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케인은 성물을 바지의 시계 주머니에 넣으라고 했다.
‘이게 시계 주머니였구나.’
새틴은 케인의 말을 듣고서야 바지 주머니 안의 조그만 주머니가 무슨 용도인지 알았다. 평소에 꼬박꼬박 시계를 가지고 다니는 편이 아니라 좁은 주머니 안에 성물을 집어넣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다만 마신은 새틴과 생각이 다른지 곧바로 구시렁거렸다.
―이곳은 좁고, 답답하며.
“물통에 들어가고 싶어?”
―안락한 곳입니다.
성물 안에서 마신이 어떻게 감각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물에 잠기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마신은 더 이상 군소리하지 않고 여느 때처럼 잠자코 있었다.
이후로 새틴과 케인은 느긋하게 오후를 보냈다. 그리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할 무렵, 이웃의 부인에게 고기를 나눠 받았다.
“아는 사람이 데이지랜드에서 작은 목장을 하거든. 그래서 종종 좋은 고기를 받는데 말이야.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많이 못 먹어. 요리하기도 힘들고, 사 먹는 게 편해.”
본인도 얻은 고기니 부담스러워하지 말라며 꽤나 큼직한 덩어리를 주고 갔다. 아마도 어제 준 선물에 대한 보답일 거라고 새틴은 짐작했다.
‘아무튼 잘됐네.’
잘 모르는 축제라지만 어쨌든 축제다. 바삐 밤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고 온 탓인지 덩달아 새틴의 마음도 조금 들떴다. 아니면 다른 이벤트 때문일 수도 있고.
그럴듯한 고기 요리 몇 가지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부엌으로 들어간 새틴은 움찔 놀랐다.
“왜 그러고 있어?”
케인이 부엌에 서 있었다. 요리는 해 본 적이 없다기에 그간은 대체로 새틴이 요리를 했다. 케인은 뒷정리나 했을 뿐이다.
“나도 뭔가 하고 싶어.”
“음, 굳이?”
“……하다 보면 잘하게 될 거야.”
“못한다고 하는 소린 아니었어. 근데 넌 잘하지 않아도 되잖아.”
별 생각 없이 한 말인데 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새틴이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중일까. 괜한 오해를 할까 봐 새틴은 다시 말했다.
“내가 잘하니까 넌 굳이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야. 혹시 내 음식이 별로야?”
일단 묻긴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새틴은 자부심이 있었다. 함께 사는 동안 누나는 한 번도 음식에 관해 안 좋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퇴근하기 전부터 연락해 메뉴를 묻고, 늘 기대감에 차 헐레벌떡 퇴근했다.
‘누나가 맛있다는데 맛없을 리 없어.’
새틴이 눈에 힘을 주고 쳐다보자 케인이 고개를 저었다.
“맛있어. 좀 특이하지만 맛은 있어.”
“그런데 뭐가 문제야?”
“그런 생각을 했거든.”
케인은 무어라 더 말을 하려다 말고 잠깐 머뭇거렸다. 그사이 새틴은 고기를 조리대로 옮겼다. 그러자 무슨 오해를 했는지 케인이 재빨리 쫓아오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요리를 못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까.”
“아프다든지?”
손을 다치거나 몸이 아프면 요리하기가 어렵기는 할 터다. 이곳엔 레토르트 식품도 전자레인지도 없으니.
새틴이 고개를 끄덕이자 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혹여 기분이 상했나 했는데 다시 보니 아니다. 콧잔등이 발그레했다.
‘뭐야.’
이제까지 나눈 대화에 얼굴을 붉힐 만한 내용은 없었다. 새틴이 눈을 끔벅이며 쳐다보자 케인이 헛기침과 함께 말했다.
“우리가…… 노인이 된다면 말이야.”
새틴은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이다. 물론 실제로 산 시간은 그보다 길지만.
‘아차, 리타한테 내가 스물두 살이라고 안 알려 주고 와 버렸네.’
리타와 에드워드는 아직 새틴이 스물세 살인 줄로 철석같이 믿고 있다. 물론 아무래도 좋은 문제긴 하다.
겨우 스무 살인 케인이 겨우 스물두 살인 새틴을 보며 노인이 됐을 때를 생각하다니. 새틴은 그 사실이 못내 우스우면서 동시에 기묘한 감동을 느꼈다.
바로 내년의 일도 아득한데 어떻게 수십 년 후를 상상할까. 어떤 믿음이 있기에 그 먼 훗날에도 두 사람이 함께 있을 거라고 확신할까.
‘금방 질려서 떠날 줄 알았는데.’
어쩌면 장기적인 관계를 맺어 본 적이 없는 새틴이 지레 겁을 먹고 섣부른 판단을 했는지도 모른다.
‘맞아, 그럴 수 있어.’
사람들의 관계란 새틴의 생각보다 끈끈한 게 아닐까. 사소한 불만 하나둘 때문에 끊어지지는 않을 만큼 말이다.
케인이 먼 미래를 기약하기를 겁내지 않는 이유가 그래서라면, 새틴은 꼭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된다.
수도의 사람들은 새틴을 용사라 부르지만 그 칭호는 허명이다. 새틴은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보통이 되는 데에도 안간힘을 다해야 한다. 스스로 그리 생각해 왔다.
그럼에도 케인이 지금의 새틴을 보고 미래를 생각한다면, 사실 새틴은 지금도 꽤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새틴이 물끄러미 바라보니 케인은 다소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니까 뭐라도 할게. 가르쳐 줘.”
낯간지러운 소리를 한 직후라 쑥스러운 눈치다. 새틴은 놀리지 않고 잠깐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럼 일단 밭에서 먹을 만한 잎 좀 뜯어 올래? 새싹은 빼고.”
∞ ∞ ∞
케인과 함께 준비한 저녁 식사는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그리 근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케인이 서투르게 손질한 야채는 간혹 벗겨지지 않은 껍질이 남아 있었고, 새틴이 케인에게 한눈을 파느라 불 조절에 실수한 고기는 살짝 그을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으나 생김새 면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식사란 본디 평가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식사가 끝난 후 두 사람 사이에는 짙은 만족이 깃들었다.
‘이상한 느낌이야.’
케인은 어땠는지 몰라도 새틴에게 오늘의 저녁 식사는 정말로 묘한 경험이었다.
아버지와 살 때 요리는 아버지에게 부여받은 일이었고, 누나와 살 때는 누나에게 해 주고 싶은 일이었다. 선생님과 살 때는 어땠나. 그때는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즉, 새틴은 이제까지 남과 함께 부엌에 서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불편하거나 억울하게 느끼진 않았다. 새틴에게는 그저 자연스러웠다.
물론 오늘도 대부분의 작업을 새틴이 맡아서 했지만 케인은 내내 옆에 있었다. 묻고 행하고, 다시 묻고 행하고. 케인은 아주 열심히 새틴의 파트너 역할을 수행했다.
당연히 혼자 하던 일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경험. 별것 아닌데 새틴은 묘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뒷정리를 할 때도 케인은 내내 옆에 있었다. 덕분에 순식간에 일이 끝났다.
“이제 슬슬 나갈 준비 해.”
부엌을 나와 2층으로 올라가며 케인이 말했다. 어딜 나가느냔 질문은 할 필요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남빛이었다.
새틴은 먼저 옷을 갈아입고 현관으로 내려왔다. 긴소매 차림이었다. 완연한 여름이지만 이곳에는 열대야가 없었다. 밤에는 그리 덥지 않았다.
‘열섬 현상은 아무래도 도시 개발 때문이니까…….’
기후 문제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본 내용들을 떠올리고 있자니 케인이 내려왔다.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가장 들떠 있을 때인데 왜 저런 얼굴일까. 새틴이 의아해하자 케인이 잠깐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입을 게 마땅찮아서.”
새틴은 웃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겨우 웃음을 몰아낸 후 태연하게 문을 열었다.
“이만 가자.”
축제 때문에 길은 여느 때보다 환했다. 임시 가로등 덕이었다. 곳곳에 놓인 사다리 모양 조형물에 램프와 꽃 장식 따위가 매달려 있었다.
네온사인과 장식 조명에 익숙한 사람의 눈에는 화려하기보단 소박했지만 운치는 있었다.
‘플라스틱이 아니라 전부 원목인 걸 생각하면 이쪽이 더 고급일지도 몰라. 합성목도 아니고 진짜 원목이잖아.’
새틴은 다소 속물적인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목적지가 같을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터널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기엔 거리가 있는 편이라 사람들은 모두 마차 승강장 근처로 모였다. 마침 들어오던 마차의 뒤꽁무니에 <신전 앞 광장만 갑니다>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와, 특별 운행 셔틀 마차.”
“뭐라고 했어?”
주위 소란 때문에 듣지 못했는지 케인이 몸을 굽히며 물었다. 새틴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말 아니었어. 마차 타고 가면 되겠다고.”
“저쪽 줄에 서자.”
케인은 가까운 승강장을 두고 건너편을 가리켰다. 이쪽보다 늘어선 줄이 훨씬 짧았다.
“왜 저쪽은 사람이 적지?”
케인이 좌우를 살피고 길을 건너며 말했다.
“더 비싸.”
새틴은 바로 이해했다.
‘아, 모범.’
짧은 대기 줄은 금세 줄었다. 새틴과 케인은 곧 가격만큼 안락한 마차에 올랐다. 마부는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출발했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축제라 그런지 교통이 잘 통제되는 편이었다. 축제를 보러 나온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 마차가 다니는 길이 분리되어 정체 없이 목적지에 도달했다. 비싼 삯이 아깝지 않았다.
먼저 내린 케인이 손을 내밀기에 새틴은 엉겁결에 붙잡았다. 잡아 주지 않아도 혼자 내릴 수 있었다고 타박하는 대신 딴소리를 했다.
“되게 금방 왔네.”
환히 불을 밝힌 광장은 낮과 비교도 되지 않게 붐볐다. 사람들은 노점에서 술과 음식을 사 먹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행상에게서 조잡한 기념품을 샀다.
그리고 정해진 코스처럼 터널 입구로 향했는데 새틴은 눈으로 그 움직임을 좇다가 입을 벌렸다.
‘아니, 입장권을 팔고 있잖아?’
신관복 차림의 소년 둘이 돈을 받고 입장권을 건네고 있었다. 아무도 그 광경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신전에서 주관하는 축제니 신전이 돈을 버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대기 길어지기 전에 서두르자.”
케인조차 별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새틴은 대답 없이 쫓아갔다.
‘상상과 자본주의로 잉태된 세계의 종교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