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다행히 사자는 새틴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황금 마차를 끌고 돌아가더니 다른 마차를 가지고 왔다. 안은 서너 사람이 누워도 될 만큼 넓고 화려하지만 겉모습만은 소박한 마차였다.
“이것은 괜찮으시겠지요?”
“예, 뭐…….”
이것까지 거절하긴 뭐했는지 새틴은 더 말하지 않고 그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왕실 사자가 돌아간 후 새틴은 열없이 웃으며 말했다.
“진짜 큰일 날 뻔했다. 안 그래?”
“그러게.”
케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딴생각을 했다. 아마 여기서 끝이 아닐 거라고.
그리고 케인의 짐작대로 되었다.
“용사님, 저희가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간 얼굴을 익힌 영빈관의 직원들이 송별 선물을 준비했다. 정말 작은 선물이었다면 그저 고맙게 받았을 텐데 문제는 양이었다. 선물이 아니라 이삿짐이라 해도 믿을 만큼 많았다.
새틴은 아까처럼 또 얼굴이 퍼레져서 중얼거렸다.
“……작다는 말을 제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나 봐요.”
영빈관에서 준비한 선물은 비누와 향유, 화장수, 실내용 가운, 잠옷, 새 침구(새틴이 방을 탈출하며 시트를 찢은 데에 심오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등이었다. 모두 케인과 새틴이 영빈관에 머무는 동안 사용한 것과 같은 제품이었다.
‘그냥 있으니까 썼을 뿐인데.’
영빈관 직원들은 그 소모품에 자기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다. 손도 어지간히 커서 몇 달은 쓰고도 남을 만큼 바리바리 챙겼다.
물욕이 별로 없는 새틴은 여러 차례 거절했지만 실랑이가 끝나지 않자 결국 포기했다. 영빈관 직원들은 신이 나서 선물을 마차에 실었다.
새틴은 과한 선물에 약간 넋이 나갔지만 케인은 이 정도야 대수롭잖게 여겼다.
‘받아서 나쁠 건 없지.’
새틴은 남들보다 좋은 것을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영빈관에서 쓰는 것만큼 질 좋은 물건을 클로버랜드에서 구하긴 어렵다. 그리 생각하면 받을 수 있을 때 받아 두는 편이 현명하다. 어차피 집 안에 두고 쓰는 물건들이니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
선물 소동이 끝난 후 새틴은 조심스레 말했다.
“이제 더는 없겠지?”
그럴 리가.
대신전에서 성기사들이 찾아왔다. 잔뜩 기합이 들어가 외쳤다.
“용사님과 친우분을 안전히 클로버랜드까지 모시겠습니다!”
“아, 아니, 왜…….”
새틴은 성기사들이 번쩍거리는 은빛 갑옷을 벗고 올 때까지 기나긴 설득을 이어 나가야 했다. 결국 출발은 이튿날로 미뤄졌다.
∞ ∞ ∞
수도에서 클로버랜드까지의 여정은 순조로웠다. 성기사들은 호위만이 아니라 수발을 드는 데도 제법 재주가 있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려나.’
케인은 다소 냉소적인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성기사들은 새틴을 마치 신의 사자처럼 존중하고 모셨다. 케인에게도 깍듯했으나 새틴에게만큼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호위를 맡았다면 정말 호위에만 충실했으리라.
어쨌든 덕분에 케인도 지난 며칠간 불편 없이 지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정이 들진 않았다. 새틴은 성기사들과 헤어지고 나면 좀 섭섭할지도 모르겠다고 농담을 했지만 케인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오히려 가끔은 성기사들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새틴이 그들에게 고맙다고 말할 때라든지.
‘빨리 도착해서 헤어지면 좋겠는데.’
에드워드와 달리 신실한 성기사들이라 다행이었다. 새틴을 향한 친절에 조금이라도 꿍꿍이가 섞여 있었다면 곧바로 불지옥을 맛보게 해 줬을 텐데.
케인은 무던한 표정을 뒤집어쓰고 거친 속마음을 가라앉혔다. 조금 후면 데이지랜드에 도착한다. 데이지랜드에서 클로버랜드까지는 금방이니 성기사들과 함께하는 여정도 곧 끝이다.
도착이 가까워진 탓인지 가슴 한구석이 근질거렸다. 설렘 같기도 하고 걱정 같기도 했다. 걱정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다 보니 그동안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지금은?’
수도에서 새틴이 했던 말이다.
‘지금도 그때처럼 친구라고 생각하냐고?’
친구가 아니면 뭐란 말이지. 그렇게 태연히 되뇌려 하지만 무언가가 자꾸만 마음을 갉작였다. 새틴이 저를 좋아한다고 깨달은 순간 온 얼굴에 번지던 열기가 기억났다.
케인은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불쑥 입을 열었다.
“……친구를 좋아하는 건 당연하지?”
내내 창밖을 보고 있던 새틴이 “어?” 하며 돌아보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지 눈이 동그랬다.
케인은 왜 민망한지도 모르면서 얼굴을 문질렀다.
“내 말은, 친구를 좋아하는 감정이 당연한 거냐고.”
“하하, 그렇지?”
새틴은 웃으며 긍정했지만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왜 말꼬리가 올라갔을까. 케인이 이유를 물을까 말까 하는 사이 새틴이 이어 말했다.
“좋아하는 감정이 친구 사이에만 있지 않겠지만 말이야.”
“그야 그렇지만…….”
케인은 평소 같지 않게 어물쩍 말꼬리를 늘였다. 새틴은 이미 대화가 끝났다 판단했는지 다시 창밖을 보고 있었다.
표지판이 보이자 새틴이 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거의 다 왔네, 이제.”
∞ ∞ ∞
‘오늘은 집에 도착할 줄 알았더니.’
새틴은 성기사들이 빌린 객실을 살펴보며 속으로만 혀를 찼다.
데이지랜드에서 클로버랜드까지 가는 데는 서너 시간 남짓 걸린다. 가고자 하면 오늘 안에 못 갈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성기사들은 굳이 데이지랜드에서 하루를 묵어가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
성기사들이 느긋한 성품이어서가 아니라 날씨 탓이었다. 요새는 해 질 녘에도 공기가 후텁지근했다. 말이 지쳤으니 무리해 달리게 하지 말자는데 거기다 대고 빨리 가자 우길 수는 없었다.
‘하루 늦어진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니까.’
새틴은 금세 너그러워졌다. 객실이 아주 좋아서일지도 모른다.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침대는 각각 서너 사람쯤 누워도 될 만큼 크고, 객실 한가운데의 소파는 문외한의 눈으로 봐도 장인 제작품이다. 이 세계엔 아직 복사 기술이 없으니 벽에 그린 그림도 아마 진짜다.
‘이 정도면 리타도 만족하지 않을까.’
예전에 데이지랜드에서 묵을 때는 에드워드가 여관을 골랐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여관이었다. 리타는 괜찮은 척했지만 여관이 썩 마음에 든 눈치는 아니었다.
반면 오늘 성기사들이 고른 여관은 범상치 않았다. 새틴이 감히 추측건대 여기보다 더 훌륭한 여관은 데이지랜드에 없을 거다.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새틴이 연신 둘레둘레하고 있으니 성기사 한 명이 우쭐한 표정으로 나섰다.
“네, 너무 좋은 방이에요. 제가 이런 방에 묵어도 될지 모르겠어요.”
“새틴 님께서 못 하실 일은 없습니다. 아무렴요.”
수도를 떠날 적에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용사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더니 새틴 님이 기본 호칭이 되었다. 그것마저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지난 며칠간 그 분에 넘치는 호칭도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새틴이 멋쩍게 웃자 성기사들은 내일 아침에 뵙자고 인사하고 객실을 나갔다. 케인이 새틴과 한방에 묵는 데는 이미 익숙해져 그 부분에 관해서는 별말도 없었다.
“케인, 어느 쪽 침대 쓸래?”
새틴은 슬쩍 창가 쪽 침대에 눈독을 들이며 물었다. 케인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객실 한구석을 보고 있었다. 새틴처럼 들떠서 객실을 구경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왜 그래?”
“어?”
“거기 뭐라도 있어?”
케인이 보던 곳을 새틴도 살폈지만 별달리 특이한 것은 없었다. 새틴이 쳐다보자 케인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되물었다.
“아까 뭐라고 했어?”
“아, 어느 쪽 침대 쓸 거냐고.”
“이쪽.”
아무래도 케인은 좀 정신이 없는 듯했다. 케인이 창가 쪽 침대에 로브를 걸친 순간 새틴은 확신했다. 다른 때라면 기가 막히게 새틴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텐데 지금은 반쯤 얼이 빠졌다.
‘애는 애구나.’
케인이 왜 그러는지 대강 짐작이 되어서 새틴은 구태여 자리를 바꾸자 하지 않았다. 충분히 생각을 거치고 나면 알아서 정신을 차리겠지.
새틴은 고개를 주억이고 말했다.
“난 가서 씻고 와야겠다. 너도 갈래?”
“아, 아니. 먼저 가.”
드물게 케인이 말을 더듬었다. 뺨이 미묘하게 발그레했다.
예전에도 케인은 이렇게 새틴을 의식한 적이 있다. 늑대 인간을 처음 만났을 때였나. 새틴은 가만히 기억을 되짚었다. 그때는 그저 케인이 얼른 평정심을 찾기만 바랐는데 지금은 좀 다른 기분이다.
이 기분을 무어라 하면 좋을까. 새틴은 얕은 생각에 잠긴 채 테이블에서 포도를 한 알 집었다.
‘이것도 판타지 버프일까.’
신선한 포도는 산미가 없고 아주 달았다. 현대의 과일들은 대부분 품종 개량을 거쳤다고 하던데. 이 세계의 과일을 먹으며 위화감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
‘하기야 사람들도 그렇지.’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평균 신장이 훨씬 작았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 새틴은 저보다 큰 사람을 셀 수 없이 봤다. 얼을 빼놓고 서 있는 케인도 그렇지 않은가.
‘내가 잡생각을 하고 있네.’
하던 생각을 미루고 새틴은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여태 서 있던 케인이 흘끔 쳐다보기에 손을 흔들어 주고 객실을 나왔다.
“그럼 다녀올게.”
새틴과 케인이 묵기로 한 객실은 4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힘들지만 그럼에도 높은 곳에서 보는 풍경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4층엔 방이 몇 개 안 되네.’
급히 움직일 이유가 없기에 새틴은 긴 복도를 느긋하게 걸었다. 간혹 종업원들과 마주쳤는데 하나같이 깍듯했다. 계단 앞에서 만난 종업원은 가던 길을 틀어 안내를 해 주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혼자 가도 괜찮은데…….”
약간 미안해서 새틴이 어물거리자 종업원이 상냥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닙니다. 최고급 객실에 묵으시는 손님께 이 정도는 해 드려야지요.”
“그렇다면야.”
이 과도한 친절도 숙박비에 포함된 서비스라고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종업원은 1층까지 내려가지 않고 2층 복도로 들어섰다. 2층은 4층보다 문의 간격이 조밀했다. 객실의 크기가 더 작아서일 터다. 연달아 몇 개의 객실을 지나던 중 새틴은 문득 의아해졌다.
‘목욕탕은 1층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