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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18화 (118/139)

118화

새틴은 깜짝 놀라 케인의 등을 다시 때렸다. 케인은 눈썹을 찡긋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새틴은 화제를 넘겼다.

“그동안 텃밭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이거는 별거 아니지만 선물이에요. 수도에 갔었거든요. 좋은 게 많더라고요.”

새틴은 일부러 빠르게 말을 쏟아 내 조금 전 케인이 한 헛소리를 부인의 기억에서 밀어냈다. 다행히 잘 먹혔다.

“아휴, 번거롭게 뭘 이런 걸 가져왔어.”

말은 그리하지만 부인은 기뻐 보였다. 눈가에 둥그렇게 주름이 팼다. 선물 봉투 안을 보며 함박웃음을 짓다가 불쑥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참, 내일부터 평화의 밤 축제인 건 알고 있어?”

“평화의 밤 축제요?”

그게 뭐였지. 기억이 날락 말락 했다. 새틴은 클로버랜드 토박이가 아니어서 지역 축제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옆을 보니 케인은 태연한 얼굴이다.

‘얘는 알고 있었나?’

새틴의 반응에 부인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아, 여기 출신이 아니랬나? 때를 잘 맞춰서 왔네. 내일부터 아흐레 동안 열려.”

“꽤 오래 하네요.”

“으응, 원래는 그렇게 길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 일이 좀 있어서.”

“일이요?”

마왕 토벌에 관한 얘기일까? 아니면 수도의 마신 토벌에 관한 얘기?

새틴과 케인 말고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부인이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치안청장이 죽었거든.”

“네?”

전혀 생각지 못한 답이라 새틴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술을 잔뜩 마시고 여자들한테 치근거리다 가게에서 쫓겨났는데, 그대로 길바닥에서 잠이 들었다가 얼어 죽었대.”

“네에?”

“내 생각엔 천벌을 받은 거 같아.”

“천벌이요?”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죽음이긴 한데 천벌 소릴 들을 정돈가?

새틴이 의아해하니 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설명했다.

“그 사람이 워낙 평판이 나빴어. 귀족이랍시고 맨날 관청에 이래라저래라 하고, 기사단도 맘대로 부려 먹고. 분명 캐 보면 구린 구석이 많았을 거야.”

새틴만 몰랐지 토박이들은 다 알고 있었나 보다. 새틴은 혹시 케인도 알고 있었는지 궁금해 흘끔 얼굴을 봤다. 심드렁한 표정을 보니 별 관심 없어 보인다.

‘하긴 얘가 남한테 관심을 둘 리 없지.’

평소 별말은 안 했지만 케인은 치안청이라면 학을 뗄 거다. 치안청의 높으신 분이 죽었단 소식에 손뼉이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다.

부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아무튼 그래서 새로운 사람이 청장직을 맡았는데 이 사람은 아주 괜찮은 사람이래.”

“잘됐네요.”

“그렇지? 그 사람이 신전하고 얘기를 했나 봐. 분위기가 영 안 좋으니까 이번 축제를 좀 거창하게 하면 어떻겠냐고.”

“그랬군요.”

세상 이치가 그렇다. 이쪽에 큰일이 났을 때 저쪽이라고 꼭 잠잠하진 않다. 사건은 때로 동시다발적으로 터진다. 저마다 자기 앞의 사건에 집중하느라 알지 못할 뿐이지.

마신 토벌이라는 굉장한 이벤트가 수도에서 진행되는 동안 클로버랜드에서도 나름의 이벤트가 진행된 모양이다.

“근데 정말 이상하지 않아? 요즘 같은 날씨에 동사라니. 천벌이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잖아. 안 그래?”

“확실히 희한하긴 하네요.”

고개를 끄덕이던 새틴은 불현듯 리타의 소원을 떠올렸다.

‘이거 설마 리타가 빈 소원이 이루어진 건가?’

그리 생각하니 죽은 사람이 좀 불쌍하긴 한데, 나쁜 사람의 죽음에 구태여 슬퍼할 필요는 없겠지. 새틴은 자질구레한 동정은 치워 버렸다.

“아무튼 그러니까 꼭 나가서 구경도 하고 그래. 볼만할 거야.”

부인이 선물을 들지 않은 손으로 새틴의 팔을 툭툭 두드리다 한마디 덧붙였다.

“친구도 같이 가면 재밌을 거야.”

“친구 아닌데.”

“야.”

∞ ∞ ∞

달이 뜬 지 한참인데 잠이 오지 않았다. 새틴은 오랜만에 제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만 바라보았다. 천장에는 이름 모를 새 무늬가 빼곡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열일곱 마리, 열여덟 마리.

‘양도 아닌데 저걸 왜 세고 있지.’

새틴은 차라리 부엌에 가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와야겠다 결심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기 전, 작은 소리를 들었다.

‘발소리?’

덜컥 겁이 나거나 하진 않았다. 이 집에서 들릴 발소리라고 해 봐야 케인의 기척일 터. 다만 이 시간에 왜 케인의 발소리가 들리는지 의문이다. 새틴처럼 잠이 안 와서 나왔을까.

의문을 품은 채 새틴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조금 떨어진 곳, 아마도 케인의 방에서 출발한 발소리는 새틴의 방 앞에서 멈췄다. 노크를 하려나 했는데 침묵이 이어졌다.

‘뭐야?’

돌아가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 케인은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는 뜻인데.

새틴은 기척을 죽여 문으로 다가갔다. 왜 기척을 죽였는지는 스스로도 모른다. 그냥 그래야 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에 귀를 바짝 댔다. 혹시 케인이 조용한 걸음으로 돌아간 건 아닐까 의심했는데 아니었다. 희미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왜 여기서 한숨을 쉬고 있지?’

새틴은 문을 열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호기심은 빨리 열어 보라고 하지만 선뜻 그러기가 어려웠다. 열었다가 괜히 어색한 분위기가 되면 어쩐단 말이지. 그럼 밤샘 확정이다.

그러나 새틴이 결정을 내리기 전 바깥에서 케인이 먼저 말했다.

“왜 거기 그러고 있어.”

새틴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발소리가 제법 크게 났다. 아닌 척하기는 글렀다.

“……내가 할 말이거든. 너야말로 왜 거기 있는데.”

“지나가는 중이었어.”

말도 안 되는 뻥이다. 한참 서 있었으면서. 그러나 그리 캐묻지는 못했다. 문을 사이에 둔 채 미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다시 깬 사람은 케인이었다.

“언제 잘 거야?”

“졸리면.”

“지금은 안 졸리고?”

새틴은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뒤늦게 “응.” 하고 대답했다.

“그럼 문 열어 봐.”

새틴은 머뭇머뭇 문을 열었다가 움찔 놀랐다. 케인이 너무 가까이 서 있었다.

“뭐야.”

반사적으로 퉁명스러운 소리가 튀어 나갔는데 케인은 개의치 않았다. 한 발을 문턱 안으로 넣어 놓고 묻는다.

“너 클로버랜드 출신 아니지?”

“……갑자기 왜 물어?”

“클로버랜드 사람이면 평화의 밤 축제를 모를 수가 없거든. 축제 내내 얼마나 시끄러운데.”

“하하, 이름하고 어울리는 축제는 아닌가 보네.”

새틴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 세계에 온 지 몇 년이나 됐는데 여태 그런 축제가 있는 줄도 몰랐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도 마주한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으니 케인이 뒤로 물러났다. 문턱을 사이에 두고 서서 친절하게도 말한다.

“너 숨기는 거 있지.”

“으음.”

“생각해 보면 그 늙은이가 살아 있을 때도 그랬어. 기억을 잃은 사람이라기엔 너무, 완성된 사람 같았거든.”

새틴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면 인정하는 꼴이 될까 봐 억지로 케인의 뺨 언저리를 보고 있지만, 그런다고 부정하는 걸로 보이진 않을 테다.

“나도 말하지 않은 건 있어.”

꼭 새틴을 어르는 듯한 어조였다. 새틴은 슬그머니 케인의 눈을 보았다. 밤눈이 그리 밝은 편은 아니어도 이렇게나 가까이 서 있으면 얼굴 정도는 보인다.

어둠에 물든 눈동자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낌새는 아니다.

“난 어릴 때 고아원에 있었어. 너도 예상하겠지만, 그 시절에 난 아주 예쁜 아이였어.”

“뻔뻔해라…….”

새틴이 무심코 대꾸하니 케인이 픽 웃었다. 새틴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금방 입양이 됐는데.”

케인의 말꼬리가 묘하게 길었다. 어지간히 둔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를 대강은 짐작하리라. 좋은 가족을 만나지 못한 모양이다.

“아주 이상한 부부였지. 방 안의 물건이 조금이라도 어긋나 있으면 실신할 때까지 매질을 당했어. 아파서 울면 더 맞았어. 얼굴이 지저분해진다고.”

예상보다 더 나쁜 이야기였다. 케인은 새틴이 뭐라 위로할 새를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더 있다간 죽겠구나 싶어서 도망쳤는데……. 이 얘기는 지금 처음 하는 거야.”

“……그래.”

“과거는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너를 인식하기 전에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사실은 내가 이미 너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거야.”

케인은 새틴이 모르는 새틴을 안다. 그러나 그 새틴은 새틴이 아니다.

“네 과거가 궁금해. 내가 아는 가짜 말고 진짜 네가 궁금해.”

차라리 공개 프러포즈를 받았다면 이보다 덜 당혹스러웠을까. 새틴은 결국 시선을 떨어뜨렸다.

케인은 새틴의 침묵을 원망하거나 답을 채근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평화의 밤 축제 때는 신전 앞에 커다란 터널 모양 구조물을 만들어. 고난과 역경을 지나 평화에 이른다는 의미인데, 사람들이 그걸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뭐라고 부르는데.”

“사랑의 터널.”

새틴은 고개를 쳐들었다. 공개 프러포즈를 예고한 케인은 씩 웃더니 이만 자야겠다며 돌아섰다. 새틴은 혼이 빠져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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