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케인이 별말을 하지 않아 새틴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방금까지 새틴을 옭아매고 있던 콧수염이 바닥에 주저앉아 단검이 박힌 벽을 보고 있었다. 아마도 케인이 단검을 던진 듯한데 왜 저렇게까지 무서워하는지 모르겠다. 맞지 않았으면 됐지.
‘아니구나.’
잘 보니 콧수염의 수염이 짝짝이였다. 염력으로 면도를 한 게 아니라면 케인이 만든 작품일 터. 새틴이 눈을 감은 사이 콧수염은 구사일생의 위기를 넘긴 모양이다.
‘정말 위기였는지, 케인이 봐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케인이 새틴의 손발에 묶인 밧줄을 풀어 주는 동안 콧수염은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섣불리 덤벼들어 어찌할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아님을 확실히 깨달은 듯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콧수염이 짝짝이가 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새틴이 속으로 불필요한 동정을 할 때 케인은 기절한 곱슬머리와 얼빠진 콧수염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새틴은 문밖을 흘끔흘끔 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케흑!”
이름을 부르려고 했는데 연기 때문에 기침이 나왔다.
이제 슬슬 빠져나가야 했다. 벽을 타고 올라간 불길이 벌써 천장까지 번졌다. 애초에 발화점은 이곳만이 아니었다. 케인이 나타나기 전에도 이미 바깥에 불이 붙은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간 여관이 홀랑 다 타 버릴지도 모른다. 재수 없으면 불길 안에 갇힐 수도 있고. 대피하는 사람들의 소리도 언제부턴가 들리지 않는다.
“갈까.”
돌연 케인이 산뜻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새틴은 어어, 하며 먼저 방을 나왔다. 케인은 그대로 가려는 듯하다 멈췄다.
“왜?”
“문을 닫아 줘야지.”
케인이 픽 웃더니 객실 문을 닫았다. 아직 불이 붙지 않아 멀쩡하던 문에서 삽시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벽에서 옮겨붙은 불이 아니었다. 케인의 주변에 흰빛이 모여드는 광경을 새틴은 분명히 목격했다.
“이제 가자.”
“어…….”
새틴은 케인의 손에 이끌려 복도를 달리면서 뒤를 흘끔 돌아봤다.
대단한 화염 내성이 있지 않고서야 저 문을 통해 나올 방법은 없을 거다. 문이 다 타고 나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땐 다른 곳도 다 타고 있겠지.
불구덩이에 사람을 두고 그냥 가도 될까. 잠깐 고민한 새틴은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나쁜 놈들이잖아.’
∞ ∞ ∞
내내 좁은 객실에 붙잡혀 있느라 새틴은 바깥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막연히 난리가 난 모양이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나와서 보니 바깥은 확실히 아수라장이었다. 그러나 새틴이 예상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곧 수습되겠는데?’
아직 불은 모두 잡히지 않았지만 시간문제인 듯했다. 인근 주민과 소방관들이 불을 끄려고 물을 퍼 나르는 동안, 종업원이며 투숙객들은 불이 붙지 않은 창을 통해 탈출했다. 중상자는 없는지 경미한 부상을 입은 사람만 간혹 보였다.
‘제법 시민의식이 투철해 보이는걸.’
검댕 묻은 사람들은 소리를 치면서도 서로를 밀치지 않았다. 어지간한 선진국보다 나은 시민의식에 새틴은 감탄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현명할 수는 없기에 개중에는 엉뚱한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도 있긴 했다. 이를테면 귀중품을 챙겨 와야 한다든지.
성기사들도 역시 고집을 부리며 실랑이 중이었는데 귀중품 때문은 아니었다.
“아직 귀한 분께서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어허, 지금 들어가면 큰일 난대도!”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해야 합니다!”
“아니, 목숨만 바치고 못 구할 수도 있다니까!”
불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성기사들을 붙잡아 못 들어가게 막았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라지만 코앞에서 사람이 불길로 뛰어든다는데 보고만 있을 순 없었나 보다.
새틴은 그들이 더 고생하지 않도록 얼른 앞으로 나섰다.
“저 여기 있어요. 무사히 나왔으니까.”
새틴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기사들이 와다닥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새틴 님!”
“무사하셨군요!”
“걱정했습니다!”
거의 절할 기세였다. 새틴이 깜짝 놀라 굳은 사이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물러났다. 졸지에 새틴은 불편한 상대에게 공개 프러포즈 받는 사람의 기분을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자리를 좀 옮기죠.”
“예, 미리 말과 마차를 피신시켜 놓았습니다!”
“아니, 언제 그런, 예. 그래요. 잘하셨어요.”
새틴은 긴말하지 않고 일단 성기사들의 뒤를 따라 마차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왜인지 케인이 성기사들을 탐탁잖게 쳐다보고 있어서 신경이 쓰였지만, 그 이유에 관해서는 좀 이따 묻기로 했다.
말과 마차는 불이 난 여관에서 한 블록 떨어진 데에 있었다. 불이 났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성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할 일을 나누었다는 모양이다. 두 명은 짐과 마차를 옮기고, 두 명은 새틴을 데리러 가기로.
계획한 일의 반만 성공한 성기사들은 몹시 상심한 상태였다.
“면목 없습니다. 저희는 새틴 님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이게 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지옥에 가 마땅합니다!”
아까 그 납치범들도 지옥 타령을 하더니, 요즘 트렌드가 지옥인가. 그냥 두면 어디까지 할지 몰라 새틴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무슨 이런 일로 지옥을 가요. 저 무사하니까 다들 고개 드세요.”
“정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불이었습니다. 꼭 누가 조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상하게 번져서…….”
성기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틴은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영빈관에서 머물 적에 새틴이 몰래 탈출을 했다가 돌아오자 케인이 웃으면서 그랬다.
「오늘 안에 너를 찾지 못하면 여기에 불을 지를 생각이었어.」
농담일 거라고 애써 생각했지만 사실 그럴 리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때 새틴을 찾지 못했더라면 케인은 정말로 불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진짜 질렀네…….’
이번엔 새틴이 제 발로 도망친 게 아니지만 케인이 알 방도는 없었다. 또 도망친 줄 알고 눈이 뒤집혔다고 해도 별수 없다.
성기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저희끼리 숙덕거리는 동안 새틴은 흘끔 케인의 표정을 살폈다. 케인은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듣는 양 뻔뻔한 표정으로 성기사들에게 말했다.
“밤새 여기 있을 셈이 아니라면 다른 숙소를 찾아야 하지 않나?”
“아, 그렇지요. 두 분, 어서 마차에 오르십쇼. 혹시 이 여관이 만실일 때를 대비해서 다른 여관도 알아 두었습니다!”
성기사들은 회복 탄력성이 아주 좋았다. 이미 여관의 화재 따위 알 바 아닌지 기운차게 외쳤다. 에드워드보다 신실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좀 비뚤어진 신실함으로 느껴졌다.
마차에 오르기 전 새틴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 다친 사람들이 있다면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다른 임무 중이니까요. 무엇보다 새틴 님과 친우분을 무사히 댁까지 모시는 일이 시급합니다. 어서 마차에 오르시죠!”
“네…….”
새틴이 마차에 오르고 뒤이어 오른 케인이 문을 탁 닫았다.
마차는 미적거리지 않고 곧바로 출발했다. 화재 현장에 사람이 몰린 탓인지 마차는 천천히 달렸다. 덕분에 새틴은 케인과 느긋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느긋하다는 표현은 이 상황에 좀 안 어울리지만…….’
아무튼 조심해야 한다. 마차를 타고 오래 가지 않을 텐데 지금 진지한 얘기를 꺼내 버리면 애매하게 끊긴다. 지금은 중요치 않은 이야기로 때워야 한다.
다행히 적당한 화제는 얼마든지 있다. 방금 납치를 당했던 참이 아닌가. 새틴은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척 운을 뗐다.
“나 있는 데는 어떻게 알고 찾았어?”
케인은 뚱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대꾸했다.
“1층에 갔는데 네가 온 적 없다고 하길래 위층을 뒤졌어. 계단으로 내려간 적이 없다면 위층 어디에 있을 테니까.”
“종업원들 모르게 빠져나갔으면 어쩌려고.”
“우리가 빌린 방이 그 여관에서 제일 비싼 방이었어. 네가 거적을 쓰고 있어도 알아봤을걸.”
“아하…….”
케인은 추리 소설 후반부의 명탐정처럼 새틴을 찾아낸 과정을 설명했다.
“위에서부터 널 찾으려다가는 내가 못 보는 사이에 네가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아래서부터 찾았어?”
“목욕탕만 확인하고 바로 2층으로 올라갔지. 마침 저놈들이 2층에 묵고 있어서 찾아갔는데.”
지금 케인이 말하는 저놈들이란 성기사들을 뜻했다. 다크에이지의 케인은 성기사를 동경했는데 현실의 케인은 성기사에게 이놈 저놈 한다. 그야말로 뒤에선 나라님도 욕하는 사람이 돼 버렸다.
‘인생은 참 알 수 없구만.’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놈들하고 얘기를 하는데 이상한 놈이 발발거리면서 지나가더라고.”
“이상한 놈?”
“콧수염 난 놈 있잖아. 아까 너 붙잡았던 그 새끼. 딱 봐도 수상하던데.”
그 새끼라는 발음을 하는 케인의 표정이 몹시 무서웠다. 새틴은 재빨리 턴을 넘겼다.
“그래서 그 사람을 쫓아왔어?”
“아니, 놓쳤어.”
“아…….”
새틴이 맥 빠진 탄성을 흘리자 케인이 피식 웃었다. 그 표정을 보고서야 새틴은 여기서 맥이 빠질 필요가 없었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이 무용담은 결론을 아는 이야기다.
“그놈 찾으러 갈 필요가 뭐 있어. 불 지르면 알아서 튀어나올 텐데.”
“아니, 너구리 사냥도 아니고 그게 뭐야.”
“어쨌든 튀어나왔잖아.”
“그러다 억울하게 다치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런 부분은 생각하지 않았는데. 다음엔 고려할게.”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니, 듣기 좋은 말도 아니잖아?’
새틴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케인은 태연히 웃었다. 새틴은 한숨만 쉬고 말았다. 지난 일이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잖아. 내가 뭐라고 또 납치를 하겠어.”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