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단단한 시금치 종자를 물에 담가 햇빛이 들락 말락 하는 데다 내놓았다. 가게에서 듣기로 싹이 튼 후에 파종을 해야 좋다고 했다.
힘든 일이 아니어서인지 케인은 끼어들 기색 없이 보고만 있었다.
‘시위하는 건가?’
케인은 어떤 말도, 별다른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볼 뿐인데 새틴은 압박을 느꼈다. 오늘따라 일도 안 나가고 내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고, 숨 막혀.’
새틴이라고 시금치 싹 틔우기가 케인과의 관계 발전보다 중한 일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당연하지 않은가. 쪽파나 시금치가 어떻게 케인을 대신할까.
다만 새틴은 피할 구멍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핑곗거리가 있으면 복잡한 생각을 피하는 것이 사람이니까.
‘신경 쓰이는 일을 다 해 놓고 나면 싫어도 집중하게 되겠지.’
따가운 시선 속에서 새틴은 할 일을 모두 해치웠다.
콜의 과외를 하고, 저녁에 쓸 식재료를 손질해 두고, 전부터 하려고 생각했던 소파 청소도 했다. 틈새에서 먼지가 구름처럼 나와서 기절할 뻔했다.
심지어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했는데, 바로 여름 이불 세탁이다.
“아직 여름인데.”
케인은 다 들리도록 혼잣말했다. 이웃에서 커다란 빨래통을 빌려 왔는데 두 사람이 들어가긴 좀 비좁아 케인 혼자 빨래를 밟고 있었다.
“내일모레면 가을이야. 추워지면 밖에서 빨래도 못 해.”
새틴의 핀잔에 케인은 뭐라 더 말하진 않았으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빨래 밟기는 멈추지 않는다. 철벅, 철벅! 저런 부분이 귀엽다.
‘요즘 귀엽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것 같아.’
콜은 늘 케인을 보면 꽁지가 빠지도록 달아나지만 새틴은 반대다. 케인을 보며 어떻게든 부드러운 부분을 찾는다.
치기 어린 표정을 지을 때나, 어울리지 않게 어설픈 행동을 할 때. 평소와 달리 다정한 말씨로 말을 붙일 때. 그럴 때면 무심코 귀엽다고 생각해 버린다.
한참 말이 없던 케인이 대뜸 물었다.
“오늘 밤에 새 이불이 더러워지면 어떡해? 겨울 이불은 안 샀잖아.”
새틴으로서는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새 이불이 왜 더러워져?”
침대에서 무슨 짓을 하지 않는 이상 더러워질 일이 있나. 이 나라 사람들은 신발을 신고 침대에 올라가지도 않는데. (새틴이 이 세계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도 아주 다행이라 생각했던 부분이다.)
고개를 갸웃하는 새틴을 보며 케인이 지그시 웃었다.
“모르지. 왜 더러워지는지.”
“왜 몰라?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말을.”
새틴은 말을 하다 말고 답을 알았다. 케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빨래를 꾹꾹 밟았다. 그리고 들으란 양 중얼거린다.
“다행히 침대가 두 개니까 잠잘 데는 있겠어.”
∞ ∞ ∞
요즘 새틴과 케인은 저녁 식사를 마치면 응접실에 앉아 독서를 한다. 새틴은 이 시간을 좋아했다.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는 세상이다 보니 독서도 꽤 재미있는 취미였다. 케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오늘 새틴은 <도심의 텃밭 가꾸기>라는 책을 읽었다. 그동안 케인은 외국의 어느 왕에 관한 야사집을 읽었는데, 제목은 <천 일의 밤, 천 명의 왕자들>이다. 며칠 전부터 계속 보고 있다.
‘희한한 제목이야.’
제목만 봐선 내용이 짐작되지 않았다. 그래도 케인이 꽤나 집중해서 읽고 있는 걸 보면 재미있는 모양이다.
“그거 무슨 내용이야?”
케인은 새틴을 흘끔 보고 되물었다.
“궁금해?”
“어, 어.”
왜인지 표정이 묘하다. 새틴은 아니라고 대답했어야 했는지 잠깐 후회했으나 이미 설명은 시작되었다.
“외국에 어떤 왕이 있었는데 아내가 천 명이나 됐대.”
“뭐?”
“웃긴 게 아내를 천 명이나 둘 수 있는데 여러 아내와 동시에 합방을 하면 안 된대. 그래서 왕은 천 명의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해 천 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행위를 해.”
새틴은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지금 내 앞에서, 야설을 읽고 있었던 거야?’
새틴의 표정을 본 케인은 한쪽 입꼬리를 비죽이 올리더니 즐겁게 이어 말했다.
“천 일 동안 천 명의 아내가 모두 임신을 해서 왕자가 천 명이 됐다는 얘기야. 지금 일흔다섯 번째 아내하고 하고 있어. 아내는 줄에 매달려 있고 왕은.”
“아, 아니, 안 말해 줘도 돼. 그걸 대체 왜.”
일흔다섯 번째 아내? 줄엔 왜 매다는 거야? 왕은 그래서 그 상태에서 뭘 어떻게 하는 건데? 궁금하지 않은데 궁금하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이놈의 고양이가 다 컸다고 구렁이를 삶아 먹었나.
새틴이 당황하건 말건 케인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히려 새틴이 당황해서 더 신이 났는지도 모른다.
“근데 번역이 별로야. 어떻게 다 왕자만 낳았나 했더니 이 나라에는 왕자랑 공주라는 단어가 없나 봐. 그럼 왕자들이 아니라 자식들이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아니, 안 말해 줘도 된다니까?”
“보니까 성별 구분을 잘 안 하는 거 같기도 해. 아내 중에 남자가 있어. 근데 남자가 임신을 했을 리는 없으니 천 명의 왕자라는 말이 과장이겠지.”
“그만 말하라고!”
새틴은 후다닥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둥지둥 계단을 올라가자 뒤늦게 케인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케인의 발소리는 빠르지 않고 느긋하다. 부드러운 실내용 슬리퍼를 신었는데 왜 그리 소리가 또렷한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새틴은 냉큼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지만 잠그지는 않았다. 잠그는 건 너무 냉정한 처사 같았다. 어쨌든 두 사람은 야한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는 사이니까.
그런데 발소리가 끊겼다.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올 줄 알았던 케인이 문 앞에 멈춰 있었다. 노크도 하지 않는다.
새틴은 잠깐 머뭇거리다 문에 대고 물었다.
“왜 안 들어와?”
“들어가도 돼?”
“……안 될 리 없잖아.”
열려 있을 땐 성큼성큼 잘만 들어오면서 새삼 뭐 하러 묻는지 모르겠다. 케인이 생각하는 예의범절의 범주가 궁금해진다.
여하튼 케인은 허락을 받고서야 문을 열었다. 아래층에서 새틴을 놀릴 때와는 달리 심각한 표정이다. 계단에서 어디 부딪히기라도 했나.
“왜 그런 얼굴이야?”
새틴이 묻자 케인이 제 얼굴을 더듬어 만졌다. 아무래도 본인이 어떤 표정인지 몰랐나 보다. 약간 얼빠져 보이는 태도가 웃겨서 새틴은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렸다.
“이리 와. 그, 남사스러운 책은 좀 치우고.”
“응.”
순순히 대답한 케인은 책을 협탁에 내려놓고 눈치를 보더니 침대에 앉았다. 여태 서 있던 새틴도 슬그머니 그 옆에 앉았다.
이미 밤이다. 신경 쓰이는 모든 일을 해치우고도 어영부영 미뤄 온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새틴은 최대한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케인, 내가 오늘 하루 종일 딴짓을 한 거는 네 의견을 무시하려던 게 아니라.”
의견이라는 표현이 맞을까. 욕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지만 그저 욕망뿐이었다면 지금쯤 새틴은 이미 완전한 경험자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물론 현재 불완전한 경험자라는 뜻은 아니지만 어쨌든 끝까지 하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라 뜸을 들이고 말았다. 그사이 케인은 아까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럼 해도 돼?”
뻔뻔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리고 새틴이 잠깐 대답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옆으로 바짝 붙어 왔다. 허벅지가 닿았다. 이 정도야 불편하지 않다. 마차를 탈 때도 이 정도 접촉은 늘 있었고.
“왜 그렇게 긴장해?”
케인의 물음을 듣고서야 새틴은 자신이 허리를 완벽한 직각으로 세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불편하지 않다는 건 자기 세뇌였다.
낯이 뜨거워 새틴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대답했다.
“너무 민망하니까 그렇지…….”
“좋았다며.”
“사람은 원래 좋아도 좋다고 말 못 하는 일들이 있어. 너도 그렇지 않니?”
“난 없는데?”
“그것참 좋겠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 안 민망한데?”
“안 민망할 수는 없겠지. 그냥, 민망한 채로 하는 거지.”
“해도 되는 거야?”
“……좋아도 좋다고 말을 못 할 뿐이라고 했잖아.”
잠깐 사이에 좋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거지. 얼굴을 가리고 있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찰나.
“으악!”
케인이 대뜸 일어나더니 새틴을 둘러멨다. 거꾸로 매달린 새틴은 음흉한 의도 없이 케인의 엉덩이를 보며 물었다.
“어, 어디 가?”
“내 방.”
“왜?”
똑같은 침대에 똑같은 이불을 쓰는데 굳이 자리를 옮겨야 할 이유가 뭘까.
새틴의 의문에 케인은 태연히 답했다.
“필요한 게 다 내 방에 있으니까.”
“뭐가 필요한…….”
무심코 물으려던 새틴은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잘은 몰라도 여러 가지 있겠지. 케인은 지금껏 75번의, 혹은 75가지의 성행위 묘사를 읽었으니 분명 이론만은 확실히 터득했을 터다.
‘줄에 매달아 놓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새틴이 입 밖에 내지 않은 말은 으레 그렇듯 마신이 대신 했다.
―만약 친구분이 용사님을 줄에 매달고 음탕한 ××× ××× ××× ×× ××× ×× ××!
아침엔 얼토당토않게 성스러운 소리를 하더니, 밤이 되자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상스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
케인이 발을 멈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새틴은 해야 할 일을 알았다. 케인의 어깨에 불편하게 매달려 있지만 주머니에 든 성물을 끄집어내는 데는 아무 무리가 없었다.
―××× ××× ×× ××× ×× ××!
날아간 성물은 옷장에 부딪혀 떨어졌다.
―아앗!
케인은 방을 나가자마자 문을 쾅 닫았다. 새틴이 한숨을 쉬고 있자니 케인이 말했다.
“이제 방해꾼은 없어. 핑곗거리도 없고.”
사람을 대롱대롱 매달아 놓고 선전포고를 하다니. 새틴은 머리에 피가 쏠린 와중에 생각했다.
‘이 부분은 확실히 생략되겠지.’
다크에이지는 전연령가 소설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