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외전1
로맨스도 로컬라이징이 필요한가요?
새틴은 드디어 쪽파를 수확했다. 두 손으로 다 감싸지 못할 만큼 큰 다발이 나왔다.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새틴은 파 뿌리의 흙을 털어 내며 회고했다.
‘인고의 나날이었어.’
심은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에 새틴은 쪽파 농사를 쉽게 생각했다. 만만하게 본 건 아니다. 다만 이 근방엔 고라니나 멧돼지도 없으니 김매기만 바지런히 해 주면 어렵잖게 수확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도심엔 시골과 다른 천적이 있었다. 바로 까치였다.
텃밭에 앉은 까치 두 마리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새틴은 아무 걱정이 없었다.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고 오히려 흐뭇하게 지켜봤다.
그렇게 여유를 부려선 안 되었다. 까치 새끼들은 새틴을 호구로 봤는지 시시때때로 찾아와 쪽파를 처먹고 갔다. 새틴의 자그마한 쪽파밭은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씨름 선수단이 다녀간 영세 고기 뷔페의 사장이 된 기분이었다.
‘해로운 새들.’
다행히 다시 파종할 여유가 있었다. 두 번째 쪽파를 심으며 새틴은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거창한 허수아비를 세우고, 건드리면 소리가 나는 트랩도 설치했다.
까치가 아닌 이웃집 부인이 트랩을 건드리고 깜짝 놀라 주저앉는 사고가 한 차례 있었으나, 어쨌든 쪽파는 무사했다.
―용사님, 왜 그러십니까? 쪽파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새틴이 쪽파 다발을 안고 감상에 빠져 있으니 주머니에서 마신이 촐랑댔다.
―걱정 마세요. 신전에 가서 신분을 밝히고 쪽파를 내놓으라 명령하면 전국의 신자들이 쪽파를 가져다 바칠 겁니다. 영원히 쪽파만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요. 그러니 그런 비루한 쪽파에 연연하지 마세요.
“내 쪽파가 비루하다고? 파 뿌리랑 같이 파묻히고 싶어?”
―아앗, 아닙니다. 제가 그만 용사님의 마음을 잘못 짐작했습니다. 아부를 할 의도였을 뿐 용사님의 쪽파가 정말로 비루하다고 생각한 건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아앗, 용사님!
새틴은 성물을 텃밭에 꽂아 두고 집으로 들어갔다.
오늘 케인은 목장에 간다고 들었다. 목장을 지으려고 클로버랜드 인근을 살펴보는 부자의 호위를 한다고 했다.
‘소나 말을 키울 셈일까?’
클로버랜드의 생활도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새틴은 대충 이 지역 먹거리가 어디서 오는지 파악했는데, 낙농산물은 대부분 데이지랜드 인근의 목장에서 왔다. 먼 편은 아니나 그래도 유통비가 붙긴 할 테다.
클로버랜드 근처에 목장이 생긴다면 더 저렴한 값에 우유와 치즈를 살 수 있지 않을까. 새틴은 신선한 우유로 아이스크림을 만들려면 뭐가 필요할지 곰곰이 생각하며 쪽파를 손질했다.
‘이만큼이면 되겠지.’
당장 쓰지 않을 것들은 흙만 깨끗이 털어 종이로 감쌌다. 부엌 한편에 볕이 들지 않고 통풍이 잘되는 자리가 있는데 채소는 모두 그 자리에 보관했다. 쪽파도 그곳에 두었다.
다음으로는 볼을 꺼내 밀가루와 전분을 담았다. 많이는 아니고 바닥에 깔릴 정도만. 찬물을 부어 덩어리가 지지 않게 풀어 준 후 소금과 기름을 조금.
반죽을 다 만들고서 나서는 넣을 재료를 찾았다. 물론 쪽파만 넣어도 맛있지만 감칠맛이 들어가면 더 맛있을 거다.
‘오징어는 당연히 없고.’
새틴은 일전에 사 둔 마른 새우를 선반에서 꺼냈다. 손톱만 한 새우들은 그리 단단하지 않아 껍질째 먹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살짝 빻아서 반죽에 넣었다.
대강 재료 준비가 끝났을 즈음 새틴은 텃밭에 파묻어 둔 성물을 떠올렸다.
‘이제 충분히 반성했겠지.’
새틴은 손을 닦고 텃밭으로 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이마를 짚었다.
―웨에에엑! 웨에에에억! 웨엑!
흙 사이에 파묻힌 채 마신이 고양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동네 고양이들이 죄다 몰려들었다. 웨옹, 웨엑, 냑, 미악. 고양이들이 별별 소리로 울어 댔다. 그냥 뒀다간 지역 신문사에서 취재라도 나올까 봐 겁난다.
새틴은 성큼 걸어가 성물을 홱 뽑아 들었다. 깜짝 놀란 고양이들이 부리나케 흩어지고 마신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앗, 드디어 나오셨군요! 저는 그동안 이 일대의 고양이들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얌전히요.
“얌전한 것들이 다 얼어 죽었지.”
시큰둥하게 대꾸한 새틴은 마신이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전에 성물을 쥔 손을 마구 흔들었다. 이게 바로 상위 차원의 바이킹이란 거다.
마신이 몹시 괴로워하며 탄식했다.
―아, 아, 아, 아, 어지러워요!
“정신이 좀 들어?”
―아주 번쩍 들었습니다. 두 번 다시 용사님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겠습니다. 이제 절 용서하고 깨끗이 구석구석 씻겨 주실 거지요?
마신이 그리 말한 순간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새틴이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낮은 울타리 너머에 케인이 인상을 쓰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러냐고 물을 새도 주지 않고 케인이 쑥 안으로 들어오며 따졌다.
“그놈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무슨 소리?”
“제 몸을 씻겨 달라고 하잖아. 평소에도 너한테 그런 요구를 했어?”
몸이라는 표현이 과연 맞을까.
새틴은 성물이란 이름의 허접한 기념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뒤늦게 대답했다.
“오늘이 처음인 것 같은데…….”
케인이 새틴의 말을 듣다 말고 성물을 낚아채 갔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가더니 대뜸 부엌에서 물을 받았다.
―친구분께서 절 씻겨 주실 건가요? 저는 환영입니다. 모쪼록 거칠지 않은 솔로, 아앗!
케인은 마신이 떠드는 소리를 무시하고 제일 거친 수세미로 성물을 벅벅 문질렀다.
“새틴에게 그런 파렴치한 요구를 하다니.”
마신이 깃들었다 한들 그 실체는 신전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념품일 뿐이다. 저렇게 세게 문지르면 표면에 생채기가 날 텐데. 도금이 벗겨질 수도 있고.
그리 걱정하면서도 새틴은 가만히 두고 보았다. 생채기 좀 나면 어떤가. 어차피 진짜 제 몸도 아닐 텐데.
―흐어어어어어!
마신이 아이처럼 구슬프게 흐느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애처로워 새틴은 마음이 약해졌다. 새틴은 케인의 뒤로 다가가 물었다.
“넌 나이가 어떻게 돼? 혹시 그때 마주쳤을 때 생겨났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수도 인근 바위산에서 마신과 싸우고 겨우 몇 달이 지났다. 만약 마신이 그때 탄생했다고 하면 한 살이 채 되지 않았단 뜻이다.
어휘가 풍부할 뿐 늘 유치한 소리를 하는 이유가 실제로 어리기 때문이라면 지금의 행위는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새틴의 걱정은 헛되었다.
―제 나이 말입니까? 저는 이 세계가 존재한 시간만큼 존재해 왔습니다! 그 어떤 노인보다 나이가 많은, 아앗!
새틴은 성물을 설거지통에 처박았다.
∞ ∞ ∞
케인은 파전을 잘 먹었다. 감상을 물으니 맛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새틴은 석연치가 않았다.
“정말 맛있었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으니 케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대답했다.
“맛있었어.”
“지금까지 먹은 것들하고 비교하면 제일이야?”
“그 정도는 아니고. 저번에 먹은 닭 들어간 게 좋았는데.”
외국인들은 삼계탕을 좋아한다는 법칙이 이세계에서도 통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불고기도 좋아할 텐데 간장을 아직 못 구했다. 어간장 비슷한 것을 쓰는 지역이 있단 얘긴 얼핏 들었는데 콩으로 만든 간장은 어떨지 모르겠다.
‘일단은 파전부터 해결해야지.’
새틴은 설거지하는 케인의 뒤통수를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뭐가 더 들어가면 좋을까?”
“고기.”
“고기를 넣으면 좋겠어?”
케인은 설거지통 안의 성물이 거슬렸는지 옆으로 건져 내며 “응.” 하고 대꾸했다.
“그럼 내일은 고기를 넣어 볼까? 다진 돼지고기를 넣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내일도 만들려고?”
“응, 팔려면 연습을 좀 해야 되니까.”
“……판다고?”
새틴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케인이 도끼눈을 뜨고 돌아봤다. 예약하고 몇 달을 기다린 식당에서 명단에 이름이 없다는 말을 들은 손님 같았다.
새틴은 아차 했다.
‘저번에 얘기를 안 했었나.’
새틴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최대한 둥글게 말할 방법을 찾았다. 일단 입꼬리부터 올렸다.
“아니, 내가 얼마 전에 그 얘길 들었거든.”
“무슨 얘기?”
케인이 젖은 손을 닦지도 않고 다가왔다. 새틴은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흘끔 쳐다보았다. 잔소리하고 싶지만 일단은 다른 이야기가 우선이다.
“조만간 시장에서 야시장을 연대. 너도 아는지 모르겠는데 상인들이 하는 거래. 술이랑 간단한 음식 같은 걸 파는데.”
“파는데?”
“콜 부모님이 가게를 하시잖아. 근데 이번에 참여를 안 하신대. 그래서 자리가 하나 남아서.”
“남아서?”
“혹시 참여하고 싶은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자리를 주시겠다고…….”
말꼬리가 어정쩡하게 잦아들었다. 케인의 손에서 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가엾은 수세미가 볼품없이 우그러졌다.
새틴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걸레가 어디 있더라…….”
“얘기하다 말고 어디 가.”
“바닥에 물이 떨어지니까, 이거부터 닦으려고…….”
엉겁결에 변명하고 있지만 새틴은 사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새틴에게는 하고 싶은 일을 할 권리가 있다. 나쁜 짓도 아니고 파전을 좀 파는 게 뭐 그리 문제란 말이지. 케인은 지나치게 새틴을 과보호한다.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새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주장했다.
“자꾸 잊어버리는 모양인데 나는 성인이고, 너보다 나이가 많아.”
“알아.”
“그런데 왜 그렇게 내가 혼자 뭘 하려고 하면 싫어해? 내가 밖에 나가는 게 싫어? 아니면, 내가 네 도움 없이 아무것도 못 했으면 좋겠어?”
케인이 침묵했다.
‘여기선 아니라고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