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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24화 (124/139)

124화

그 뒤로 리타는 별로 중요치 않은 이야기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이를테면 전에 연구하던 마법의 진척 상황이라든지.

보아하니 아직 마법 시전자를 찾아내는 마법은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당분간 케인이 방화범으로 잡혀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드문드문 에드워드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공식적으로 사귄다는 발표는 여태 하지 않은 듯했다. 의도치 않게 이쪽이 저쪽 진도를 따라잡아 버렸다.

‘아니, 진짜 안 사귈 건가?’

케인과 이런 관계가 되고 보니 의문이 든다. 리타와 에드워드는 정말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을까? 그냥 우정을 나눴을 뿐인데 새틴이 지레 사랑이라 오해했던 건 아닐까?

이전에 새틴은 우정이니 사랑이니 간접 경험만으로도 얼마든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글쎄. 정말 그럴까?

만약 아니라고 하면.

‘그동안 아무 말도 안 해서 다행이야.’

웹소설이나 웹툰을 보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댓글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별 친분도 없는 캐릭터 둘이 한 장면에 있었을 뿐인데 사귀는 게 아니냐며 난리였다. 누나는 평범한 반응이라고 했지만 내내 납득이 안 됐다.

그런데 이제 보니 새틴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상상을 실제처럼 믿고 호들갑을 떨었다. 리타와 에드워드가 알았다면 얼마나 황당했을까.

새틴은 아까와 다른 의미로 화끈거리는 뺨을 문지르고 편지를 이어 읽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많이 있지만 더 쓰려다간 끝이 없을 것 같으니 이만 줄일게. 건강히 지내도록 해.

너의 친구 리타로부터

추신. 빠른 답장 요망』

추신을 보니 케인의 짐작이 맞을 확률이 커졌다.

새틴은 다음 편지를 뜯었다.

『내 친구 새틴에게.

무슨 일 있는 거야? 왜 아직도 답장이 안 와?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말해 줬으면 해. 그 찰거머리와 혹시 헤어지기로 한 거라면 잘한 생각이야. 그렇게 집착하는 애들은 장기적으로 발전에 도움이 안 되니까 말이야.

혹시 그런 게 아니었다면 미안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를 진정으로 친구라 생각해서 한 말이야. 그런데 정말로 그 찰거머리는……』

……그만 읽어도 되겠다. 새틴은 편지를 접어 도로 봉투에 넣었다.

“그만 보려고?”

“나머지는 좀 이따 읽어도 될 거 같아.”

새틴은 편지 꾸러미를 정리하며 식탁 위의 다른 물건들도 정리했다. 2층에 가져다 두려고 모두 모아 일어나자 케인이 따라 일어났다.

새틴은 별생각 없이 물었다.

“어디 가려고?”

방금 들어왔는데 또 어딜 갈 셈인가 했다. 그런데 대답 대신 물음이 돌아왔다.

“2층 가려는 거 아니야?”

“어, 어.”

새틴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은 더 말하지 않고 새틴을 쳐다보기만 했다. 얼른 올라가지 않고 무얼 하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새틴은 일단 부엌을 나와 계단을 올랐다. 바로 뒤에서 케인이 뒤쫓아 왔다.

조금 전 리타의 편지에서 본 구절이 떠올랐다.

‘집착하는 애…….’

장기적으로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해진다.

케인은 끝내 새틴의 침실까지 따라왔다. 새틴이 편지 꾸러미를 협탁 서랍에 넣는 모습을 마땅찮아 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새틴은 슬그머니 등으로 협탁을 감췄다.

설마 가져다 버리진 않겠지.

그런 새틴의 행동도 탐탁잖았는지 혀를 찬 케인이 창밖을 흘끔 보고 물었다.

“그런데 저건 언제 심은 거야?”

“어?”

“저 꽃 말이야.”

웬 꽃?

새틴은 창가로 다가가 케인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조그만 텃밭의 귀퉁이에 노란 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익숙한 꽃이지만 이름은 모른다.

새틴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탄식했다.

“아악, 잡초잖아…….”

두유 노 파전 계획을 실행하려고 새틴은 얼마 전 텃밭 가득 쪽파를 심었다. 잘만 자라면 장사할 곳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언제나 현실과 부딪히는 법.

전에 오두막에 살 때도 실감한 일이지만 농사란 곧 김매기와의 싸움이었다. 잡초란 놈들은 성장 한계가 없는 듯 보였다. 어제 없던 잡초가 오늘 보면 허리까지 자라 있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케인이 발견한 저 꽃도 분명 오늘 아침엔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새틴이 우거지상을 하고 옷장을 열자 케인이 픽 웃더니 제 방으로 갔다. 그리고 곧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다. 그사이 새틴도 셔츠를 갈아입었다. 작업용으로.

케인은 아직 열려 있는 옷장 안에서 밀짚모자를 꺼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새틴의 머리에 씌워 주기까지 했다.

과한 친절이 쑥스러워서 새틴은 열없이 웃으며 말했다.

“넌 안 나가도 돼. 방금 들어왔잖아.”

“내가 다 하길 바라서 하는 말이야?”

이게 무슨 뜻이지.

잠깐 생각하고서야 의미를 알아차렸다. 쓸데없는 말을 자꾸 하면 자기가 밭일을 다 해 버리겠다는 의미였다.

‘참 나, 이런 걸 협박이라고.’

어이가 없었지만 새틴은 입을 다물었다.

리타의 말이 이제 좀 이해가 될 듯 말 듯 했다. 케인이 모든 일을 다 해 준다면 과연 새틴은 발전할 여지가 없어지긴 할 테지.

‘웃겨, 정말.’

두 사람은 더 얘기하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가기 전 잠깐 현관에 머물렀다. 쭈그리고 앉아 작업을 하다 보면 신발이 망가지기 일쑤라 장화로 갈아 신어야 했다.

새틴은 장화에 발을 쑤셔 넣으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너 오기 전에 생각한 건데, 닭을 두 마리 키우면 어떨까?”

“닭?”

빠르게도 신발을 갈아 신은 케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콜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새틴이 보기엔 꽤 귀여운 표정이었다. 이제 고양이보다는 표범이라 해야 어울리겠지만.

딴생각을 하느라 새틴이 바로 대답하지 않으니 케인이 다시 물었다.

“닭은 왜? 잡아먹으려고?”

“아니, 달걀을 먹으려고.”

“달걀 좋아해?”

“음, 싫어하진 않지?”

“그럼 그렇게 해.”

“넌 어떤데. 달걀 별로야?”

“아니, 나도 안 싫어해.”

매일 메뉴 고민으로 고심하는 새틴에게 케인은 귀찮지 않은 식구였다. 뭐든 주는 대로 잘 먹었다. 어찌나 잘 먹는지 식사할 때마다 새틴에게 이걸 달라, 저걸 달라 성화였다.

‘뺏어 먹는 게 더 맛있나?’

은근히 유치한 구석이 있다니까. 새틴은 허리를 굽히며 작게 웃었다. 그 소리를 용케도 듣고 케인이 의문을 표했다.

“왜 웃어?”

“그냥. 근데 닭을 키우려면 닭장을 만들어야 될 텐데, 어어.”

허리를 굽히고 장화를 끌어 올리다 그만 균형을 잃었다. 다행히 바닥에 나동그라지지는 않았다. 대신 케인의 가슴팍에 고개를 처박았다.

“아, 넘어질 뻔했네…….”

케인의 팔을 붙잡고 자세를 바로 하며 새틴은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입에서 딴소리가 튀어나왔다.

“너무 가깝다.”

그러자 케인은 무슨 실없는 소릴 하냐는 듯 픽 웃었다. 새틴은 공연히 민망해서 뒤로 물러났다.

이제 정말로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현관을 나서기 직전 케인이 새틴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왜?”

“모자가 비뚤어졌잖아.”

케인은 그리 말하며 모자 양쪽의 리본을 새틴의 턱 아래로 당겼다. 얼굴과 달리 그다지 섬세하지 않은 손이 꼬물꼬물 나비매듭을 묶었다.

케인의 손끝이 턱에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괜히 가슴이 근지러워서 새틴은 천장 귀퉁이를 보는 체했다.

이내 케인이 다 되었다며 손을 뗐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었다.

“뭐야, 왜 웃어?”

제 모습이 우스운가 싶어 새틴은 괜히 차림새를 점검했다. 별로 특이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케인도 비슷한 차림이다.

케인이 모자챙을 살짝 끌어 올리며 대꾸했다.

“아니, 전에 그 늙은이가 한 말이 생각나서.”

“뭐라고 했는데?”

“클로버랜드로 돌아가면 뭘 하고 싶냐고.”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 어렴풋이 기억이 날락 말락 했다.

케인은 새틴의 모자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했어. 그때는 하고 싶은 일이 없었으니까. 삶에 목적이 있다는 게 오히려 신기했지.”

지금 케인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제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목소리가 이리 부드러울 리 없다.

“지금도 하고 싶은 건 없는데, 그때랑 다른 점이 있어.”

“뭔데.”

케인의 눈이 반짝였다.

“사는 게 즐거워.”

그리 말하는 케인의 얼굴 위로 싱그러운 미소가 번졌다. 지금 케인은 눈앞의 새틴을 바라보며, 동시에 무엇 하나 분명히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기대와 설렘이 눈 안에 가득했다.

“내가 닭을 키울 거란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말이야. 텃밭을 가꾸는 날이 올 줄도 몰랐고.”

그건 새틴 역시 마찬가지다. 케인은 마치 새틴의 속마음을 모두 읽은 사람처럼 말한다.

“정말로 평범한 일이잖아. 평범해서 오히려 상상을 못 했는데.”

이제는 해도, 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수 있다. 그 엉뚱한 상상이 끝난 후에도 허망하지 않다. 모든 상상은 아직 차례가 오지 않은 현실이다.

“이제 그런 게 당연해서, 그래서 사는 게 즐거워.”

온통 위기뿐인 삶이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일도, 계획대로 풀리는 일도 없었다.

꿈이란 언제나 먼 이야기였다. 제대로 인간관계도 만들지 못하는데 사회에 나가 대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 생각하니 누나 없이 살 이유가 없었다. 홀로 남아 무언가 해 보아야겠단 결심은 물론, 그럭저럭 살아 봐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러다 유치한 소원을 빌미로 현실에서 달아났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판타지 세계에도 완벽하게 안온한 삶은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생각지 못한 악역이 되고, 악인을 만나고, 죽을 뻔했다가, 기억을 잃고, 엉뚱한 모험에 휘말려 결국은 여기까지 왔다. 빈말로도 평탄하다 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삶이란 본디 그렇다. 언제나 위기가 따른다. 때로는 해결하지만, 때로는 해결하지 못한다. 그래도 계속된다.

새틴은 케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 먼 미래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래.”

Fin.

외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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