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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20화 (120/139)

120화

대신전에 방문했을 때는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새틴과 케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클로버랜드 신전 기도 창구의 신관들은 아무도 두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지나쳐 가다 말고 케인의 얼굴에 잠깐 시선을 두는 신관이 있긴 했으나 정체를 알고서 의식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케인이 잘생기긴 했지.’

기도 창구를 지나 성물 대여소로 가는 동안 마주친 신관들 역시 낯선 방문객보다는 다른 데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밤에 시작할 축제 때문에 모두 바쁜 듯했다.

성물 대여소가 복도 끝에 보였다. 여태 아무 말 없던 케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진짜 반납할 거야?”

“응?”

갑자기 무슨 소리일까. 신전에 가겠다고 집을 나설 때까지도 케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성물을 반납하러 간다는 말에 “으음.” 하고 묘한 소리를 냈을 뿐.

새틴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쳐다보자 케인이 눈썹 사이를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여관에서 너 찾으러 갔을 때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

“이상한, 아.”

그때 성물이 새틴 대신 소리를 질러 케인을 불렀다. 여태 그 일에 관해 언급하지 않기에 경황이 없어 잊어버린 줄 알았더니 아니었을까.

케인의 말이 이어졌다.

“익숙한 목소리였는데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없어서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어.”

“으흐흠…….”

새틴은 대꾸하지 않고 눈만 뒤룩뒤룩 굴렸다. 그런데 케인은 그다지 캐물을 생각도 없던 모양이다. 새틴의 해명 없이도 이미 확신한 눈치다.

“그 성물에 그놈이 들어앉은 거지. 그때 그놈.”

“……어떤 놈을 말하는지 모르겠는걸.”

“마신 말이야. 내가 그놈 목소리를 잊을 리 없잖아.”

이렇게까지 말하니 빠져나가기는 글렀다. 새틴은 더 딴청 피우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자백할 낌새를 읽었는지 케인이 한 발 앞서가더니 새틴을 가로막고 섰다.

“그놈이 거기 들어 있는 거지?”

“그러니까 이게 설명하기 어려운데.”

마신 토벌이 짜인 각본이었다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뒤에만 있던 새틴과 달리 케인은 앞장서서 달려 나갔고 공격을 당해 쓰러지기까지 했다. 지금 다 나았다 해서 그때 겪은 고통과 심적 부담이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케인은 분명 실망하겠지. 리타나 에드워드라면 신의 의도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이해해 줄지도 모르지만 케인은 아니다. 말씀의 방에 들어갔다 나온 뒤로도 딱히 열성 신자가 되진 않았다.

새틴이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케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평소엔 새틴이 커다란 덩치에 쫄아 움츠러들면 먼저 알아채고 물러났는데 이번엔 꿋꿋했다.

“그놈이 거기 들어 있는 게 맞아?”

“……맞아.”

새틴은 자라목이 되어서 겨우 대답했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편이 더 겁나서 시선만 아래로 떨궜다. 케인의 신발만 뚫어져라 보는데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그놈을 데리고 있던 거야?”

“나도 처음엔 몰랐다가 좀 지나서 알았어…….”

케인은 그때가 언제냐 묻지 않았다. 알게 된 시기가 케인을 두고 도망쳤을 때라는 말은 지금 하지 않는 편이 좋을 테니 다행이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케인이 다음 말을 할 때까지 새틴은 연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땀이 많은 체질이 아닌데 순식간에 손이 축축해졌다.

“그럼 너는 그놈을.”

케인이 세 단어를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새틴은 용기를 내 흘끔 케인의 얼굴을 살폈다가 후회했다.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절로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무서운 표정이었다. 차라리 진작 털어놓을 걸 그랬다. 케인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대로 둘 게 아니라.

‘기만죄가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이제 모든 일이 끝나 진정으로 평화로운 삶을 맞이하게 될 줄 알았는데. 집에서 나오기 전 텃밭에 쪽파를 파종했는데. 다 자라면 이웃들에게 파전을 전파할 생각이었는데. 두유 노 파전 계획은 망했다.

상황에 걸맞지 않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아마 현실 도피 중이라서가 아닐까. 새틴은 곧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도 한때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는데 그리 야박하게 내치지는 않을 거다.

드디어 케인의 입이 열렸다. 새틴도 잡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놈을 그동안 내내 품에 싸안고…….”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한 의미 같잖아.”

“사실이잖아. 그 성물을 계속 네 가슴 가까이에 넣고 다녔으니까.”

“그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그놈을 계속 가슴에 품고…….”

“아니, 진짜 이상하게 들린다고.”

케인이 홱 몸을 돌리더니 성큼 걸음을 옮겼다. 얼이 빠진 새틴이 곧바로 따라가지 않자 돌아보며 재촉했다.

“빨리 와. 어서 반납해 버리자.”

새틴은 케인이 화낼 기미가 없다는 사실에 일단 안도해 뛰어갔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물은 반납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성물의 대여와 반납을 담당하는 신관이 두 손을 맞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감격에 젖어서.

“이렇게 직접 얼굴을 뵙게 되다니, 더없이 영광입니다.”

성기사들과 마찬가지로 과한 존경 표현에 새틴은 몸 둘 바를 몰라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 상황의 원흉은 나불나불 떠들어 댔다.

―용사님을 보필하는 나와 만난 것도 영광으로 여기어라.

“물론입니다. 신의 의지시여.”

―클로버랜드는 용사를 잉태한 땅으로 오랫동안 번성할 것이며, 아앗!

새틴은 차마 더 듣지 못하고 성물을 품에 쑤셔 넣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신관에게 빠르게 인사를 건넸다.

“이만 가 봐야겠어요.”

“제게 맡길 일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성물을 반납하러 왔을 뿐이다. 그런데 성물을 꺼내자마자 마신이 떠드는 바람에 이 꼴이 되었다. 내내 조용하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와 성물 반납이 어쩌구 하며 떠들어 봤자 이해하지 못하겠지. 신의 사자가 신의 의지를 신의 종에게 떠맡긴다? 새틴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새틴은 그냥 고개를 젓고 가타부타 설명 없이 대여소를 나왔다. 나오고 나서야 새틴은 케인의 눈치를 봤다.

“어떡하지? 상황이 난처하게 됐네에.”

조심스레 떠보는 소리를 하니 케인이 혀를 찼다. 그리고 뭐라 말하기도 전에 마신이 끼어들었다.

―저는 그저 의지체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친구분께서 걱정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저는 친구분과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사님께서 친구분을 떠나기로 결심하셨을 때도 저는 그러지 마시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니 저를 두고 가지 마세요.

마신이 숨도 쉬지 않고 나불대는 소리를 들으며 새틴은 기가 막혔다. 신의 의지니 뭐니 거창한 호칭으로 스스로를 포장할 땐 언제고 이제는 케인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케인이 허락해도 내가 안 하면 어쩌려고?’

성물은 그저 조그만 펜던트에 불과해 새틴은 마신의 입을 막을 방도를 알지 못했다. 빙빙 휘두르면 조용히 하려나.

―저는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용사님과 친구분의 영원한 우정을 열렬히 응원하고 있습니다. 세간에서 그 우정을 우정이라 평가하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솔직히 그게 우정이면 모든 어버이는 우정 행위를 통해 번식한다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미, 미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긴. 도움이 된 적이 있긴 하지.”

마신이 지껄이는 엉뚱한 소리에 새틴은 당황했지만 케인은 오히려 설득된 듯했다.

케인은 슬슬 턱을 문지르며 새틴의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 든 성물을 바라보는 것일 테지만 위치가 애매했다. 새틴은 슬쩍 몸을 틀어 케인의 시야에서 가슴을 감췄다. 케인은 집요하게 쫓아와서까지 가슴을 보진 않았다.

‘아니, 가슴을 본 게 아니지.’

애써 침착함을 되찾은 새틴은 케인이 섣부른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조언했다.

“지금 이런 소리를 하지만 이놈은 마신이야. 너도 알잖아. 그때 너하고 에드워드, 리타가 얼마나 고생을 했어. 처리할 방법을 찾자.”

“고생하긴 했지만 별일 없었잖아. 지금은 도와주려는 것 같고…….”

“마신이 도와준다는 말을 믿는 거야? 마신인데?”

케인이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초조해해?”

“초조한 게 아니라, 나는…….”

새틴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케인이 새틴의 앞으로 와 어깨에 손을 짚었다.

“그 일이 연극이란 거 때문이야?”

미처 아닌 체도 하지 못하고 새틴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케인은 지그시 웃을 뿐 비난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어, 어떻게…….”

새틴이 말을 더듬자 케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함을 표현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장난스러운 쪽에 가까웠다.

“그야 들렸으니까. 마신이 너한테 마법을 쓰라고 했잖아.”

“아…….”

새틴이 마신과 역할극을 할 적에 케인은 멀리 있지 않았다. 겨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게다가 주위는 정적했으니 속삭이는 소리가 케인에게 들렸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새틴은 습관적으로 손부채를 부치려고 했지만 케인이 팔을 붙잡았다. 새틴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과했다.

“미안.”

“난 그런 건 신경 안 써.”

“그것참 고마운 일이네.”

“내가 신경 쓰는 건 내가 너에 대해 다 알지 못한다는 거야.”

아직도 비밀이 남은 새틴은 대꾸하지 못했다. 케인은 당장 이 자리에서 다 말해 달라고 조르는 대신 다른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놈이 네 가슴팍에 달라붙어 있는 것도.”

케인의 손이 새틴의 품 안에서 성물을 쏙 빼 갔다.

―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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