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에필로그
“선생님, 그거 알아요?”
“뭐?”
콧잔등에 주근깨가 다닥다닥한 이 꼬마의 이름은 콜. 새틴이 자주 들르는 식자재상의 아들이다. 올해로 열 살이 되었다.
콜은 굉장한 이야기를 하듯 진지한 표정이었다.
“저기 남쪽 나라에 가면 쌀을 쪄서 먹는대요. 진짜 신기하죠? 선생님, 쌀은 뭔지 알아요?”
“당연히 알지.”
“진짜 신기하지 않아요? 소금도 안 넣고 쪄서 무슨 맛으로 먹지?”
20년 동안 소금도 안 넣고 찐 쌀을 먹으며 살아온 사람이 눈앞에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눈치다. 그럴 만도 하지.
새틴은 밥이 뭔지 설명하는 대신 그냥 웃었다.
“딴생각 그만하고 마저 풀어. 아직 한 장 남았잖아.”
“에이.”
콜은 다시 문제지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괴발개발 숫자를 끼적였다.
콜은 며칠 전부터 새틴에게 사칙 연산을 배우고 있었다. 한국형 판타지답게 이곳 사람들의 문맹률은 낮은 편이나, 그 외 학문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고전이나 역사, 철학. 몰라도 되지만 알면 좋은 학문에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수학도 그중 하나다.
간단한 산수 정도는 주먹구구로나마 배우는 모양인데 딱 거기까지. 수학이라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실생활에 쓰이지 않는 공부를 귀족이나 부유층의 취미 정도로 여겼다.
‘어린이 공부방 같은 건 열어도 돈이 안 되려나.’
무료로 열면 아이들을 맡기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나 케인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자기가 돈을 줄 테니 집에 있으라고 하지 않을까. 전에도 그리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하여간 웃겨.’
집에서 콜의 과외를 해 주기로 했다고 말했을 때 케인은 아주 반색했다.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일을 하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새틴이 생각한 다른 일들이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다.
「아픈 노인을 돌보겠다고? 그 미, 늙은이 수발을 몇 년이나 들었으면서?」
새틴이 기억을 잃고 흑마법사의 손자 노릇을 했다는 사실이 케인은 못내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이미 다 지난 일인데 그때 이야기만 나오면 표정이 안 좋아졌다. 이를 갈기도 했다.
‘그 시절이 연상되는 일은 다 싫은 모양이야.’
어쩌면 콜의 과외를 한다는 말에도 반색한 게 아닐지 모른다. 그나마 낫다고 생각했을 뿐.
‘어쨌든 이미 맡았으니 열심히 해야지.’
과외의 대가로는 말린 전복을 몇 마리 받기로 했다. 이곳에서는 아주 드문 식재료였다.
‘요즘 더우니까 전복삼계탕을 할까?’
삼계탕이야 시간이 걸릴 뿐 만들기 어려운 음식은 아니다. 인삼 대신 뭘 넣을지 골똘히 생각하던 새틴은 문득 떠올렸다.
‘닭을 키워 보면 어떨까?’
새벽녘이면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말인즉 멀지 않은 데서 닭을 키우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나도 두어 마리 사다 키울까?’
상상 속에서 새틴은 하얀 닭 두 마리를 샀다. 한 마리는 수탉이고 다른 한 마리는 암탉이었다. 암탉이 낳은 알이 부화해 병아리가 태어났다. 그 병아리가 닭이 되고 또 알을 낳았다. 그 알이 병아리가 되고 닭이 되어 알을 낳았다.
콜이 문제를 다 풀었을 때 새틴은 산더미 같은 달걀로 무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선생님, 다 풀었어요.”
“아, 그래?”
새틴은 공상에서 깨어나 콜이 내미는 문제지를 확인했다.
“아직도 나눗셈이 잘 안돼?”
콜은 곱셈은 곧잘 하는데 나눗셈이 서툴렀다. 틀린 나눗셈 문제를 펜으로 죽 긋자 콜이 툴툴거렸다.
“너무 어려워요. 근데 저 정도면 잘하는 거 아니에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이를 약 올리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모른다. 열 살이면 어느 정도가 보통이지?
채점을 모두 마친 다음 숙제를 내주고 나니 과외 시간이 딱 끝났다. 콜은 숙제가 너무 많다고 징징거리던 것도 잠시,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져서 필기구를 챙겼다. 집에 빨리 가고 싶은지 손이 잽쌌다.
그 모습이 웃겨서 새틴은 무심코 말했다.
“집에 금송아지라도 있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그렇게 서두르냐고.”
“선생님은 맨날 이상한 농담만 해.”
아무래도 콜은 수학보다 문학 수업이 더 급해 보인다. 콜의 부모님에게 한번 얘기를 해 볼까. 새틴이 진지하게 걱정하는 사이 소지품을 다 챙긴 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봐요.”
“선생님이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코앞인데요, 뭐.”
아주 씩씩한 태도다. 대문까지라도 배웅을 하려고 새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콜은 뛰듯이 식당을 빠져나가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채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거대한 벽에 부딪혔다.
“아이코!”
귀여운 소리를 낸 콜은 이마를 문지르며 벽을 확인했다. 케인이었다.
“뭐야.”
케인은 제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아이를 무섭게도 내려다봤다. 콜은 죄송하단 말도 못 하고 “끅!” 하며 딸꾹질을 한 번 하더니 생쥐처럼 쪼르르 달아나 버렸다.
덩그러니 남겨진 케인은 눈살을 찌푸리고 콜의 뒷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쟤는 왜 나만 보면 저래?”
‘그야 네 인상이 더러우니까.’
새틴은 속마음을 말하지 않고 “모르겠는걸.”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오늘 같은 일은 처음이 아니다. 콜은 이 집에 올 때마다 케인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곤 했다. 케인이 있으면 수업하는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케인은 한 번도 콜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도.
새틴은 몇 년 전 케인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어떻게 세상에 저렇게 잘생긴 애가 있을까 생각했다. 누가 봐도 주인공 같은 얼굴은 찡그려도 빛이 났다.
하지만 꽃구경도 매일 하면 익숙해지는 법. 요즘은 케인의 얼굴을 보며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내린 결론 : 케인은 인상이 나쁘다.
특히 어린애들이 케인을 무서워했다.
‘생각해 보면 옛날에도 애들이 케인을 무서워했지.’
애들도 미추를 가린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케인은 잘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인상이 나쁜 모양이다.
본인의 인상을 잘 모르는 케인이 작게 불만을 토로했다.
“영문을 모르겠네.”
“들어오기나 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어.”
새틴의 타박을 듣고서야 케인은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알아차렸는데 케인이 손에 웬 편지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무슨 편지가 그렇게 많이 왔어?”
“다 네 거야.”
“어?”
편지 올 데가 있던가.
새틴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으니 케인이 픽 웃었다.
“보면 알아.”
케인은 꾸러미를 건네지 않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책상 대신 쓴 식탁 위에는 종이며 책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대충 치워 옆으로 밀어 놓은 후에야 케인은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새틴은 의자에 걸터앉으며 편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누가 보냈는지 보면 안다더니 전혀 모르겠다. 봉투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게 누구야?”
새틴이 눈을 껌벅이고 있으니 케인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리타.”
“아닌데, 아. 리타 맞네.”
기나긴 이름 중간에 마가리타라는 이름이 있었다. 풀네임을 들을 일이 없어 몰랐는데 이렇게나 이름이 길었다니. 여태 친구의 이름조차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약간 민망해졌다.
‘아니, 걔도 내 나이 정확히 모르니까…….’
얼토당토않은 변명을 속으로 뇌까리며 다른 편지를 살폈다. 죄다 리타에게서 온 편지였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걱정이 들 정도다.
“무슨 편지를 이렇게 많이 보냈을까?”
“뻔하잖아. 하나 보내 놓고 답장 안 온다고 계속 보냈겠지. 거기서 여기까지 거리는 생각 안 하고.”
“그럴듯한걸.”
새틴은 고개를 끄덕인 후 소인이 가장 오래된 편지를 뜯었다. 쾌활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고상한 필체여서 살짝 감탄했다.
물론 내용은 그리 고상하지 않았다.
『내 친구 새틴에게.
완연한 여름이 되었구나.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니? 신의 사자가 아플 거란 생각은 물론 조금도 들지 않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어.
오늘 마차가 돌아왔어. 너와 찰거머리에게 빌려줬던 마차 말이야. 네가 잘 지내는지 성기사들에게 물었는데 어찌나 무뚝뚝하던지. 이야기를 하다가 속이 터져 죽을 뻔했지 뭐니.』
‘무뚝뚝하다고?’
새틴이 기억하는 성기사들은 다들 호들갑스러웠다. 입만 열면 영광과 신성이 넘쳐흘렀다. 세 마디만 대화를 나눠도 기가 쪽쪽 빨렸다.
잘 이해는 안 되지만 마저 읽었다.
『아무튼 네가 결국 그 찰거머리와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 이야기를 할 때는 그 무뚝뚝한 성기사들도 얼굴이 벌게지더라. 수천 명이 보는 앞에서 키스를 했다며.』
사랑의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키스를 하긴 했다.
‘과장이 심하네. 수천 명이나 보고 있진 않았는데.’
터널을 나온 연인들은 통과 의례처럼 다들 입을 맞췄다. 새틴도 조금은 그 분위기에 휩쓸렸다. 붐비는 와중에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 생각하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축제를 즐기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성기사들이 그 모습을 목격했을 줄은 몰랐다. 그 일을 리타에게 전할 줄은 더욱 몰랐고.
유교의 나라에서 태어났다 보니 좀 부끄러웠다. 이미 한참이나 지난 일인데도 민망해서 얼굴이 뜨끈해졌다.
다음 단락의 과장은 더 심했다.
『네가 그 찰거머리의 허리를 감싸고 잡아먹을 것처럼 키스를 했다니. 도통 믿어지지 않더라.』
‘안 그랬다고…….’
어이가 없어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얼굴의 온도도 더 올라갔다.
“더워?”
손부채를 부치고 있으니 케인은 더운 줄 알았나 보다. 새틴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안 더워.”
『현명한 네가 어쩌다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몰라도 네 선택을 존중할게. 나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지 않은 점은 서운하지만 이제라도 내가 알았으니 됐어. 연인 따위 얼마든지 바뀌는 것이니 중요치 않게 여겼을 수도 있지.』
‘아이고, 이거 케인이 보면 큰일 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