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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12화 (112/139)

112화

그간 새틴은 여러 여관에 묵어 봤다. 좋은 곳도 그저 그런 곳도 목욕 시설은 모두 1층에 있었다. 간단한 샤워 설비라면 모를까 욕탕이 다른 층에 있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하중 때문인지 다른 무슨 설비 때문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간에.

물론 이 여관의 구조를 모르니 확신할 수는 없다. 간혹 어떤 건물은 경사에 걸쳐 있어 2층과 1층이 혼재돼 있기도 하니.

일단 확인은 해 보기로 했다.

“목욕탕은 1층에 있는 줄 알았는데요.”

앞서 걷던 종업원이 웃는 낯으로 돌아보며 대답했다.

“예, 보통은 그렇죠. 저희 여관은 목욕탕 규모가 아주 커서요. 2층으로도 들어갈 수 있어요. 1층으로 들어가면 붐빌 테니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는 겁니다.”

“아, 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설명이지만 새틴은 불길함을 느꼈다. 여러 층에 걸쳐 있을 정도로 커다란 목욕탕이 있다면 객실을 빌릴 때 이미 설명을 듣지 않았을까. 자랑할 만한 부대시설에 관해 입도 뻥긋하지 않는 건 이상하다.

그리 의심하니 종업원의 해명도 마치 외워서 하는 말처럼 들렸다. 왜 1층으로 가지 않느냐 물으면 대답하려고 미리 준비해 둔 말이 아닐까.

긴장으로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새틴은 태연한 체하며 눈만 굴려 주변을 살폈다.

‘도와줄 사람이.’

공교롭게도 지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4층에서는 종업원을 몇 명이나 마주쳤는데.

새틴은 슬그머니 걸음을 멈췄다. 앞에서 걷고 있으면서 어떻게 알아챘는지 종업원이 곧바로 돌아보았다.

“다들 여기쯤에서 의심을 하더라고.”

종업원의 웃는 얼굴이 아까와 달랐다. 말투에서도 야비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결코 좋은 의도로 새틴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 같지 않았다.

위기감을 느낀 새틴이 즉각 뒤돌아 달려가려던 순간, 바로 옆 객실의 문이 열렸다.

“도와주, 읍!”

도움의 손길은 없었다. 객실에서 나온 손님은 가짜 종업원과 한패였다. 순식간에 입이 틀어 막히고 객실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문이 쾅 닫혔다.

‘이게 대체 무슨…….’

시야가 어두워지며 더는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 ∞ ∞

새틴이 나간 후에야 케인은 진정했다. 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갑자기 심장이 뛰어서 당황했다.

진정하고 나니 상황이 제대로 보였다. 볕이 잘 드는 자리를 좋아해서 항상 창가 쪽 침대를 쓰던 새틴이 안쪽 침대 아래에 신발을 뒀다.

케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신발을 창가 쪽 침대 아래로 옮겼다.

‘씻으러 간다고 했나?’

뭔가 대화를 하긴 했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다 잊어버렸다. 어지간히도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언제 벗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로브를 침대에서 걷어 옷장에 넣으며 케인은 한숨을 쉬었다.

‘전에도 이런 적 있었지.’

새틴이 저를 좋아한다는 생각을 했을 때였다. 우연인지 이번에도 같은 생각을 하다 이렇게 됐다.

새틴의 말대로다. 좋아한다는 마음이 꼭 친구 사이에만 있진 않다. 오히려 보통 사람들은 친구가 아닌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한다.

‘친구 사이에 날 좋아하느냐고 묻는 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닌가?’

하지만 케인이 물었을 때 새틴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묘하게 웃는 표정은 무언가 케인이 알지 못하는 것을 이미 아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거 보면 확실히 기억이 돌아왔네.’

재회한 후의 새틴은 시골뜨기처럼 어리숙한 데가 있었다. 실제로 시골에서 몇 년이나 지냈으니 그렇게 될 만도 했다. 일부러 아는 내색을 하면서 굳이 말하지 않는 건 4년 전의 새틴에게 어울리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분명 뭔가 생각하고 있을 텐데, 그게 뭘까.

호화로운 객실 분위기에 영향이라도 받았는지 생각이 물러졌다. 오늘 저녁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먹은 술 푸딩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뭔가, 분명 몹시 긍정적인 그런…….’

제대로 된 문장이라고 하기엔 다소 애매한 말을 속으로 뇌까리며 답을 찾았다.

적어도 새틴은 지금의 관계가 위태로워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진 않았다.

‘이를테면 더 발전된 형태의 어떤 관계가.’

케인은 무심결에 손부채질을 했다. 후텁지근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탓만이 아니었다.

‘나도 씻으러 가야겠어.’

이미 새틴이 목욕탕에 가겠다며 나섰지만 별문제는 아니다. 케인은 전에도 새틴의 몸을 본 적이 있다. 최근은 아니나 어쨌든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니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벌거벗은 몸을 좀 보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아니, 좀 이따가 가는 편이 나을까.’

케인은 소파에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홀로 수선을 떨다가 결국 일어났다.

서둘러 객실을 빠져나갔다. 비싼 객실에 묵는 손님인 걸 알아본 종업원들이 마주칠 때마다 꾸벅꾸벅 인사를 했지만 건성으로 보고 지나쳤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 1층에 다다르자마자 접수대의 종업원과 눈이 마주쳤다.

“무얼 도와드릴까요?”

“목욕탕이 어느 쪽이지?”

“왼쪽 복도로 들어가시면 귀빈을 위한 특별한 목욕탕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친절히 대답하며 종업원이 열쇠를 내주었다. 케인은 엉겁결에 받고서 물었다.

“이건 뭐지?”

“저희 여관에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귀빈께 보관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불이 나도 내용물이 손상되지 않는답니다.”

목욕탕에 불이 나도 옷이 무사하다면 과연 얼굴이 팔릴 일이야 없을 테지만. 케인은 작게 혀를 찼다.

“애초에 불이 안 나게 해야지.”

퉁명스러운 지적에 종업원이 멋쩍어하며 웃었다.

“물론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답니다. 다만 다른 여관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귀빈이 노하신 적이 있어서요.”

어느 돈 많은 사람이 망신이라도 당했나 보지.

별로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어서 케인은 대충 고개를 주억였다. 바로 목욕탕으로 가려는 케인에게 종업원이 물었다.

“아, 일행분께서도 목욕탕을 이용하시나요?”

“일행?”

“혹시 보관함이 따로 필요하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원래는 객실당 하나지만 오늘은 다른 귀빈이 없으니 특별히 편의를.”

“내 일행은 이미 목욕탕에…….”

케인은 무심코 대답하다 말을 멈췄다.

새틴은 케인보다 먼저 목욕탕에 갔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만약 새틴이 여기 들렀다면 이 종업원이 모를 리 없다. 다른 귀빈도 없다지 않은가.

케인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곧바로 복도를 내달렸다.

∞ ∞ ∞

‘이런 거 오랜만인데.’

새틴은 입이 틀어 막힌 채 멍하니 생각했다.

납치범들이 쓴 약이 뭔지는 모르나 후유증이 좀 있었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 여전히 어지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차가운 물이라도 마시면 좋겠지만 재갈 물린 인질에게 그리 친절할 리는 없다.

납치범들은 왜 새틴을 납치했는지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충 이유는 짐작이 됐다.

새틴과 케인은 무척 커다란 마차를 타고 왔다. 겉모양이 소박하다 한들 그 정도 크기면 허름하다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말들은 관리를 잘 받은 티가 나고, 따르는 기사도 여럿이다.

큰 도시에서는 그럭저럭 평범하다 우길 수 있었지만 데이지랜드는 작은 도시다. 미처 생각지 못했다.

‘누가 봐도 돈 많은 도련님 같았겠지.’

도련님이라 불릴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봉이나 호구라는 말이 더 어울릴까. 쓸데없는 생각 좀 했다고 머리가 또 지끈거린다.

새틴은 겨우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커튼 너머가 컴컴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진 모양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아까 목욕탕에 가겠다고 객실을 나왔을 때 이미 해 질 녘이었다. 어두운 하늘만 봐서는 시간이 가늠되지 않았다. 아주 잠깐 지났는지, 아니면 몇 시간쯤 지났는지. 설마 날이 바뀌진 않았겠지?

그래도 하나는 분명히 알겠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진짜네.’

납치범들은 새틴을 납치해 여관을 빠져나가지 않았다. 새틴이 지금 감금된 장소는 처음 끌려 들어온 그 객실이었다. 이 미친놈들은 납치한 장소에 납치한 사람을 숨겨 두는 대범한 짓을 하고 있었다.

‘케인은 내가 없어진 걸 알아챘으려나.’

목욕탕에 간다고 했으니 한참 돌아오지 않아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나마 희망적인 예상을 하자면, 케인도 목욕탕에 갔다가 이상을 알아차리는 거다. 먼저 간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확실히 이상하잖아.

만약 케인이 오늘 목욕할 마음이 없다면?

‘망한 거지.’

재갈 때문에 한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앓는 듯한 신음을 겨우 흘리자 감시자가 다가왔다.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 외에 별 특징이 없었다.

“불편하지? 조금만 참아.”

곱슬머리는 친절한 체했지만 새틴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범죄자의 친절을 어떻게 믿겠는가.

곱슬머리는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아까 납치한 놈과 마찬가지로 종업원 복장을 하고 있었다. 종업원으로 가장을 한 건지, 아니면 진짜 종업원인지는 지금으로서는 분명치 않다. 새틴은 후자가 더 가능성 있다고 추측했다.

새틴을 여기로 데려온 납치범은 여관 안에서 너무 태연하게 돌아다녔다. 아무리 큰 여관이라 한들 종업원이 수백 명은 아닐 텐데. 게다가 그놈은 이미 여러 번 같은 작업을 해 본 사람처럼 말했다.

‘여기쯤에서 의심을 한댔나?’

매번 같은 루트로 목표물을 끌고 왔다는 뜻이다. 진짜 종업원이 아닌데 매번 성공적으로 잠입해 납치를 했을 가능성은 적다. 차라리 진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겸사겸사 납치도 했다는 편이 더 가능성 있어 보인다.

한데 그리 생각하니 또 의심스럽다.

‘그걸 여관은 모른다고?’

혹시 여관도 한통속은 아닐까. 여관이 통째로 범죄자 소굴이라면 부유해 보이는 손님을 납치하고 뒷수습을 하기도 어렵지 않을 테다. 애초에 숙박한 적이 없는 걸로 만들어 버린다든지.

‘아니, 일행까지 다 납치할 게 아니고서야 그건 좀 무리 아닌가?’

새틴이 완전히 의심에 골몰했을 때,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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