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입장권을 사는 줄은 길지 않았다. 2, 3분 남짓 기다리니 차례가 왔다.
“순번 놓치시면 번호표 다시 받으셔야 해요. 꼭 근처에 계세요.”
수습 신관으로 보이는 소년은 입장권과 함께 번호표를 주었다. 받고서 앞을 보니 터널 입구에 번호가 적힌 팻말을 든 사람이 있었다. 자기 번호가 떴을 때 오면 되는 모양이다. 기계만 없을 뿐 지극히 현대적이었다.
새틴과 케인은 순서가 돌아올 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답습했다. 위생이 의심되는 간식거리를 사 먹고,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는 기념품을 하나 샀다. 그때쯤 되니 팻말의 숫자가 가까워져 있었다.
대기 줄에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새틴은 기념품이 혹시 불량이 아닌지 점검했다. 옆에서 케인이 혀를 찼다.
“뭐 하러 그런 걸 샀어. 쓸데도 없는데.”
“방문에 매달아 놓을까 했지.”
“방문? 누구 방?”
“내 방.”
“열 때마다 거슬리지 않을까?”
“난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걱정하는 케인에게 새틴은 씩 웃어 보였다.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껌벅이던 케인이 이내 기침하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새틴이 산 기념품은 한 뼘 정도 되는 노끈에 작은 구슬이 여럿 매달린 장식품이다. 문에 다는 용도는 아닌 듯했지만 쓰임새야 주인 마음이다.
문 모서리에 매달아 놓으면 문을 여닫을 때마다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날 터. 풍경 소리 같은 정취는 없어도 누군가 드나드는 것만은 확실히 알려 주겠지. 그럼 밤마다 케인이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필요도 없다.
“별로야?”
새틴이 웃으며 물었지만 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새틴의 손에서 장식품을 쓱 빼앗아 가더니 자기 품 안에 갈무리했다.
마침 그때 팻말 든 사람이 외쳤다.
“76번! 입장하세요! 76번!”
케인이 아까 받은 번호표를 꺼내 확인했다. 76번이었다.
∞ ∞ ∞
터널의 폭은 서너 사람이 팔을 벌리고 서도 될 정도로 넓었다. 아치형의 지붕도 훌쩍 높았다. 그리고 주위는 아주 컴컴했다. 방향을 유도하는 램프가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지만 빛이 무척 희미했다. 가까이서 보니 유리면의 반을 먹칠해 뒀다. 유도 외의 역할은 하지 못하는 램프였다.
입장객 간의 거리를 어느 정도로 유지하는지는 모르나 일단 앞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터널이라면 소리가 울릴 법도 한데 무슨 마술을 부렸는지 안으로 들어갈수록 고요하기만 하다.
“……좀 무서운데.”
새틴이 중얼거리자 케인이 불쑥 손을 붙잡았다. 희미한 램프 불빛은 케인의 모습을 온전히 다 비추지 못했다. 얼굴에도 짙은 음영이 드리웠다.
“무서워할 거 없어. 내가 옆에 있으니까.”
고요한 사위와 어둠 덕인지 케인은 대담한 말을 부끄러운 내색도 없이 했다. 부끄러운 사람은 새틴뿐이었다.
‘왜 이렇게 덥냐.’
터널 밖에 있을 땐 선선했는데 돌연 목덜미가 후끈거렸다. 날씨 탓인지, 아니면 기분 탓인지.
여하튼 이제 출구에 도착할 때까지 돌아갈 수 없다. 새틴은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일직선이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지만 손은 놓지 않았다.
그러다 입구 쪽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기다리기라도 한 듯 케인의 걸음이 느려졌다.
“여기서는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듣지 못할 거야.”
새틴은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빛이 비친 케인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케인은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말해 봐.”
“뭘.”
“네가 숨기는 거.”
“……꼭 알 필요는 없지 않을까?”
“말하지 않을 이유도 없잖아.”
“있어.”
재빨리 대답했지만 사실 새틴은 확신하지 못했다. 비밀을 감추어야만 하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 케인이 충격받을지도 모르니까?
신이 인간들을 데리고 거창한 연극을 벌였다는데 충격을 안 받을 수는 없다. 그런데 실은 그 신마저 누군가의 상상에서 비롯됐다고 하면 더 그렇겠지.
‘……거기까지 말할 필요가 있나?’
새틴은 자신이 무얼 감추고 싶었는지 이제 와 처음으로 곰곰이 생각했다.
감추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있다. 이 세계가 누나가 쓴 판타지 소설에서 시작했다는 사실, 케인이 그 소설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정해진 운명대로라면 케인과 새틴이 이런 관계는 물론 친구조차 될 수 없었다는 사실.
케인이 알고 싶은 것이 과연 그런 비밀일까?
‘그건 내 비밀이 아니라 이 세계의 비밀이잖아.’
케인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다.
지금 케인이 알고자 하는 것은 그보다는 내밀한 이야기가 아닐까.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새틴은 상념 속에서 케인이 듣고자 하는 이야기를 낚아챘다. 그 이야기는 물고기처럼 미끄러워서 마음을 단단히 다잡지 않고서는 놓칠 것만 같았다.
“나는 사실, 네가 알던 사람이 아니야.”
“언제부터?”
케인은 놀라지도 않고 되물었다. 아는 사실을 확인하듯. 새틴도 최대한 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처음 기억을 잃었다고 했을 때부터.”
“그럴 거 같았어. 그리고?”
“그리고…….”
새틴은 짧게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그 이전의 기억은 한 번도 잃은 적 없어. 그러니까, 진짜로 기억을 잃었을 때도 말이야.”
이번에도 케인은 별 동요가 없었다. 잠깐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네 꿈을 꾼 적이 있어.”
케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야 동요하다니. 새틴이 잡힌 손을 슬쩍 빼내려 하자 그제야 힘을 뺐다. 놓지는 않고.
“마왕성에서 나왔을 때 말이야. 리타와 에드워드가 서로가 되는 꿈을 꿨을 때.”
케인이 대꾸하지 않아서 바로 말을 이었다. 긴장은 때로 말문을 막히게 하지만 가끔은 더 떠벌거리게도 했다.
“나한테도 무슨 꿈을 꿨냐고 물었잖아. 거짓말을 했어. 그냥 바닥에 누워 있는 꿈이었다고 했는데, 사실은 어둠 속에서 불길에 갇혀 있었어. 아마 학교를 빠져나올 때의 기억이겠지. 이건 네 기억이지?”
“그때 나는.”
“살인마의 아들이 되는 꿈을 꿨다고 했지.”
케인이 새틴을 쳐다보았다. 걸음도 멈췄다. 새틴은 곁눈질로 케인을 쳐다본 후 빠르게 말했다.
“그 살인마가 내 아버지야.”
그때 케인은 어떤 장면을 봤을까. 일단 아버지가 살인마라고 확신할 만한 장면이었겠지. 그럼 살인마의 아들은 어땠을까. 비굴해 보였을까, 아니면 똑같이 소름 끼쳤을까.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새틴은 어두운 바닥을 보며 변명했다.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대들지 못했어. 정말로 무서워서, 구해 주고 싶었는데 나는.”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죽인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새틴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버지는, 내가 죽였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지만 들리지 않았을 리 없다.
새틴은 케인의 표정을 보려는 시도도 못 했다. 그뿐일까. 여태 새틴을 붙잡고 있던 케인의 손이 떨어져 나가도 붙잡지 못했다. 케인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케인이 아무 말 하지 않는 시간이 새틴에게는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재촉하지 못했다.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케인이 입을 열었다.
“나쁜 사람이었잖아.”
누나와 같은 말을 한다. 케인은 누나를 만나 본 적도 없을 텐데. 새틴이 고개를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자 케인은 다시 한번 반복해 말했다.
“나쁜 사람이 죽었을 뿐이야. 네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새틴은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하나 더 털어놓았다.
“사실, 한 명을 더 죽였는데…….”
케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묘한 표정이다. 행여나 연쇄 살인마라는 오해를 살까 봐 재빨리 말했다.
“이건 진짜 실수였어. 그리고 이 사람도 나쁜 사람이었고.”
케인의 표정이 점점 더 오묘해졌다. 그러다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그 늙은이 얘기야?”
“아, 눈치챘어? 내가 실수로 선생님 요리에 독초를 넣었어. 정말로 실수. 나는 그게 진짜 몸에 좋은 약초인 줄 알았는데.”
새틴이 나불나불 떠드는 소리를 듣던 케인은 딱 한마디 했다.
“꼴좋네.”
“어어?”
“진짜 꼴좋게 됐잖아.”
“그, 그런가…….”
새틴도 조심스레 웃는 시늉을 했다. 케인은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얘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막 나가도 되나. 도덕 교육을 따로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다소 걱정이 되긴 하나 일단은 다행이었다. 케인이 혐오스러워했다면 새틴은 깊은 우울감에 빠지고 말았을 거다. 도덕에 관한 교육이야 찬찬히 해도 될 일이다.
케인이 다시 새틴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램프를 하나 지나고, 램프를 등지고, 또 램프를 하나 지나고, 또 하나의 램프를 등지고. 그렇게 걷다가 물었다.
“원래는 어디에 살았어?”
“어, 음. 여기서는 못 가는 곳.”
“외국?”
“외국보다 더 먼, 믿기 어렵겠지만 다른 세계 같은…….”
사실 다른 세계 같은 곳이 아니라 그냥 다른 세계가 맞지만 새틴은 일부러 말을 늘였다. 조금이라도 케인이 덜 낯설게 느끼도록. 물론 실제로 그리 느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케인은 의심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또 물었다.
“어쩌다 여기 온 건데?”
이건 정말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천사가 여기로 보냈다. 천사는 소원을 들어줬다. 소원은 덕에서 비롯했다. 덕을 쌓은 사람은 누나다. 누나는 죽었다. 오직 누나뿐이었는데. 그래서.
생각 끝에 새틴은 답했다.
“나를 사랑해 줄 세계로 가고 싶다고 빌었어.”
여기서 새틴은 많은 호의를 받았다. 리타는 새틴을 진짜 친구라고 생각하고, 에드워드는 새틴을 존중한다. 오해에서 비롯했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새틴을 영웅으로 여긴다. 그리고 케인은 새틴을 사랑한다, 아마도.
이곳은 분명 누나가 상상한 세계다. 그러나 그동안 받은 모든 마음이 누나의 의도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누나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것은 단 하나뿐이다.
새틴은 좋은 사람이 되었다. 독초를 먹고 죽은 선생님은 억울해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새틴은 케인을 구했다. 케인이 좋아할 만한 사람으로 거듭났다.
희미한 소란이 느껴졌다. 터널의 끝이 멀지 않은 모양이다. 새틴은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제대로 왔어?”
분명 그럴 거라 생각하면서도 동의를 구하고 싶을 때가 있다. 바로 지금 같은 순간.
케인은 새틴의 불안을 대번에 날려 보냈다.
“당연하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네가 없으면 이 세상이 망해도 된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이제 불빛 없이도 갈 길을 알았다. 케인은 새틴의 손을 쥐고, 새틴은 케인의 손을 쥐고 성큼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함께 경계를 넘었다.
고난과 역경의 끝에는 평화의 밤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이 무수히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