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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36화 (136/139)

136화

케인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위화감을 느꼈다.

“새틴?”

집이 조용했다. 언제나 케인이 귀가하면 새틴이 부엌에서 나오며 잘 다녀왔냐고 묻는데 어째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케인은 일단 신발장을 확인했다. 외출용 신발이 있었다. 실내용 슬리퍼는 보이지 않는다. 집에 있다는 의미다.

‘자나?’

평소 낮잠을 자는 시간은 아니나 사람이 어떻게 매번 똑같을까. 오늘따라 느지막이 한숨 자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케인은 기척을 죽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과 부엌에 불이 밝혀져 있다. 해가 떨어진 후에 눈을 붙인 모양이다.

계단을 오르고 있자니 어디선가 쑥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케인은 중턱에 멈춰 귀를 기울였다.

“이건 너무 징그럽지 않아?”

―아까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본질은 같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새틴과 마신의 목소리는 케인의 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왜 주인 없는 방에서 둘이 저러고 있는지 의문이다.

케인은 소리 내지 않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새틴은 그렇다 치고 귀신같이 주변의 일을 알아차리는 마신이 케인의 귀가를 알아차리지 못했단 사실이 별스럽다. 대체 무엇을 하고 있기에.

새틴은 케인의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눈썹 사이에 희미한 주름이 팼다. 저 정도로 집중한 모습은 처음 본다.

―인간의 몸은 이렇게나 유연하군요. 용사님이 하도 뻣뻣해서 다른 인간들도 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네가 뭘 알아. 본 적도 없으면서.”

―네? 제가 왜 본 적이 없습니까. 저번에 용사님과 배우자분이 식탁에서.

“다, 닥쳐.”

케인은 소리 없이 웃었다.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천 일의 밤, 천 명의 왕자들>을 보고 있었다. 케인에게는 남사스러운 책을 본다고 타박해 놓고 내심 궁금했을까.

방 안은 환했으나 계단 주변은 어둑했다. 그래서 새틴은 문간에 서 있는 케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용사님은 이런 신묘한 행위에 관심이 없으십니까?

“아니, 난 뭐, 그냥 평범한 게 좋아.”

―그렇군요. 하지만 평범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익숙한 것을 평범하다 한다면 말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를 매일 하면 그 또한 평범해지지 않을까요? 나서서 사람들에게 전파한다면 정말로 평범한.

“으, 미친 소리 좀 하지 마.”

새틴이 기겁을 하며 책을 덮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어, 언제 왔어?”

“좀 전에.”

“……그게 언젠데.”

“좀 전.”

케인이 지그시 웃자 새틴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슬그머니 책을 감췄다. 눈치 없는 마신이 종알거렸다.

―다녀오셨습니까! 용사님의 배우자분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뭔데.”

케인은 무심코 물었다. 분명 엉뚱한 소리일 텐데.

―용사님은 지고지순하여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을 거란 겁니다! 참으로 기쁜 일 아닙니까!

“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새틴이 황급히 마신을 만류하려 했으나 입 없이 하는 말을 막기는 불가능했다.

―요즘 용사님이 배우자분이 없는 사이 툭 하면 새 친구분을 만나러 가기에 의심을 하였는데요. 제가 두 분의 관계에 증인을 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걱정을 했단 말이지요. 그런데 불필요한 걱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 얘길 뭐 하러.”

새틴은 얼른 케인의 눈치를 봤다. 행여 오해를 살까 걱정이라도 되었는지.

“정말 불필요한 걱정이었네.”

새틴의 걱정과 달리 케인은 별생각 없었다. 그런 의심은 한 적도 없다.

물론 새틴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달갑진 않다. 새틴이 누군가에게 과도하게 관심을 표하는 것도 싫다. 그럴 가능성이 생기는 상황도 탐탁잖다.

요즘 새틴은 정말 툭 하면 로저스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케인은 그 상황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일단 로저스는 아이가 아니고, 무엇보다.

“걘 네 취향 아니잖아.”

케인의 말에 새틴은 약간 얼이 빠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술을 뻐끔거리다 겨우 “어?” 했다.

“아니야? 난 네가 내 얼굴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케인이 방으로 들어서자 새틴의 허리가 뻣뻣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어깨만 움찔움찔하며 도망갈 틈을 찾았다.

“네가 그 날다람쥐를 자주 만나는 게 좋진 않아. 하지만 그런 걱정은 안 했어. 걔는 너무, 동그랗잖아.”

“동그랗기는 하지…….”

“내가 있는데 그 동그란 놈하고 뭘 하겠어.”

“그건, 그렇지.”

케인은 새틴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엉겁결에 일어난 새틴이 눈을 되록되록 굴리며 눈치를 봤다. 케인은 별말 하지 않고 새틴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앗!

성물을 끄집어내니 마신이 부질없는 탄성을 터뜨렸다.

케인은 곧장 방을 나가 성물을 계단 밑으로 내던졌다.

―아앗!

퉁, 퉁, 퉁.

성물이 계단을 구르는 소리를 못 들은 체하고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문은 왜 닫아?”

“평범한 거 하려고.”

“요즘 너무, 자주 하지 않아?”

“매일 해야 평범해지지.”

“다 들었구나…….”

∞ ∞ ∞

콜은 마중 나온 새틴을 보자마자 엉뚱한 소리를 했다.

“선생님, 왜 소금쟁이처럼 걸어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니? 소금쟁이라니.”

“소금쟁이 몰라요?”

“알긴 하는데.”

소금쟁이가 어떻게 걷는지 전혀 모르겠다. 물에 떠다니는 곤충이 아니었나. 걷긴 하나?

새틴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니 콜이 몸짓으로 설명했다.

“이렇게, 이렇게 걷고 있잖아요.”

콜이 어기적거리는 모습을 보고서야 새틴은 의미를 이해했다.

“……근육통 때문이란다. 소금쟁이 흉내를 낸 게 아니라.”

“대청소했어요? 대청소하면 우리 엄마도 근육통 얘기 하는데.”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들어가자.”

콜은 주변에 혹시 케인이 있는지 주의 깊게 살핀 후 집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콜은 케인을 어려워했다. 새틴은 소금쟁이처럼 걸어서 그 뒤를 따랐다.

언제나처럼 식탁에 앉아 수업을 시작했다. 콜은 새로운 수업을 좋아했다. 수학보다 문학이 더 취향에 맞는 모양이었다. 물론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른 법이다.

“왜 갑자기 어두워져요?”

“음, 둘이 무언가를 했다는 암시지.”

“뭘요?”

“으음, 사랑?”

새틴의 개떡 같은 답을 콜은 찰떡같이 알아듣지 못했다. 눈만 껌벅였다.

‘어린이용 소설이 아니었네…….’

모험 소설이라기에 다크에이지 같은 내용을 기대했는데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모험을 떠난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었다.

모험을 떠나기 전의 주인공은 꽤나 한량 같은 사내아이였다. 마을의 소녀와 툭 하면 물레방앗간에서 만났다. 두 사람이 무언가 하려고 할 때마다 달이 구름에 가렸다. 그리고 장면 전환.

생략된 부분에서 주인공과 마을 소녀가 무슨 일을 했을지 새틴은 바로 짐작했지만 콜은 짚이는 바가 없는 눈치다.

‘있으면 그편이 더 이상하지.’

새틴은 어색하게 웃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이윽고 주인공은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큰 인물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샘솟았다.

콜은 또 의문을 표했다.

“너무 이상해요.”

“뭐가?”

“아까는 마을을 떠나기 싫댔으면서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요?”

“음, 마음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

“원래 그런 게 뭐예요?”

“나 자신도 잘 모르는 거라고 할까.”

“내 건데 왜 몰라요? 전 다 알아요.”

의기양양하게 말하지만 그럴 리 없다. 새틴은 콜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했다.

“친구하고 싸운 적 있어?”

“네.”

“다시 생각하니 내 잘못 같았던 적은?”

“……있어요. 화내고 집에 왔는데 자려고 누우니까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그런 말을 하면 안 됐는데.”

최근에 친구하고 싸운 적이 있는지 이야기가 제법 상세하다. 새틴은 선반에서 과자를 하나 꺼내 주고 물었다.

“친구랑 싸울 때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모르겠어요. 왜 그랬을까요?”

“사람 마음이 그래. 여러 마음이 뒤섞여 있어서 가끔은 안 보이는 것들이 있어. 나중에야 발견하는 거지.”

콜은 참새 부리 같은 입으로 과자를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얘긴지 이제 이해한 듯하다.

과자를 다 먹은 콜이 히히 웃었다.

“꼭 마법 같네요.”

“응?”

“마법은 발명하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거래요. 그래서 마법사들은 마법을 발견하는 게 꿈이래요.”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처음 듣는 얘기가 아니다. 새틴은 이 이야기를 팀에게 처음 들었다. 팀은 겨우 열두 살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님?”

새틴의 표정이 이상해졌는지 콜이 식탁 위로 몸을 기울였다. 주근깨가 다닥다닥 붙은 콧잔등을 움찔거리며 새틴의 얼굴을 살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 신기한 얘기라서.”

새틴은 멋쩍게 웃고 콜에게 과자를 하나 더 꺼내 주었다.

마법은 발명할 수 없다. 그저 발견할 뿐이다. 마음 또한 그렇다. 누구도 마음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곳, 어두운 곳에 있던 마음을 어느 순간 발견한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모험을 떠났고, 새틴은 결심을 했고, 케인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고, 로저스는 케인을 걱정했고, 콜은 친구에게 미안해졌다.

실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로저스는 재크가 양조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몇은 썩 평탄치 못하게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그럴까.

혹시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줄 수도 있지 않을까.

새틴은 여전히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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