가게로 들어서니 영감이 찻잔을 들어 보이며 인사했다.
“왔어?”
대답 없이 케인은 주위를 둘러봤다. 헤더가 보이지 않았다. 겨우 며칠 만에 도망갔을까. 케인이 눈살을 찌푸리자 영감이 픽 웃으며 말했다.
“지금 심부름 보냈어.”
“어때? 쓸 만해?”
“겨우 며칠 본 걸로 어떻게 알아. 더 두고 봐야지.”
말은 이렇게 해도 꽤 마음에 든 눈치다. 헤더의 성격이 어떤지는 케인도 모르지만 아무튼 영감과 잘 맞는다면 됐다.
“가려고?”
케인이 곧바로 몸을 돌리자 영감이 의아해했다.
“볼일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아닌데.”
“거참, 싱겁기는.”
영감의 가게를 나온 케인은 근처 과자점에 들렀다. 일전에 헤더를 영감에게 소개해 주고 돌아가다가 발견한 가게였다. 작고 동그란 반죽을 튀겨서 파는데 새틴이 좋아할 것 같았다.
영감이 빌려준다던 우산을 사양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사 갔을 테다. 새틴이 걱정하는 얼굴을 보려고 일부러 비를 맞느라 못 샀다.
오늘은 다행히 날이 맑았다. 막 튀겨서 건져 놓은 빵을 한 봉지 샀다.
케인은 따끈한 봉투를 안고서 골목을 이리저리 파고들었다.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다른 때라면 주변에 눈길도 주지 않았을 테지만 요즘 케인은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행여 또 헤더처럼 아는 얼굴을 우연히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이상한 일이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이다. 어떻게 살든 제 운명일 뿐 케인이 관여할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헤더를 영감에게 소개해 준 것도 그저 새틴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어서였다. 헤더에게 개인적인 동정이나 연민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막상 지금에 이르니 다른 기분이 든다. 뭐라고 분명히 얘기하긴 어려우나,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또 누군가를 발견한다면 손 정도는 뻗어 줄 수 있을 성싶다.
묘하게 들뜬 마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일찍 왔네?”
문을 열어 주던 새틴은 케인이 봉투를 내밀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선물.”
“와, 도넛이네?”
새틴이 봉투를 들여다보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 곧장 봉투에 손을 넣으려다 도로 손을 뺐다.
“이따 저녁 먹고 먹어야지.”
별거 아닌 간식을 아끼는 게 귀여워서 케인은 픽 웃었다. 가슴께가 근질거렸다.
새틴이 봉투를 소중히 안고 응접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내일 나갔다 올 거야.”
굳이 말을 하는 이유는 평소 가지 않던 곳에 가기 때문이겠지. 케인은 곧바로 되물었다.
“어디를?”
“양조장에 가려고.”
“웬 양조장?”
새틴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지금껏 한 번도 술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왜 양조장에 간다는 걸까.
“재크가 거기서 일하거든. 로저스하고 같이 보러 가기로 했어.”
“흐음.”
“얼굴만 보고 나오면 재크가 눈치 보일 수도 있으니까 뭘 좀 사려고. 상점에 안 내놓는 술을 살 수 있대.”
“흐음.”
“사실 쉴 때 만나면 좋은데 로저스도 일을 하니까, 쉬는 날을 맞추기가 어렵나 봐.”
“흐음.”
케인의 반응이 평소 같지 않다는 사실을 새틴은 조금 늦게야 알아차렸다.
“왜?”
“아냐, 계속 얘기해.”
“아니긴.”
새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케인의 얼굴을 봤다. 케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마주쳤다.
이윽고 새틴이 조심스레 물었다.
“같이 갈래?”
“그럴까. 마침 나도 내일 쉬기로 했는데.”
거짓말이다. 이따 몰래 나가서 일정을 취소하고 올 예정이다.
당연하게도 새틴은 케인이 거짓말을 하는 걸 알아챘다. 그러나 추궁하지 않고 지그시 보다가 웃었다.
“그래.”
현명한 선택이었다.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하지 않아도 어차피 같이 가게 될 것을 알고 있다.
짧은 침묵은 부엌에서 들려온 목소리로 끝났다.
―용사님! 수프가 넘칩니다! 배우자분의 파렴치한 욕망처럼요!
∞ ∞ ∞
멀리서 다가오던 로저스가 새틴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지척에 이르자 얼굴의 미소가 사라졌다. 새틴의 곁에 선 케인을 발견한 탓이다.
“둘이 같이 나왔구나.”
로저스가 묘한 표정으로 케인을 보며 하는 말에 새틴은 멋쩍게 웃었다.
“케인도 쉰다고 하길래.”
혹시 로저스가 내키지 않아 할까 봐 새틴은 슬쩍 눈치를 봤다. 다행히 로저스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다만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다. 새틴이 그러했듯.
새틴은 괜스레 제가 민망해서 헛기침하며 케인의 옆구리를 때렸다.
“뭐 해, 인사 안 하고.”
“얼굴 봤잖아.”
“그게 인사야?”
새틴이 도끼눈을 뜨자 케인은 그제야 뚱한 표정으로 “안녕.” 하고 한마디 했다. 로저스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 사람은 일단 역마차를 타러 이동했다. 양조장은 북문 밖에 있다고 했다. 데이지랜드 방면이라 새틴과 케인도 전에 그리 나가 본 적이 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마차가 왔다. 마침 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북문까지 가는 동안 사적인 얘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재크는 무슨 일을 하는 거야?”
“정확히는 몰라. 전에 갔을 땐 그냥 잡다한 일을 다 한다고 들었어. 지금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구나.”
양조장에서 술을 만든다는 것밖에 모르는 새틴은 구체적인 상상을 하기가 어려웠다. 아무튼 여러 일이 있으려니 했다.
“산 술은 어떡하지?”
새틴이 물음에 로저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떡하냐니?”
“난 술을 안 마시는데…….”
“그럼 내가 가져갈게.”
“어디에 쓰려고?”
로저스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새틴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새틴은 약간 당황해서 웅얼거렸다.
“아니, 넌 열여덟 살이잖아.”
“그런데?”
여전히 로저스는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벅였다. 옆에서 케인이 픽 웃었다.
“애들이 아니라니까. 술 좀 마시는 게 뭐 대수라고.”
“아니, 그래도.”
케인이 하는 말을 듣고서야 로저스는 새틴의 걱정을 알아차렸다.
“정말 별걱정을 다 한다.”
로저스가 웃었다. 새틴은 멋쩍어서 뺨을 긁적였다.
마차가 북문을 빠져나갔다. 추수철이 가까워 밀밭이 온통 금빛이었다. 그저 재크를 만날 생각만 했지 풍경에 관해서는 생각지 않고 있던 터라 새틴은 깜짝 놀랐다.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다.
“저기야. 보여?”
로저스가 창밖을 가리켰다. 널따란 밀밭 너머에 큼지막한 창고 같은 건물들이 여러 채 보였다. 새틴은 창문에 붙어서 감탄했다.
“꽤 크구나.”
“그래서 손이 많이 필요하대.”
“우리가 가는 건 모르겠지?”
“응, 그래도 얼굴은 볼 수 있을 거야. 전에 왔을 때도 잠깐 나왔었어.”
일전에 로저스가 양조장에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를 잠깐 듣다가 새틴도 어제 케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케인이 직접 하진 않을 테니.
“참, 케인이 헤더를 봤대.”
“헤더? 어디서?”
“시장 근처에 일자리랑 집이랑 이거저거 소개해 주는 할아버지가 있거든. 그 할아버지 밑에서 일을 하고 있었대.”
“잘 지낸대?”
“괜찮아 보였나 봐. 그렇지?”
새틴이 확인차 묻자 케인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상 헤더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을 리 없으나 아무튼 겉보기엔 괜찮아 보였으니 별말 않는 것이겠지.
로저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 난 사실 헤더하고 별로 친하진 않았는데 그래도 안심이 되네.”
“나도 그래.”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다. 친하지 않았어도 미워하던 사람이 아니면 불행해지길 바라지 않는다. 어디서든 괜찮게 살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드라마며 만화에서 마지막 화가 다가오면 모든 등장인물이 행복해지는 것도 그래서다. 보는 사람들은 참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놓인다. 중요치 않은 역할, 안 나온 지 한참 된 인물,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희한하게 그 작은 배역이 신경 쓰인다.
때로는 악당이 벌 받지 않을 때보다 선량한 조연이 불행할 때 더 괴롭다.
마차는 양조장에서 조금 떨어진 승강장에 멈췄다. 가장 먼저 내린 케인은 별말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무심코 그 손을 잡고 내리다 새틴은 아차 했다. 슬쩍 돌아보니 로저스가 입을 세모 모양으로 벌리고 보고 있었다. 꼭 리타 같은 표정이다.
“방금 이거는.”
새틴이 뭐라 말하려 하자 로저스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사뿐히 마차에서 내렸다.
“설명 안 해도 돼.”
“……고마워.”
민망해서 새틴은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세 사람은 역마차 승강장에 적힌 시간표를 확인하고 양조장 쪽으로 발을 옮겼다. 희미하게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사람들 소리가 들리지?”
새틴의 의문에 로저스가 답했다.
“양조장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대. 시음도 하고, 시설도 보고 그러는 거 같던데.”
“그럼 우리가 좀 돌아다녀도 이상하지 않겠구나.”
양조장이 가까워질수록 소리는 더 커졌다. 명랑한 웃음소리는 안의 분위기를 짐작게 했다. 누군가 건배를 외쳤다. 마치 휴일 같은 분위기다.
세 사람이 막 양조장의 울타리를 지났을 때였다. 안쪽의 창고에서 일꾼 한 무리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수건을 뒤집어쓴 일꾼들은 나무 그늘에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쉬는 시간인 모양이다.
그 사이에서 벌겋게 익은 얼굴로 종알대는 소년이 보였다. 덩치는 좋지만 얼굴에서는 앳된 티가 났다. 새틴이 혹시 했을 때 로저스가 손을 들며 이름을 불렀다.
“재크!”
소년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금세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고 뛰어왔다. 한눈에 모두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우와, 다들 잘 지냈어?”
구름 한 점 없는 날이다. 가을이라도 낮엔 볕이 뜨거웠다. 실바람이 불자 밀밭에서 희미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양조장 뒤로 우거진 숲은 아직 푸르다.
숲속의 작은 학교가 떠올랐다. 아이들이 새처럼 재잘대며 문을 열고 뛰어나가던 모습을 새틴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이제 아이들은 작은 새 같은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세상을 향해 외치는 목소리는 전보다 단단하고 거칠고 때로는 냉소적이다. 저마다의 고뇌 속에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산 결과다.
그럼에도 새틴은 아이들을 보며 생각한다.
모두가 여전히 싱그럽다.
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