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케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구경거리가 되라는 말이 불쾌했을지도 모르나 새틴도 별도리가 없었다. 장사가 망하게 생겼는데 못 할 일이 무어란 말인가.
새틴은 케인을 어르고 달랬다.
“내 얼굴만 가지고는 호객이 안 되잖아. 넌 정말로 잘생겼으니까 네가 앞에 서 있으면 사람들이 막 올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나는 살면서 너처럼 생긴 애를 본 적이 없어. 내가 만약 기억을 잃고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사람이 너였으면, 여기가 천국인가? 이랬을걸.”
과장이 가득한 말이지만 케인이 듣기엔 나쁘지 않았나 보다. 눈빛이 너그러워졌다.
새틴은 좀 더 바람을 넣었다.
“다들 네가 뭘 먹는지 궁금해서 다가올 게 분명해. 막 괜히 말도 걸고. 너 혼자 다니면 여자들이 말 걸지 않아?”
“안 걸던데.”
“정말 믿을 수가 없다. 네가 사람들한테 너무 벽을 치고 있어서 그런 걸 거야. 네가 웃고 다녔으면.”
새틴의 말이 끝나기 전에 케인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익히 알던 얼굴인데도 저리 지그시 미소 지으며 바라보니 낯설게 느껴진다. 갑자기 얼굴이 홧홧해 새틴은 뒤집개로 부채질을 했다.
“흐흠, 그래. 그렇게 말이야. 다들 너한테 말을 걸고 싶어서 안달복달했을걸.”
“그냥 앞에 서 있기만 하면 돼?”
“으응, 내가 파전을 부쳐 줄 테니까 그걸 먹어. 너무 빨리 먹지 말고 천천히. 남들이 보고 궁금해해야 하니까 보여 주기식으로. 무슨 말인지 알지?”
케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판 앞에 손님처럼 선 케인을 보며 새틴은 불판에 반죽을 부었다. 쪽파를 차곡차곡 올리며 물었다.
“뭐 올려 줄까?”
“고기.”
“새우는?”
“좋아.”
“고추는?”
대답하지 않고 케인이 다른 데를 봤다. 새틴은 픽 웃고 쪽파 위에 고기를 올렸다. 마른 새우 가루도 듬뿍.
음식 냄새가 나니 행인들이 그제야 관심을 가지고 다가왔다. 어쩌면 새틴의 전략이 통해 케인의 얼굴을 보고 다가왔을 수도 있고.
“뭐 파는 거예요?”
젊은 여자 손님 둘이 물었다.
“파전이에요. 쪽파에 반죽을 부어서 구워요. 고기도 넣을 수 있어요.”
첫 손님처럼 허망하게 보내지 않으려고 새틴은 최대한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러는 사이 케인의 파전이 완성됐다.
새틴은 파전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후 두꺼운 종이를 고깔 모양으로 말아 그릇 대신 썼다. 포크 대신 가느다란 꼬챙이를 하나 꽂자 목을 쭉 빼고 지켜보던 손님들이 속닥였다.
“들고 다니면서 먹기 편하겠네.”
“그러게 말이야.”
케인은 아까 당부한 대로 천천히 파전을 먹었다. 새틴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맛있어.”
그 말이 신호가 되어 손님들이 파전을 주문했다. 첫 매출이었다.
∞ ∞ ∞
입소문을 타고 줄줄이 손님이 이어지면 어쩌지. 그렇게 빨리는 못 만드는데.
새틴의 기대는 이번에도 산산조각 났다.
“미남계가 안 통할 줄이야…….”
엄밀히 말해 아예 안 통하진 않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케인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흘끔거리며 주위를 맴돌기만 하다 그냥 갔다. 가판에 다가와 메뉴를 물어본 사람 중 주문까지 한 사람은 겨우 셋뿐이었다.
스무 장 분량에서 판매한 게 세 장, 케인이 먹은 게 한 장. 아직 재료가 80%나 남았다.
“큰일인데.”
“……내가 더 잘생기지 못해서.”
드물게 케인이 상심해서 새틴은 허둥지둥 달랬다.
“아냐, 네가 지금 이상으로 어떻게 더 잘생겨. 넌 충분히 잘생겼어. 정말이야.”
“하지만 호객이 전혀 되지 않잖아.”
“그야 네 인상이 하루아침에 교정되는 게 아니니 어쩔 수 없지.”
“…….”
“그래, 지금 그 표정이 문제일 뿐이야. 얼굴은 아무 문제 없어!”
위로가 되지 않았는지 케인은 뚱한 표정을 짓고서는 다시 가판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인상 더러운 미남이라도 세워 두는 편이 나을지 새틴이 고민하는 사이 손님이 왔다.
“어서 오세요.”
“여긴 뭘 파는 거야? 장사 좀 돼?”
반색하며 맞았는데 손님이 아니었다. 앞치마를 두른 모습을 보아하니 근처에서 다른 음식을 파는 상인이었다. 뭘 파는지는 몰라도 어마어마하게 팔아 재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표정에 여유가 넘쳤다.
새틴은 검은 하트를 가슴에 품고서 대답했다.
“파전이에요. 밀가루 반죽에 쪽파를 넣어서 구운 건데.”
“하나 줘 봐.”
잘나가는 경쟁자면 어떤가. 한 장이라도 팔아 주면 고마운 손님이다.
새틴은 재빨리 파전을 구웠다.
수염이 덥수룩한 상인은 파전을 한 조각 먹더니 “음.” 하며 의미를 알 수 없는 탄성을 흘렸다. 좋은 반응인지 나쁜 반응인지 모르겠다.
우물거리던 상인이 대뜸 고깔을 내밀었다. 새틴은 엉겁결에 받았다.
“잠깐 기다려 봐.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네?”
상인이 어디론가 헐레벌떡 뛰어갔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얼이 빠져 있던 새틴은 뒤늦게야 당황했다.
‘뭐야, 먹튀?’
먹튀를 하려면 다 먹고나 가지 겨우 한 조각 먹고 먹튀를 하다니. 그 정도로 맛이 없었나.
새틴은 크나큰 상처를 받았다.
이쯤에서 장사를 접고 돌아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기껏 콜의 부모님이 자리를 만들어 줬는데 이런 보잘것없는 성과밖에 얻지 못했다.
그동안 케인은 그다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꾸역꾸역 먹었던 걸까. 혹시 누나도.
‘아냐, 누나는 확실히 좋아했어. 누나는 한국인이잖아.’
우울해하는 새틴의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서 마신이 위로했다.
―용사님,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저에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 새끼를 여기까지 데려왔어?”
새틴이 무슨 방법이냐 묻기도 전에 케인이 성을 냈다. 새틴은 멋쩍게 웃으며 변명했다.
“요즘 너무 냉정했던 거 같아서 바람 좀 쐬라고…….”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주머니 안에는 바람이 통하지 않습니다, 용사님.
하여간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 주려고 하면 이 모양이지. 새틴은 목소리를 낮추고 위협했다.
“화로에 들어가고 싶어?”
―앗, 아닙니다. 용사님의 체온으로 충분합니다.
간신 같은 태세 전환이 가련해 새틴은 더 구박하지 않았다. 케인이 대신 도끼눈을 떴다.
“제발 그 새끼 말 이상하게 하는 것 좀 고치라고 해.”
“으응, 알았어.”
졸지에 말 안 듣는 아이 보호자가 된 기분이었다. 새틴이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사라졌던 상인이 돌아왔다.
“어, 오래 기다렸지? 이것 좀 가져오느라.”
상인은 치즈와 그라인더를 들고 있었다. 치즈를 파는 상인이었을까.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상인이 말했다.
“그거 이쪽으로 줘 봐. 아직 안 식었지?”
“네? 네…….”
새틴이 파전 고깔을 내밀자 상인은 그 위에 대고 치즈를 박박 갈았다. 부드러운 톱밥처럼 갈려 나온 치즈는 파전의 온기에 닿자 구물구물 녹아내렸다.
치즈가 엉겨 붙은 파전을 한 조각 맛본 상인은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래, 이 맛이야. 아주 기가 막혀!”
상인은 혼자 맛보기 아쉬웠는지 한 조각을 새틴에게도 권했다.
‘파전에 치즈?’
새틴은 전부터 퓨전 요리에 회의적이었다. 머뭇거리고 있으니 상인이 얼른 먹어 보라며 재촉했다. 못 이겨 받아먹은 새틴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맛있잖아?’
기름에 지진 음식에 치즈를 올려 봤자 느끼해지기밖에 더 할까. 그리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맛있었다.
표정만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는지 상인이 씩 웃었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값을 치르더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며 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런데 케인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 뒤를 따라가려 했다.
“야, 어디 가?”
새틴이 아직 입 안에 남은 치즈 파전을 우물거리며 묻자 케인이 대답을 안 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새틴의 볼을 노려보다 묻는다.
“어떻게 다른 남자가 주는 걸 받아먹을 수가 있어?”
“……뭔 소리야.”
“시장에 불을 지를 거야.”
“미쳤어?”
새틴은 황급히 치즈 파전을 삼켰다. 케인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농담이야.”
“정말로?”
“…….”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케인은 농담에 소질이 없었다. 새틴이 미심쩍은 속내를 감추지도 않고 쳐다보자 케인은 잠깐 다른 데를 보다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애가 둘이네. 애가 둘이야.’
새틴이 한숨 돌리는데 저쪽에서 아까 그 상인이 나타났다. 작은 수레를 끌고 있었다. 수레는 새틴과 케인의 가판 옆에서 멈췄다.
“아니, 이게 다 뭐예요?”
새틴의 당황 어린 물음에 상인이 싱글벙글 웃었다.
“동업을 하는 거지. 자네도 팔고, 나도 팔고. 자네도 돈 벌고, 나도 돈 벌고.”
“아저씨도 장사 안돼요?”
분명 무지막지하게 팔아 치웠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인은 새틴이 동병상련을 느낄 새도 주지 않고 와하하 웃었다.
“아니, 난 다 팔았어. 이건 우리 가게에 있던 거.”
“아, 네…….”
동질감이 순식간에 가셨다.
그래도 동업은 분명 괜찮은 제안이었다. 새틴이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이자 상인은 신이 났다.
“나만 믿어. 내가 다 팔아 줄 테니까. 바람잡이 총각도 이리 나와. 거기 그렇게 숨어 있지 말고.”
“바람잡이?”
케인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상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서 나오라니까? 팔기 싫어?”
머뭇머뭇 케인이 가판 앞으로 나가자 상인이 돌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새틴은 케인이 당황하는 모습을 아주 오랜만에 봤다.
상인이 멀뚱히 서 있는 케인의 등을 철썩 내리쳤다.
“뭐 해? 춤 안 추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