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케인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새틴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봤다. 이 집요한 시선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는데 새틴은 창문에 달라붙어 바깥만 보고 있었다.
‘볼 것도 없으면서.’
애지중지 키우던 쪽파는 모두 수확했고, 지금 텃밭에 남은 건 우스꽝스러운 허수아비 하나뿐이다. 새틴이 손수 만든 허수아비는 솔직히 오래도록 지켜볼 만한 명작은 아니었다.
사실 새틴이 저렇게 내외하는 이유는 짐작이 간다.
‘저렇게까지 부끄러워할 일인가.’
짐작은 가나 이해는 되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반대일 때가 많았다.
케인은 새틴이 평소 보이지 않는 부분(이를테면 몸에서 손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얼핏이라도 드러내면 진정을 하지 못했다. 얼굴이 멋대로 달아오르고, 얼뜨기처럼 눈을 굴렸다. 가렵지도 않은 목덜미를 긁어 대기도 했다.
그뿐인가. 해 본 적 없는 어떤 일(이를테면 열렬한 우정만으로는 할 수 없는 행위)을 상상하면 밤새도록 잠이 안 왔다. 기껏 잠들어도 별 해괴망측한 꿈을 꾸었다.
케인과 달리 새틴은 그런 부분에 무뎠다. 옷 갈아입는 케인을 멀뚱히 보고 있기도 하고, 묘한 분위기가 되어도 크게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무딘 게 아니라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나?’
노상 자긴 어른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성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아이보다 못하다니. 속세에 찌들어서 좋을 건 없지만 그렇게까지 순수할 필요도 없을 텐데.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 남다른가?’
글쎄.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신이 순결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속설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종의 부흥에 관심 없는 사람을 신이 편애할 이유가 없다.
‘그런 성격 같지도 않았고.’
말씀의 방에서 케인은 어떤 존재와 대화했다. 그 존재가 신이었는지 아니면 그와 유사한 다른 존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 존재는 신전과 세간에서 묘사하는 신과는 확실히 달랐다. 아득하고 성스럽다기보다는 뭐랄까.
‘퉁명스러운데 너그러웠어.’
케인이 아무 믿음 없는 사람인 걸 뻔히 알면서 소원을 들어주었다. 의심이 많다 핀잔하면서도 노성을 내거나 훈계하지 않았다.
새틴이 선택된 이유도 겨우 순결 때문은 아니겠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터.
그리 생각했을 때 새틴의 특이한 면모는 아마 타고난 기질이거나, 자라 온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거다.
‘하지만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지.’
케인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뒤돌아 있어 그 표정이 보였을 리도 없건만 때마침 새틴이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넌 뭘 그렇게 쳐다보는데. 밖에 신기한 거라도 있어?”
“네가 자꾸 쳐다보니까.”
새틴은 흘끔 케인을 돌아봤다가 순식간에 도로 창밖을 보았다.
“쳐다보는 게 싫어?”
케인이 소파에서 일어나자 새틴이 움찔했다. 소리로 이쪽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창가로 다가갈수록 새틴의 목과 어깨가 긴장했다.
“응?”
대답을 채근하자 새틴은 머뭇대다 고개를 저었다.
“싫은 건 아닌데 신경 쓰이잖아.”
“그럼 그건 싫었어?”
“그게 뭐야.”
“어제 한 거.”
새틴의 목덜미가 순식간에 벌게졌다. 신기해서 케인이 만져 보려 하니 새틴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케인은 옷깃 사이로 손을 넣을 수도 있지만 참았다. 대신 새틴이 달아날 틈을 주지 않으려고 바로 등 뒤를 막고 섰다.
이제 새틴은 이 상황을 피하려면 창문을 통해 나가야 하는데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몸놀림이 잽싼 편은 아니니. 어제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리 유연한 편도 아니고.
케인은 새틴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싫었어?”
“으으.”
귓바퀴에 숨결이 닿자 새틴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지난밤 욕실을 울리던 소리도 처음엔 이랬다. 시간이 지나며 숨소리가 더 짙어지다 나중엔 거의 우는 소리가 되었다. 아주 듣기 좋았다.
새틴은 지금 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구물구물 도망갈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끝내 한숨과 함께 포기했다.
새틴은 움츠렸던 목을 도로 빼며 웅얼거렸다.
“싫은 건 아니었는데…….”
“좋았다는 얘기야?”
“……굳이 비교를 한다면 그런 편이지.”
부끄러워하면서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케인이 픽 웃으니 새틴이 뒤를 흘끔거렸다. 이만 놔줄 때도 되지 않았냐고 묻는 것 같다.
그러나 케인은 못 알아들은 척 더 가까이 밀착했다. 어깨 위에 턱을 얹자 새틴은 더 돌아보지도 못했다. 고개를 돌리면 뺨에 입술이 닿을지도 모른다.
“그럼 오늘.”
“어제, 그 얘긴 뭐였을까?”
케인의 말을 급하게 끊고 새틴이 화제를 돌렸다. 케인이 멈칫한 사이 새틴은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어제 말이야. 마신이 그랬잖아, 야시장에서. 파전을 팔 방법이 있다고. 그걸 못 들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해?”
“넌 안 궁금해? 어제 그 아저씨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케인이 작게 혀를 차는데 저 멀리 계단에서 마신이 소리쳤다.
―아, 이제야 궁금해지셨군요!
밤새도록 설거지통에 잠겨 있었으면서 토라지지도 않는다. 물기를 말리겠다고 계단 난간에 매달아 둔 것도 전혀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못했고.
―제가 본 모습을 드러내고 인간들에게 명령하려고 했습니다! 심약한 인간들은 모두 겁을 먹고 파-전을 사 먹었을 것입니다. 용사님은 클로버랜드 최고의 부자가 되셨겠지요.
“돌아 버리겠네, 진짜.”
케인은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긴 숨을 몰아쉬었다. 분위기가 깨졌으니 불편한 상황도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새틴이 슬그머니 달아나려 했다.
“그럼 난 좀 나갔다가…….”
“어딜 가려고?”
“시, 시금치 종자를 살까 하는데.”
새틴은 쭈뼛거리며 창문 옆 벽에 몸을 붙였다. 어떻게든 케인과 접촉하지 않고 빠져나가 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 의지는 몹시도 연약하여 케인은 한 손으로 새틴의 몸을 뒤집었다. 졸지에 케인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 새틴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애먼 데를 보았다.
―부자가 된 용사님이 신전에 막대한 돈을 기부하면, 신전은 용사님의 이름으로 그 돈을 베풀고, 인간들은 용사님과 제 주인님을 찬양하고!
케인은 신나게 떠들어 대는 마신의 목소리는 무시하기로 했다.
“키스는 괜찮았잖아.”
“응, 키스는, 키스니까.”
―제 주인님을 칭송하는 노랫소리가 온 거리에 퍼져 나가고!
“만지는 것도 좋았다며.”
“따지자면 좋았던 거지만, 막, 매일 하고 싶을 만큼, 그 정돈 아니지.”
―훗날의 인간들은 제 주인님의 영향력이 급격히 커진 시기를 일컬어 파-전 혁명기라 부르고!
“숙련되면 더 좋을 텐데?”
“그게 무슨 기술도 아닌데…….”
“해 보지 않고선 모르잖아.”
“그건 맞는 말이지만…….”
―파전 파전 파전 파-전! 모두 노래 부르리! 파전 파전 파전 파-전!
“야, 조용히 해!”
새틴이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케인도 짜증이 확 치밀었다.
‘거의 다 넘어왔는데.’
∞ ∞ ∞
괴상한 노래를 부르는 애완성물 vs 발랑 까진 연하 남친. 어느 쪽이 더 곤란한가요?
새틴의 머릿속은 현재 전쟁 중이었다. 마신이 부르던 말도 안 되는 찬송가와 함께 기술 단련을 해 보자는 케인의 불량한 제안이 박빙으로 싸우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승자는 후자였다. 마신이야 말을 안 들으면 야단이라도 칠 수 있지만 케인은 아니다. 야단을 친다고 들어 먹을 리도 없고, 이게 야단을 칠 일인지도 사실 모르겠다.
새틴은 모든 연애를 픽션으로 배웠다. 배웠다는 말도 실은 틀렸다. 자연히 익힌 것을 배웠다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연인들은 만나기만 하면 싸우고 사고 치고 난리를 피우다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키스를 했다. 가끔 베드신으로 이어지기도 했으나 그 장면은 자세히 나오지 않았다.
‘자세히 나왔으면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격정 멜로였겠지.’
웹소설에도 종종 연애 무드가 나왔다. 그럼 댓글에서 열 중 아홉 명의 독자가 연애한다고 깝죽대지 말고 스토리 전개나 하라고 화냈다. 그러다 보니 웹소설 속 커플들은 대부분 키스도 못 했다.(로맨스 장르는 물론 상황이 다르겠지만 새틴은 그쪽 장르를 잘 모른다.)
그나마 외국 드라마는 개방적이었다. 장르 불문하고 수시로 베드신이 나왔다. 그래서 도리어 로맨틱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요컨대 새틴이 알던 연애는 실상과 퍽 다르다는 거다. 새틴은 연애에 관해 빙산의 일각, 콘텐츠에서 보편적으로 묘사되는 데까지밖에 알지 못했다.
연애의 클라이맥스는 키스. 그다음은 미지.
한데 미지는 때로 비존재로 취급된다. 없음에 무슨 형태가 있겠는가. 없다고 믿으니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계기도 없었다.
그 결과, 케인이 당연히 생각한 다음을 새틴은 예상하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그 사실이 새틴은 너무나 부끄러웠다. 창피하고, 민망했다.
‘어른이라고 그렇게 잘난 척을 했는데…….’
혈기 왕성한 스물한 살 남자애를 앞에 두고 소꿉놀이를 한 꼴이다. 케인이 보기엔 새틴이 얼마나 어리숙해 보였을까.
‘이대로는 안 돼.’
새틴은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야 했다. 계획적으로 살면서, 젊은이들의 모범이 되고, 나아가 건전한 성 관념을 전파할 수 있는 그런 어른.
굳은 결심을 한 새틴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는 아주 어른스럽게 물었다.
“저희 가게엔 처음이십니까?”
남자의 시선이 새틴을 가볍게 훑었다. 전에도 본 적이 있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듣기로 첫 방문 때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새틴도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네, 물건을 좀 보고 싶은데요. 여기서만 판다고 들었어요.”
남자가 지그시 웃었다.
“저희 가게에서만 파는 건 아주 많죠. 그중 뭘 보여 드릴까요?”
“시금치 종자요.”
일단 빈 텃밭에 뭘 채우는 것이 우선이다. 진정한 어른은 해야 할 일의 경중을 가릴 줄 알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