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딱, 딱딱딱, 딱. 모르고 들어도 의도가 있는 노크 소리였다. 납치범들끼리 쓰는 신호로 짐작됐다.
곱슬머리가 문을 열자 예상대로 일당이 들어왔다. 새틴은 침대 너머 바닥에 엎드려 있는 터라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대화를 듣고 알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방문자가 말했다.
“야, 아무래도 잘못 건드린 거 같아.”
“무슨 소리야?”
곱슬머리가 의아해하자 방문자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저놈 호위들이 성기사래.”
“뭐? 성기사가 왜 호위를 해?”
“모르지! 그리고 저놈이 우리 생각만큼 부자가 아닌 거 같아. 연락할 곳도 없는 거 같고…….”
남의 입으로 자신의 처지에 관해 듣고 있자니 새틴은 좀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기야 돈 때문에 납치를 했으면 돈 받을 구석이 있어야지…….’
새틴은 돈이 없다. 수도에서 지내는 동안 얻은 사치품(옷이며 장신구가 많이 생겼다.)을 팔면 마련할 수 있겠지만 누가 그렇게 한단 말인가.
수도에서부터 함께 온 성기사들은 새틴을 보호하고 있긴 하나 보호자는 아니다. 새틴의 물건을 감히 처분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거다.
납치범들은 아마 호위에게 납치 사실을 통보하면 그쪽에서 돈 받을 곳으로 연결을 해 주리라 믿었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가족이라든지.
납치범들의 꼴이 우습게 되었다.
곱슬머리가 음산하게 말했다.
“차라리 죽이면…….”
“미쳤어? 성기사들이 호위하는 인물이 누굴 줄 알고 죽여? 그러다 지옥에라도 가면 어쩌려고.”
이 순간만큼은 재갈을 물고 있어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범죄자들이 지옥 갈까 봐 걱정을 하다니.’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다. 물론 정상인이라면 상습적으로 납치를 하지도 않겠지만.
새틴은 가만히 숨을 죽인 채 계속해서 대화를 엿들었다. 어쩌면 탈출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저놈을 숨길 곳을 찾아야 돼. 성기사들이 치안청에 협력을 요청하려는 것 같았어.”
“치안청이 들어줄까? 그냥 실종자 접수나 하고 말겠지.”
“아냐, 분위기가 이상했어. 저놈 뭔가…….”
갑자기 대화가 잦아들더니 두 놈이 새틴을 향해 다가왔다. 침대 옆에 웅크리고 누워 있던 새틴은 별안간 드리운 그림자에 놀라 움칠 몸을 떨었다. 곱슬머리가 몸을 굽히더니 재갈을 풀어 주었다.
“소리 지르지 마.”
여전히 친절한 체하는 말투지만 수틀리면 돌변할지도 모른다. 새틴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곱슬머리는 언제 뽑아 들었는지 흉흉한 단검을 쥐고 있었다. 저항할 마음이 싹 가셨다.
그 뒤에 선 방문자는 콧수염이 있었다. 새틴은 이제부터 그를 콧수염이라 부르기로 했다.
‘케인식 작명이야.’
콧수염이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고 물었다.
“너 신전하고 무슨 관계야?”
“아무 관계도 아닌데요…….”
“근데 왜 성기사들이 네 호위를 해? 변장까지 하고.”
그저 눈에 띄기 싫어 평복을 입어 달라 했을 뿐인데 변장이라고 하니 할 말이 없다. 새틴이 침묵하자 콧수염이 소스라치며 외쳤다.
“너, 너 설마 용사……!”
어떻게 바로 그런 추측을 했는지 새틴으로서는 놀라울 따름이다. 새틴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곱슬머리가 콧수염의 뒤통수를 때리며 핀잔했다.
“용사가 우리한테 납치를 당할 리 없잖아. 한 손으로 용을 물리쳤다는데.”
“아, 하긴.”
콧수염은 수긍했지만 새틴은 수긍하지 못했다. 한 손으로 뭘 물리친 적은 없다. 그리고 새틴이 물리친 상대는 용이 아니라.
새틴은 생각을 끝마치지 못했다. 품 안에서 마신이 외쳤다.
―용사님, 고개를 숙이세요! 폭발합니다!
“너 이 새끼 아직…….”
새틴은 상황도 잊고 버럭 짜증을 냈다. 뒤늦게야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로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새틴의 목소리는 거기 묻혔다.
콰아아앙!
“뭐, 뭐야?”
“밖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봐!”
설마 운석이 떨어지기라도 했을까.
얼빠진 생각을 하던 새틴은 금세 이성을 되찾았다.
‘아니, 그랬으면 이미 죽었겠지.’
여관에 무슨 일이 생긴 건 분명한데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묶인 새틴을 남겨 두고 두 납치범이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바로 문을 열진 못하고 서로 눈치를 봤다.
“차례로 나가자. 같이 나타나면 이상해 보일 거야.”
콧수염의 말에 곱슬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콧수염이 방을 나갔다가 순식간에 돌아왔다.
“피해야 돼!”
“무, 무슨 일인데?”
“불이 났어!”
“뭐?”
열린 문 너머에서 소란이 느껴졌다. 급히 뛰어가는 발소리며, “불이야!” 하고 외치는 소리. 어느 직업 정신 투철한 종업원이 객실을 돌아다니며 화재를 알리는 목소리도 들렸다.
새틴은 이미 화재를 겪어 본 적이 있어서 잘 안다. 목조를 기본으로 하는 이 세계의 건물들은 불에 아주 잘 탔다. 방화 셔터도 없고 방염 소재도 없다 보니 일단 한번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번졌다.
‘소방관이야 있을 것 같지만, 얼마나 빨리 올지는 모르겠네.’
새틴이 걱정하는 사이 두 납치범도 발을 동동 굴렀다.
“저놈은 어떻게 하지?”
콧수염은 인상에 비해 마음이 약했다. 아까도 죽이면 안 된다고 하더니 이번에도 새틴을 그냥 두고 가기가 영 꺼림칙한 모양이다. 어쩌면 지옥에 갈까 봐 걱정일 수도 있고.
콧수염과 달리 곱슬머리는 몹시 냉정했다.
“이렇게 된 거 이번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내버려 두고 가자. 못 빠져나와서 타 죽은 줄 알겠지.”
“그랬다가 지옥에…….”
“여태 한 짓을 생각해, 바보야. 넌 어차피 천국엔 못 가.”
곱슬머리의 말에 콧수염은 약간 상심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의를 했는지 두 납치범이 다가왔다.
새틴은 굼벵이처럼 꿈틀대며 물러나려 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벽과 침대 사이의 틈은 겨우 두 사람 정도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금세 등에 벽이 닿았다.
곱슬머리는 아까 풀어 준 재갈을 도로 새틴의 입에 물렸다.
“미안하게 됐어. 돈 받을 때까진 살려 둘 생각이었는데.”
불이 나지 않았더라도 어쨌든 죽일 생각이었단 뜻이다. 하기야 살려 보낼 셈이었다면 얼굴을 이리 훤히 내보였을 턱이 없다.
냉정하게 자리를 떠나려던 두 납치범은 문을 열자마자 멈칫했다. 새삼스레 죄책감이 들어서는 물론 아니었다. 방해가 있었다.
“대피가 늦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아주 익숙했다. 케인이었다. 새틴은 온 힘을 다해 존재를 피력했다.
“읍, 으읍!”
재갈 때문에 크게 소리 내기가 힘들었다. 가능한 한 제일 큰 소리를 냈지만 바깥의 소란 때문에 문간까지 들렸을지는 알 수 없었다. 불안해진 새틴은 필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렸다.
‘어떻게 하지. 내가 여기 있는 줄 모르고 가 버리면 안 되는데.’
―여깁니다! 여기!
걱정이 무색하게 큰 목소리로 마신이 외쳤다. 바깥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이 소리를 듣지 못할 리 없었다.
“안에 누가 있나 본데.”
“저희가 확인했습니다, 손님. 어서 대피하셔야죠.”
케인이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납치범들이 앞을 막아섰다. 새틴의 위치에서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충 몸싸움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마신이 다시 외쳤다.
―여깁니다! 여기!
그 외침에 힘입어 새틴은 조금 전진했다. 케인이 자신의 머리꼭지를 발견해 주길 바라며.
“익숙한 목소리란 말이야, 이게.”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일 겁니다. 위험하니 어서…….”
“이렇게 막는 걸 보면 켕기는 일이 있는 거지.”
케인은 원래도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오늘 처음 만난 종업원의 조언도 당연히 듣지 않았다. 곧 납치범들은 하던 수작을 멈췄다.
“제길, 잡아!”
곱슬머리가 태세를 바꾸고 외쳤다. 새틴은 곱슬머리에게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걱정은 되지 않았다. 케인이 그런 조그만 칼 한 자루에 다칠 턱이 없었다. 왜냐하면 케인은…….
‘……설마.’
새틴이 믿음을 논리적으로 검증하기 전에 불길이 일었다. 곱슬머리와 콧수염이 비명을 지르며 방 안으로 피했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콧수염은 새틴을 붙잡아 일으키며 발악했다.
“다,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이 새끼를 죽이겠어!”
곱슬머리가 재빨리 다가와 새틴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이 무례한 놈들!
마신이 꽥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모르는 콧수염과 곱슬머리가 당황해 두리번거리는 틈을 케인은 놓치지 않았다. 괴물 뱀의 등허리를 내달릴 때처럼 순식간에 달려오더니 곱슬머리의 턱을 걷어차 버렸다.
“으흡!”
곱슬머리가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기 전 케인은 날렵하게 단검을 탈취했다.
바닥에 나자빠진 곱슬머리는 그대로 정신을 잃은 통에 상황 파악을 할 수 없었지만 콧수염은 제정신이었다. 얼굴이 시허예지더니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서, 선생님, 저희는 그, 정말로 죽일 생각은 아니었고…….”
변명을 하면서도 콧수염은 새틴을 놓아주지 않았다. 벌써 벽에 옮겨붙은 불길을 피해 몸을 이리저리 움찔대면서도 새틴의 멱살만은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날 놓아주는 순간 죽을 걸 아니까.’
원래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했다. 상습 납치범이 위기 상황에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믿을 리 없다.
지금 새틴은 묶인 손발 때문에 불편하게 서 있었다. 이러고 있자니 옛날 생각도 좀 난다. 그땐 케인이 이렇게 묶여 있었는데 지금은 반대다.
‘괜히 트라우마 건드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새틴이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케인이 다가왔다. 콧수염은 새틴의 뒤로 몸을 숨겼다. 멱살이 붙들린 채라 새틴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목이 졸리며 자연스레 나온 소리였다.
그 작은 소리가 케인에게는 죽어 가며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처럼 들렸을까. 케인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케인이 손을 치켜들었다. 단검을 든 손이었다.
“눈 감아.”
케인이 무슨 의도로 그리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새틴은 얼른 눈을 감았다. 무언가 휙 하고 날아오는가 싶더니 콧수염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으히익!”
엉겁결에 물러난 새틴은 행여 불길에 몸이 닿을까 봐 잔뜩 움츠리고 눈치를 봤다.
‘이, 이제 눈 떠도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