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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32화 (132/139)

132화

외전2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친구가 1+1

콜은 올해로 열 살이다. 가난한 집 아이였다면 일을 할 나이지만 다행히 콜은 먹고살 만한 집에서 태어났다.

콜에게 문학 공부를 시켜 보면 어떻겠냐고 새틴이 넌지시 말을 꺼내자 콜의 아버지 맥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배우면 좋지.”

“콜은 똑똑하니까 금방 배울 거예요.”

“어휴, 똑똑하기는. 선생 없었으면 지금도 노상 쏘다니기나 했을 텐데.”

맥스는 놀기를 좋아하는 어린 아들을 살짝 흉보는가 싶더니 금세 좋은 말로 끝맺었다.

“그래도 건강이 최고지, 암.”

“그럼요.”

“근데 문학을 배우려면 책도 좀 사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죠. 안 그래도 이따가 사러 가려고요.”

“어디 가서 사려고?”

“신전 근처에 서점 있잖아요. 늘 거기서 사요.”

“거기? 거기는 애들 책이 없을 텐데.”

“저도 그게 걱정이긴 한데 찾아봐야죠.”

새틴이 전에 듣기로 맥스는 클로버랜드 토박이라고 했다. 2대째 같은 자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던가. 그래서인지 본인이 취급하는 품목이 아니어도 물건이 들고 나는 데에 빠삭한 모양이다.

잠시 뜸을 들이며 턱수염을 문지르던 맥스가 입을 뗐다.

“북문 근처에 다른 서점이 있어. 거기 가면 애들이 볼만한 책이 좀 있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아세요?”

“상인 연합에 소모임이 있거든. 다른 걸 파는 상인끼리 모여서 서로 손님을 소개해 주는데 쏠쏠하게 도움이 된다니까, 이게.”

“그런 게 있었군요.”

꽤 그럴듯한 판매 전략이었다. 경쟁 업종이 아니라면 손님을 소개해 준다고 손해를 볼 리도 없으니.

‘생선을 먹는다고 고기를 못 먹진 않잖아.’

언젠가 두유 노 불고기 계획을 실행하게 된다면 새틴도 꼭 상인 연합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그 전에 간장을 만드는 데 성공해야 하지만.

‘곧 될 거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랬어.’

새틴은 몇 번이나 실패한 간장의 추억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가 대체 몇 명인지 모르겠지만.’

실패가 모두 성공의 어머니라면 성공은 어머니 부양하다 등골이 휠 지경이다.

아무튼 용건이 끝났으니 이만 가 보겠다고 인사하고 가게를 나왔다. 맥스가 뒤쫓아 나오더니 온 김에 좀 가져가라며 콩을 한 주머니 줬다. 한 귀퉁이가 뾰족한 병아리콩이었다. 이 세계에 와서는 처음 본다.

새틴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모르는 작물이라 놀랐다고 생각했는지 맥스가 의기양양하게 설명했다.

“남쪽 나라에서 들여온 거야. 삶아 먹으면 아주 맛있어. 단단하니까 좀 오래 불려야 해.”

남쪽 나라는 대체 어디일까. 없는 게 없나 본데.

피어오르는 의문을 덮어 두고 일단 사양하는 시늉을 했다.

“안 챙겨 주셔도 되는데…….”

“겨우 이만큼인데 뭐.”

맥스의 말마따나 겨우 두어 줌 정도인데 계속 사양하기도 뭐해 새틴은 웃으며 받아 들었다.

“잘 먹을게요.”

새틴은 작은 콩 주머니를 달랑달랑 들고서 북문으로 가는 마차를 탔다. 이 세계에도 러시아워는 존재했다. 지금처럼 애매한 평일 대낮이면 대체로 도로가 한적했다.

제법 익숙해진 도로 풍경을 보다가 문득 떠올렸다.

‘지금도 어디서 케인이 감시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리 생각하니 맞은편의 승객도 수상하고 창밖을 지나는 행인들도 수상했다.

이제 더위도 한풀 꺾였는데 왜 저리 챙이 넓은 모자를 썼을까. 마차가 오면 피해야지 왜 빤히 쳐다보지. 저 정도로 주위를 안 살피는 건 수상해 보이지 않으려는 계산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하니 끝이 없었다.

‘아무렴 어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케인이나 혹은 케인에게 고용된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니다. 케인의 분리 불안은 조금 문제 같기도 하지만, 새틴으로서는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이득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새틴은 편안한 마음으로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기다렸다. 미리 쇼핑 리스트도 짰다.

‘콜의 책을 사면서 다른 책도 봐야겠어. 이를테면 성숙한 어른이 되는 데 필요한 조언을 모아 놓은 자기계발서라든지…….’

자기계발서는 콜이 아니라 케인에게 줄 거다. 물론 건강이 최고지만 마음도 건강하면 더 좋으니까.

∞ ∞ ∞

맥스가 말한 서점을 찾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좁은 골목길이 구불구불하기까지 해서 한참을 헤맨 탓이다.

그러나 도착해서 보니 헤맨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꽤 큰데?’

이렇게나 큰 서점이 왜 꼭꼭 숨어 있을까. 잠깐 의아해하던 새틴은 곧 답을 알았다.

‘장사가 안되니까.’

공부가 부자나 귀족들의 취미로 취급받는 세상이다. 취미로 독서를 하는 서민이 흔할 턱이 없다. 평소 다니던 신전 근처 서점은 제법 좋은 위치에 있지만 붐비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다.

어쨌든 새틴은 금세 들떴다. 안 그래도 재미있는 책을 좀 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규모가 크다면 분명 볼만한 책도 많이 있을 것이다.

서점으로 들어서며 새틴은 구매 계획을 세웠다.

일단 가장 먼저 콜의 교재가 될 만한 책을 찾고 그다음엔 케인의 교재(그런 게 있다면), 그다음엔 여가용 소설. 혹시 농사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이 있다면 그걸 두어 권 사도 좋겠지.

손님이 많이 오지 않아서 그런지 새틴을 반기는 직원도 없었다. 그래도 어디선가 기척은 느껴졌다. 점원이 안쪽 어디 있겠거니 짐작하고 새틴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책장을 살폈다.

‘찾기가 쉽지 않겠는데.’

수십 개의 책장을 빽빽이 채우고도 남은 책들은 바닥에 쌓여 있었다. 분류가 있긴 하나 그리 세세하진 않았다. 얼핏 보니 연애 소설과 모험 소설이 한 책장에 있었다.

대강 제목만 훑고 다음 책장으로 넘어갔다. 소설과 역사서가 섞여 있었다. 그다음 책장은 역사서와 지리서다.

‘아, 뭔가 기준을 알 듯 말 듯 한데.’

지리서 다음은 전쟁사 중심의 역사서가 다시 나오고 그다음엔 병법서가 나왔다. 그리고 고전 소설을 지나 성장 소설이 나왔다.

‘성장 소설과 철학서가 같이 있는 이유는 잘 모르겠어…….’

아무튼 성장 소설을 한 권 골랐다. 살짝 들춰 보니 시골에서 태어난 소년이 자라 도시에서 일을 하며 결혼도 하고 살다가 늙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런 내용 같았다. 전원 소설 느낌도 났다.

이 책은 케인에게 줄 거다. 어쩌면 자기계발서보다 이런 책이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콜에게는.’

첫 번째 책장에서 두껍지 않은 모험 소설을 하나 골랐다. 문장을 보니 은유가 많아 학습용으로 적당해 보였다.

꼭 사야 하는 책은 다 골랐으니 이제 새틴이 보고 싶은 책을 고를 차례다. 새틴은 여태 보던 맨 앞줄의 책장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섰다.

낮인데도 책장 때문에 볕이 잘 들지 않았다. 그래도 곳곳에 램프가 걸려 있어 책을 고르는 데 지장은 없었다.

새틴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장을 살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금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점원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다른 손님일 가능성도 없진 않다. 이쪽에서 저쪽의 기척을 느끼듯 저쪽에서도 이쪽의 기척을 느꼈을 텐데 여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책을 다 고를 때까지 점원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쩌지.’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새틴은 일단 책을 골랐다.

점점 더 깊은 책의 굴로 파고들며 새틴은 어느새 다른 기척에 관해서는 잊어버렸다. 괜찮은 책 같아서 잠깐 읽다 보니 순식간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다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새틴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저기요.”

“네?”

돌아보니 코 아래에 천을 휘감은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약간 쭈뼛거리며 바닥을 가리켰다.

“콩을 흘리고 계시는데요…….”

“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잠깐 얼이 빠졌던 새틴은 금세 의미를 알아들었다. 책에 정신이 팔려 콩 주머니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황급히 확인해 보니 콩 주머니의 입구가 열려 있었다.

“이런.”

새틴은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콩을 주웠다. 다행히 많이 흘리진 않았다.

새틴이 쪼그리고 앉아 콩을 주워 모으고 있으니 낯선 남자도 머뭇거리다 앉았다. 남자가 굼뜬 손으로 굴러간 콩들을 주워 모았다.

“감사합니다.”

인사하면서 보니 얼굴이 앳되었다. 스무 살도 안 됐을 것 같다. 케인보다 어릴 듯했다. 코와 입이 안 보이니 확신은 못 하지만.

콩을 모두 주워 담고서 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났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남자가 말했다.

“이따, 계산하실 때 불러 주시면.”

손님인가 했더니 점원이었던 모양이다.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지 뒷말을 분명히 하지 않고 웅얼거렸다.

새틴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그럼 천천히 고르세요.”

점원은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러나 아까처럼 안 보이는 데로 가진 않았다. 가까운 책장을 정리하며 연신 새틴을 흘끔거렸다.

‘뭐지?’

한 명뿐인 손님이라 신경을 써 주는 걸까.

새틴은 점원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척하며 계속 책장을 살폈다. 괜찮은 시늉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까는 감시를 당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관찰을 당하고 있으니 영 불편했다. 자꾸만 손발의 움직임이 어색해졌다.

결국 새틴은 더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할 말 있으세요?”

“네?”

점원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기 말고 누가 또 있다고.

뒤늦게야 점원은 얼굴이 벌게져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게, 그, 아는 사람을 닮아서 저도 모르게.”

“아, 그래요?”

“정말 죄송합니다……. 죽은 친구인데, 정말 너무 닮아서, 목소리도 비슷하고. 저는 정말.”

점원이 중얼거리는 말은 사과보다 자책에 가까웠다.

새틴은 점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가갔다. 휘감고 있던 천을 끌어 내리자 코가 드러났다. 통통한 뺨도.

빵처럼 동그란 얼굴이었다. 팔다리는 길쭉한데 얼굴은 동그란, 그런 애를 새틴은 알고 있었다.

“……로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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