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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19화 (119/139)

1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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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까지 가는 길에는 행인뿐 아니라 작업 중인 인부들도 여럿 보였다. 커다란 사다리를 피해 걸으며 새틴이 물었다.

“저 사람들은 다 고용된 걸까?”

“그렇겠지. 모험가 연합에서 구한 사람도 있을걸.”

“돈 많이 주나?”

“그냥 평범한 거 같던데.”

“그렇구나.”

오늘따라 새틴은 말이 많았다. 원래도 과묵한 편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조잘조잘 떠든 적은 없는데 오늘은 유난했다.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얼굴로 별의별 질문을 다 했다. 평화의 밤 축제를 신전이 주관하는지 관청이 주관하는지, 그런 걸 알아서 뭐 하려고.

어이가 없었지만 케인은 새틴이 평소와 다른 이유를 알기에 트집 잡지 않고 고분고분 대답해 주었다.

‘저녁까지는 시간도 남았고.’

평화의 밤 축제는 이름대로 밤에 대부분 행사가 진행된다. 어릴 때는 이유를 몰랐으나 커서 배웠다. 흑마법사의 학교에서.

‘그 미친 늙은이가 이것저것 가르쳐 주긴 했지.’

대강 기억하기로 이렇다. 클로버랜드라는 도시는 두 마을이 합쳐지며 생겨났는데 각 마을의 주민들은 서로를 불편해했다. 그래서 신전이 나서 화합의 장을 만들었다. 평화의 밤이라 이름 붙인 축제가 바로 그것이다.

신전은 목적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낮 동안 근면히 일을 하고, 밤이 되면 축제에 참가해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며 화합했다.

‘낮 동안 무슨 일이 있었든 밤이 지나기 전에 화해를 하랬나.’

몰라도 아무 불편 없는 상식이다. 적어도 케인에게는 그랬다.

평범하게 고용되어 돈을 벌며 살아가기를 선택하지 않았기에 케인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할 기회가 없었다. 타인과 교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대부분 상식이 필요치 않았다.

오늘 처음으로 그 얕은 상식들이 도움이 되었다. 새틴의 호기심을 채워 주고 있지 않은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축제에 관해 연달아 질문하던 새틴이 작게 웃었다.

“아무리 밤 축제라지만 낮엔 정말 아무것도 안 하네. 장사라도 할 법한데.”

“원래 그런 거 아니야?”

케인은 다른 도시의 축제는 본 적이 없어 새틴의 반응이 의아했다. 새틴은 눈을 살짝 굴리더니 멋쩍게 웃었다.

“그냥 한 말이야. 가판 열면 장사 잘될 거 같아서…….”

케인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새틴이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아, 그런데 왠지 그 얘기 들은 적 있는 것 같아. 우리 이거 선생님한테 배웠나?”

“선생님이라고 좀 부르지 마. 그 미친 늙은이가 뭐라고.”

새틴은 케인의 핀잔에 또 한 번 열없는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감추는 듯한 기색을 모른 체하고 케인은 앞을 보았다.

두 사람은 어느새 신전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본디 훤히 트여 있던 광장을 긴 터널 형태의 구조물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새틴은 그 구조물을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렇게 클 줄은 몰랐는데.”

“처음엔 작았다고 들었어. 인구가 많아지면서 점점 커졌다던데.”

“아하.”

고개를 끄덕인 새틴이 앞서 나가더니 터널을 따라 걸었다. 케인은 그 뒤를 바로 따랐다.

고난과 역경을 상징하는 가시와 상징물들이 빼곡히 터널을 둘러싸고 있어 안쪽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사랑의 터널이 된 거지.’

공공장소의 거대한 밀실은 시간이 갈수록 본래의 의미가 퇴색하고 연인들의 낭만이 깃들었다. 축제 날 밤에 어둑한 터널 안을 걸으며 사랑을 속삭인 연인들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유치한 이야기가 클로버랜드뿐 아니라 인근 다른 도시까지 퍼져 나갔다. 사랑의 터널이란 별칭을 처음으로 붙인 사람이 누군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말 크다. 백 명은 들어가고도, 죄송합니다.”

새틴이 얼을 빼놓고 돌아다니다 행인과 살짝 부딪혔다. 행인은 젊은 연인들이었는데 별말 하지 않고 웃으며 지나쳐 갔다. 새틴이 그들을 흘끔 돌아보고 속삭였다.

“아직 개방 전인데도 보러 온 사람이 많네.”

“사전 답사 같은 거지.”

“사전 답사?”

새틴이 고개를 갸웃하며 무슨 뜻인지 물었지만 케인은 슬쩍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지금 또 곁을 어느 연인들이 지나쳤다. 그들의 대화가 케인과 새틴에게도 들렸다.

“한 번도 안 들어가 봤는데 너무 기대된다.”

“나도 그래.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면 좋겠어.”

“그러게 말이야.”

아무 의미 없는 대화다. 건전한 의견을 나누는 체하지만 속으로는 분명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케인은 확신했다. 지금 케인도 그러니까.

새틴은 몇 걸음 간 후에야 별안간 뺨이 벌게졌다.

“아, 아……. 그런 의미의 사전 답사…….”

케인은 소리 없이 웃었다. 새틴은 눈치가 없지 않다. 어젯밤 케인이 구조물의 별칭을 알려 주었을 때부터 오늘 밤에 일어날 일은 예상했을 터.

새틴은 급하게 손부채질을 하며 어색하게 웃는 시늉을 했다.

“하하, 우리도 지금 사전 답사 중이었구나. 그래, 그랬구나…….”

“별로면 미리 말해.”

“아니, 별로인 건 아니고…….”

말을 하다 말고 새틴은 낭패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별생각 없이 한 대꾸가 오늘 밤 일어날 행위에 대한 사전 동의처럼 느껴진 모양이다. 그러나 강력하게 부정하지 않는 태도로 보건대 사전 동의가 아닌 것도 아니었다.

케인은 자신감이 생겼다. 원래도 불안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숫제 못 할 일이 없을 듯한 기분이다.

“넌 남들처럼 하는 걸 좋아하잖아, 뭐든.”

“내가?”

엉뚱한 이야기라도 들은 사람처럼 새틴이 눈썹을 찌푸렸다. 케인은 다가오는 짐마차를 흘끔 보고 새틴을 길 안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특별한 건 부담스러워하고. 안 그래?”

“……잘 모르겠는데.”

“몰라도 상관없지.”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평가는 대부분 타인의 눈으로 이루어진다.

케인이 보기에 새틴은 평범한 것을 좋아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 평범한 삶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평범한 상태를 추구했다. 물욕이 없다는 점에서 그런 바람이 두드러졌다.

수도에 계속 머물렀다면 호화로운 생활을 언제까지고 이어 갈 수 있었을 텐데 구태여 여기로 돌아왔다. 이웃과 교류하며 사소한 선물을 주고받을 때, 혹은 대단찮은 계획을 세울 때 가장 편안해 보였다.

‘그런 것치고 좀 웃기긴 해.’

마왕이니 마신을 토벌하는 일에는 오랜 고민도 없이 뛰어들지 않았던가.

그래도 본성은 역시 평범한 쪽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 어쩔 줄 몰라 하고, 추켜세우는 말을 들으면 그 내용이 사실일지라도 숨고 싶어 한다.

‘그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흑마법사의 제자가 되려고 안달하던 시절의 새틴은 지금에 비하면 다른 사람 같다.

‘……과연 어떨까.’

말씀의 방에서 케인이 본 풍경에는 그 시절이 없었다. 설마 신이란 작자가 허술하여 그리하진 않았겠지.

∞ ∞ ∞

‘숨 막혀 죽겠네.’

새틴은 케인이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소리 없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잠깐 괜찮아질 만하면 케인이 툭툭 폭탄을 던졌다. 그러다 보니 새틴은 긴장을 풀지 못해 숨 쉬는 방법까지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간신히 신전 앞에 도착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피곤하단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큰일 날 소리지.’

데이트하자고 나온 건 아니지만 어쨌든 데이트 같은 상황이다. 여기서 피곤하단 말을 했다간 마이너스 100점이다. 케인이 새틴에게 몇 점을 주고 있는지는 모르나 100점이나 깎이면 타격이 작지 않으리라.

물론 새틴은 케인이 실망해서 마음이 식을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실망했는데도 떠나지 않고 옆에 있을까 봐 걱정이지. 기대 없이 집착만 남은 관계란 지나치게 불건전하지 않은가.

다행히 새틴이 괜한 말을 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먼저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새틴 님 아니십니까!”

어제 헤어진 성기사 중 한 명이 신전 앞에서 호객을 하고 있었다.

“아직 안 가셨나요?”

“마침 오늘부터 축제라고 해서 일손을 좀 거들고 떠나기로 했습니다. 기도하러 오신 신자 분들 안내를 하고 있지요.”

호객 중이 아니었구나. 새틴은 약간 멋쩍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전에 왔을 땐 수습 신관님이 하셨던 거 같은데.”

“아,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클로버랜드에 미친놈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네?”

미친놈이라니, 무슨 얘기일까. 다크에이지에는 4부가 없는데.

새틴이 눈을 껌벅이고 있으니 성기사가 은밀한 이야기 하듯 속삭였다.

“치안청에 협박 편지를 보내는 놈에 대해 모르십니까? 꽤 오래전부터 보냈다고 하던데요.”

“아.”

“최근에는 편지가 오지 않았다지만 혹시 축제 기간 동안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신전 주변에 수상한 놈이 없는지 감시도 겸하는 중입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성기사를 위로하며 새틴은 흘끔 케인을 보았다.

마음에 한 점 거리낌도 느껴지지 않는지 케인은 당당히 가슴을 펴고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왜 그리 보냐고 눈으로 묻는다. 새틴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그 미친놈이 축제 기간에 무슨 짓을 하긴 할 건데…….’

그게 프러포즈라는 건 절대 비밀이다.

“새틴 님은 어쩐 일이십니까? 기도하러 오셨습니까? 새틴 님이 기도하는 곳이야말로 진정한 신전일진대 이리 걸음을 하시다니, 설마 이곳 신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려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약간 감동한 기색이라 민망해져서 새틴은 얼른 손사래 쳤다.

“아뇨, 그런 이유는 아니고 신전에 반납할 게 있어서 왔을 뿐이에요.”

“반납이요? 신전의 모든 것이 새틴 님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데 뭘 반납하십니까?”

성기사가 너무나 진심으로 의아해해 새틴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일단 신의 사자 같은 위치긴 하지만 신은 아닌데 지나친 친절이다.

“전에 성물을 대여한 적이 있어서요. 필요로 하는 분께 가야죠.”

“아, 하긴. 새틴 님께 그런 것이 필요할 리 없지요. 새틴 님이야말로 성스러움의 결정체이신데.”

하룻밤 안 봤을 뿐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과장이 늘었다. 새틴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등으로 식히며 슬쩍 화제를 넘겼다.

“아무튼 즐겁게 지내다 가시면 좋겠어요.”

“예, 저녁에 축제도 보러 나갈 생각입니다.”

몇 마디 더 안부를 나눈 후 새틴은 신전으로 들어섰다. 뒤따르던 케인이 “지긋지긋한 새끼들.”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는 못 들은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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