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새틴은 다시 한마디 하려다 멈칫했다. 눈을 내리뜬 케인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어려운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뾰족해졌던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새틴은 케인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케인이 입을 뗐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무슨 뜻이야?”
“솔직히 네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좋진 않아. 하지만 아무도 만나지 않길 바라는 건 아냐.”
“허락을 받고 만나라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
케인은 안절부절못하다 젖은 손을 닦았다. 그리고 바닥에 고인 물을 노려보며 다시 말했다.
“그 참새 같은 놈보다 내가 더 중요한 건 알아.”
“참새 같은, 콜 말이야?”
“그래, 그놈.”
새틴은 콜의 어느 부분이 참새 같은지 잠깐 생각했다.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목소리로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모습이 참새와 비슷한 듯도 하다.
전부터 사람을 이름으로 잘 부르지 않더니 여전하다. 리타와 에드워드에게도 사실 비밀스러운 별명이 있는 게 아닐까. 홍학들이라든지?
새틴이 딴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케인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 주머니쥐처럼 생긴 여자, 그 사람도 나만큼 중요하진 않지.”
여자라면 아마도 종종 교류하는 이웃 부인을 말하는 것일 텐데. 주머니쥐가 대체 어떻게 생긴 동물이지?
‘얘 사실 동물 좋아하나?’
한때 케인은 인간들이 모두 죽어야 한다고 할 만큼 사람을 싫어했다. 그런데 동물은 좋아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새틴이 무심코 입술을 씰룩거리자 케인이 눈을 세모꼴로 치떴다.
“왜 웃어? 심각한 얘기 중인데.”
“아니, 웃은 게 아니라 그냥 경련이었어.”
“경련?”
케인이 깜짝 놀라서 새틴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
“아니, 경련이 아니라, 아무튼 아무것도 아니야. 얘기 계속해.”
미심쩍어하면서도 케인은 마저 이야기했다. 하고 싶은 말이 어지간히 많았던지.
“네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싫어.”
“왜?”
“몰라, 그냥 싫어. 그 사람들 중에 어린애라도 있으면, 걔가 위험하기라도 하면.”
케인은 뒷말을 제대로 하지 않고 웅얼거렸다. 한번 귀엽다고 생각하니 이런 답답한 행동 역시 귀엽게 보였다.
새틴은 웃음을 삼키고 물었다.
“케인, 똑바로 말해 봐. 어린애가 뭘 어쨌는데.”
“넌 어린애들을 좋아하잖아. 어린애라고 하면 목숨도 바칠 정도로.”
“그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게 들리지 않니?”
“힘없는 인간만 보면 뭘 해 주지 못해 안달하고. 안 그래?”
“뭐? 그 정돈 아냐.”
“아니긴.”
누구라도 건장한 성인보다는 노약자에게 마음 쓰지 않나. 보편적인 도덕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케인은 반박할 새를 주지 않고 다가왔다.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이서 토로했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싫어. 인간들이 바글바글한 데에서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너 혼자 거길 보내? 불이라도 나면? 웬 미친놈한테 납치라도 당하면? 사고로 네가 기억을 잃으면? 돌아오는 길을 잊어버리면?”
‘마지막 건 너무했다. 내가 바보도 아닌데.’
“지금까지는 네가 무사했지만, 다음에도 그럴까? 지금까지 운이 좋았을 뿐이면 어떡해? 4년도 지옥 같았는데 더 오랫동안 너를 못 찾으면. 영영 못 찾으면.”
‘으아, 얘 패닉 오는 거 같아.’
새틴은 케인을 덥석 끌어안았다. 케인이 말을 멈췄다. 새틴은 진정하라는 뜻으로 등을 토닥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케인이 조심스레 팔을 둘러 왔다.
‘그래, 그렇지.’
진정이 된 듯해 안도했지만, 잠깐뿐이었다.
‘아니, 그건 아직 아니야.’
케인의 손이 등에서 허리로 내려가더니 셔츠 자락을 끄집어 당겼다. 새틴은 황급히 케인을 밀어냈다. 손가락이 막 맨살에 닿기 직전이었다.
양심도 없는지 불퉁한 표정으로 케인이 항의했다.
“왜?”
“왜? 지금 왜라고 했어?”
“했는데.”
“내가 널 위로하는 중에 넌 나를, 나를 파렴치하게.”
“만지지도 못했는데 뭐가 파렴치해.”
“그런 말이 파렴치해!”
벌컥 소리를 쳐 놓고 새틴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무튼 네 걱정은 쓸데없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너랑 같이 갈 거니까.”
“어?”
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까지 파렴치한 짓을 하려던 남자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귀여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귀엽다고 칭찬을 해 줄 때가 아니었다. 새틴은 허리에 손을 얹고 타박했다.
“넌 내가 파전을 파는데 집에 있으려고 그랬어?”
“나도 가는 거야?”
“당연하지. 나 혼자 어떻게 장사를 해. 해 본 적도 없는데, 앗.”
새틴은 피할 새도 없이 도로 끌어안겼다. 일꾼으로 부려 먹겠단 소리인데 뭐가 그리 기쁜지 모르겠다. 아무튼 안도했다면 다행이다.
새틴은 픽 웃으며 케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려고 했다.
―용사님! 친구분이 또 용사님의 옷을 벗기려고 합니다!
“너 진짜!”
∞ ∞ ∞
며칠이 지나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낮 동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장사를 한 시장 상인들은 해가 지자마자 가게 앞에 작은 가판을 세웠다.
‘꼬치구이는 없나?’
야시장에 가면 꼬치구이 사 먹는 게 판타지 장르 불문율인데.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없으니 아쉬웠다. 새틴은 괜히 입맛을 다시며 콜의 부모님이 하는 식자재상으로 향했다.
친절하게도 콜의 부모님은 미리 가판을 세워 둔 상태였다. 새틴을 보고는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 일찍 오셨군요.”
원래도 친절하던 사람들인데 새틴이 콜의 공부를 가르쳐 주기 시작하며 더 친절해졌다.
콜의 부모님은 장사 준비를 잠시 도와준 후 떠났다. 왜 야시장에 참가를 안 하나 했더니 친척 집에 무슨 일이 있다는 모양이다. 자세히는 묻지 않았는데 나쁜 일은 아닌 듯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야시장이 개장했다. 평화의 밤 축제처럼 우르르 손님이 밀려들진 않았다. 드문드문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새틴은 마지막으로 재료를 점검했다.
‘좋아, 문제없어.’
매운 고추, 마른 새우, 다진 돼지고기. 세 종류의 토핑을 준비했다.
집에서 부쳐 먹었을 때 케인은 세 종류 모두 맛있다고 평가했다. 솔직히 새틴이 보기에 매운 고추를 넣은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믿기로 했다.
‘이 정도야 다 팔겠지?’
지난 며칠간 연습한답시고 수시로 파전을 부쳤더니 남은 쪽파가 많지 않았다. 어림잡아 스무 장 정도나 될 거다.
어차피 떼돈을 벌 목적도 아니고 재미 삼아 나온 것이니 이만큼만 팔아도 새틴은 만족한다.
번 돈으로는 닭을 살 생각이다. 흰 닭과 갈색 닭은 싼데 회색 닭이 비쌌다. 오늘 파전이 매진되면 회색 닭을 두 마리 살 수 있다.
“뭐가 그렇게 좋아?”
새틴이 희희낙락하고 있으니 의아했는지 간이 의자에 앉아 있던 케인이 옆구리를 찔렀다. 새틴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다 팔면 그 돈으로 뭐 할지 생각했지.”
“돈 필요하면 내가 줄게.”
“필요 없어. 내가 벌어서 하는 게 중요하단 말이야.”
새틴의 포부를 들은 케인이 눈썹 사이를 찡그렸다. 왜 그런 표정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첫 손님이 와서 미뤘다.
첫 손님은 젊은 남자였다. 퇴근길에 들렀는지 작업복 차림이었다. 남자는 허리 높이의 가판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뭐 팔아요?”
“파전이요.”
“파전이 뭔데요?”
“어, 밀가루에 쪽파 반죽을 구워서 부은 거예요. 고기도 넣을 수 있고, 맛있어요. 매운 새우도 있고, 마른 고추도 있어요. 팬케이크처럼. 아주요.”
난관이었다. 파전을 부치는 연습은 많이 했는데 손님 응대는 미처 생각 못 했다. 새틴은 제가 또박또박 제대로 말을 했는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나 제대로 말했나?’
되감기 마법이 있다면 확인할 수 있었을 테지만 없는 고로 새틴은 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이럴 땐 대충 웃으면 되겠지?’
최대한 친절해 보이도록 입을 찢고 웃었다. 남자는 흠, 하는 소리를 내며 잠깐 고민하다 눈치를 살짝 보더니 가 버렸다.
맥이 빠졌다.
“별로 안 내키나? 여기 사람들은 쪽파를 안 좋아하나?”
걱정스레 말하며 돌아보니 왜인지 케인이 입을 막고 있었다.
“왜 그래? 속 안 좋아?”
새틴이 얼굴을 들여다보자 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왜 웃어?”
케인은 끅끅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주변에 웃긴 일이라도 있었을까. 새틴은 휘휘 주위를 둘러봤지만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곧 웃음을 그친 케인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마음에 여유를 가져 봐. 아직 시간은 한참 남았잖아.”
“그야 그렇지.”
막 개장한 참이다. 앞으로 몇 시간이나 시간이 있는데 설마 손님이 하나도 안 올 리는 없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새틴은 자신이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했음을 알았다. 장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한 장도 안 팔릴 수가 있지?”
새틴이 읽은 판타지 소설에서는 이런 적이 없었다. 뭘 만들든 어마어마하게 팔아 재꼈다. 이국적이면서 아주 훌륭한 맛이라고 모두 찬사했다. 함께 사업을 해 보자는 제안을 받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파전이 아니라 다른 걸 팔았어야 했나?’
칼국수? 야시장에서 칼국수는 말도 안 된다. 들고 다니면서 먹을 수 없으니까. 뜨거운 국물로 암살을 시도할 셈이라면 좋은 생각이긴 하다.
떡볶이? 떡만 제대로 만들 수 있다면 좋은 의견이다. 떡보다 어묵을 좋아하는 새틴으로서는 어묵 없는 떡볶이에 무슨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불고기?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한식 부동의 1위니 정말로 좋은 선택이다. 다만 간장이 없어 불가능하다.
어쨌든 이제 와 메뉴를 바꿀 방도는 없다. 새틴은 파전 불모지에서 파전을 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케인.”
“응?”
케인은 편안한 표정으로 앉아 행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손님이 오든 말든 걱정이라곤 없어 보인다. 어쩌면 케인은 손님이 오지 않는 편을 더 달가워할 수도 있다.
“너 이 앞에 좀 서 있어.”
“왜?”
“……미남계라도 쓰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