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3
소원으로 뭘 빌었느냐 물으니 리타가 대답했다.
“이 나라의 모든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서 무궁한 영광을 누리게 해 달라고 빌었지.”
평소의 리타 같지 않게 말이 장황했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이냐고 새틴이 다시 묻기도 전에 에드워드가 툭 끼어들었다.
“너무 주관적이지 않습니까?”
리타는 눈을 세모 모양으로 뜨고 에드워드를 쳐다보았다.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이고 연달아 물었다.
“기능이란 게 뭡니까? 나라가 국민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말하는 거라면 그건 기도를 해서 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각 위치의 사람들이 노력해서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그야 그렇지만.”
“영광이라는 건 또 뭡니까? 전쟁을 해서 이기는 것도 참 영광스러운 일인데 전쟁을 하고 싶진 않을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건 아니지.”
리타가 순순히 동의하자 에드워드가 얄밉게도 말했다.
“전 소원을 구체적으로 비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올 기회가 아닌데 두루뭉술하게 말했다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쩐단 말입니까.”
“신께서 그 정도는 아시겠지.”
“글쎄요, 우리 신께서는 스스로 구하지 않는 자에겐 기회를 주지 않으십니다. 리타 씨는 어쩌면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쳤는지도 모릅니다.”
“야, 넌 꼭 그런 식으로 말을 해야 돼?”
리타가 벌컥 언성을 높이자 에드워드는 재깍 사과했다. 지나칠 정도로 깍듯이.
“전하께 제가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아니, 호칭 말고, 씨.”
리타는 작게 식식거리다 하소연했다.
“클로버랜드에 갔을 때 엄청 화났단 말이야. 관청도 엉망이고 치안청도 엉망인데 당장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확실히 클로버랜드는 문제가 좀 있죠.”
“기도를 하면 일이 좀 잘 풀리지 않을까 했지. 클로버랜드 말고 다른 데도 말이야.”
“그런 거라면 이해합니다.”
리타와 에드워드는 클로버랜드의 앞날을 두고 의견을 교환했다. 새틴은 클로버랜드의 주민이지만 별 관심 없는 이야기라 목덜미만 긁었다.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의 논쟁 아닌 논쟁이 되었으나 사실 처음 질문한 사람은 새틴이다. 그래도 새틴은 서운해하지 않고 눈을 돌렸다. 어차피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물었을 뿐이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배가 좀 고프네.’
말씀의 방에서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신관과 오찬을 하기로 했으나 그때까지 시간이 꽤 남았다. 그런 연유로 일행은 잠시 휴식 시간을 얻었다.
‘피크닉이라도 하는 거 같네.’
대신전에는 세 개의 정원이 있다. 그중 제일 바깥쪽에 위치한 정원은 아주 넓어서 행사가 있을 때면 일반 신도들에게 개방한다고 한다. 정원이라 부르지만 사실상 잔디 깔린 광장에 가까워 보였다.
제일 안쪽의 정원은 가장 작은 규모지만 수백 년 묵은 신목이 있어 다른 정원들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겨졌다. 고위 신관을 임명할 때나 신전 내부의 대사를 의논할 때 간혹 사용한다고 들었다.
지금 새틴 일행이 있는 곳은 그 두 정원의 가운데 있는 정원이다. 별다른 목적 없이 만들어진 곳이다 보니 세 정원 중엔 가장 정원다웠다. 관상수는 세심한 관리를 받은 티가 나고, 새틴이 이름을 알지 못하는 꽃이 여러 종류 어우러져 있었다.
이리도 아름다운 정원 한가운데서 차와 과자를 먹고 있으니 마음이 절로 평온해졌다.
“더 먹을 거야?”
새틴이 정원 구경에 혼을 팔고 있으니 케인이 물었다. 새틴의 접시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언제 접시가 비었지.
새틴은 약간 멋쩍어하며 입가를 문질렀다.
“아니, 괜찮아.”
손바닥에 과자 부스러기가 묻어났다. 새틴은 민망해서 괜히 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무슨 차인지는 몰라도 향이 무척 좋았다.
새틴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던 케인이 제 앞의 접시를 밀었다. 케인의 접시에는 과자가 아직 남아 있었다. 의미를 알아챈 새틴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괜찮다니까.”
“안 먹어도 되고.”
“진짜 괜찮은데…….”
새틴은 어물거리다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과자 부스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케인이 픽 웃었다.
새틴이 대강 허기를 채웠을 때쯤 리타가 물었다.
“이제 얘기해 봐. 어제 왜 그랬어?”
정정. 물음이 아니었다. 당연히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듣겠다는 태도였다.
새틴은 일순 당황했지만 이런 상황이 올 거라 미리 각오하고 있었기에 금세 침착함을 되찾았다.
“어제는 약속한 일정을 망쳐서 미안해.”
“사과를 듣자는 게 아니야. 갑자기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새틴이 순순히 고개를 숙이자 리타는 훈계를 하는 척하다 엉뚱한 데로 빠졌다.
“침대 시트로 로프를 만들었다며? 내가 열다섯 살 때나 한 짓인데. 난 로프를 만들어 놓고 다른 데로 탈출했었어. 내가 계획을 얼마나 영리하게 세웠는지 무려.”
“리타 씨가 비행 청소년이던 시절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죠.”
“아, 그렇지. 왜 그런 거야?”
일부러는 아니겠지만 리타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시간을 벌어 줬다. 덕분에 새틴은 그럭저럭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내가 달라지는 게 무서웠어.”
이 대답은 진심이 아니다. 케인은 새틴의 거짓말에 동조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정원만 보고 있었다. 새틴은 거짓말에 좀 더 살을 붙였다.
“되찾은 기억이 나를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나 봐.”
긴 설명을 하는 대신 쑥스러운 척 웃자 대강 이해했는지 리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는 새틴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으로서는 별로 달라진 점이 없어 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것도 거짓말이다. 알 안에 거위 새끼가 들어 있는지 오리 새끼가 들어 있는지, 부화할 때까지는 알 수 없다. 어차피 닮은 놈들이니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할 수야 있지만.
어제의 소동에 관한 화제는 바로 끝났다. 잘 마무리되었으니 굳이 길게 얘기할 필요 없다고 판단했는지 리타가 곧바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소원은 뭘 빌었어?”
“아, 소원.”
기억을 달라고 했는데 그걸 소원이라 쳐도 될까. 그러면 케인과 겹친다. 케인은 새틴이 뭘 빌었는지 까맣게 모를 텐데.
새틴은 슬쩍 얼버무렸다.
“딱히 바라는 것도 없고 해서 안 빌었는데.”
“뭐? 이 기회를 그렇게 날렸다고?”
리타가 눈을 부릅떴다. 에드워드마저 놀란 표정이었다. 두 사람과 달리 케인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쟤 안에서는 내가 약간 성인군자 같은 느낌인가.’
새틴은 케인의 반응이 민망했지만 당장은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좋은 상태 같아서, 기억도 찾았고.”
“그렇다면야, 뭐. 그래도 아깝긴 하다.”
리타는 자기 일도 아니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에드워드가 옆에서 “소원을 양도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하며 깐족거렸다. 에드워드 덕분에 새틴은 구구절절 소원을 빌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새틴은 지난 시간에 관해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 이해했다. 그렇기에 현재의 상태에 만족했다. 무언가 달라지면 좋겠다거나, 무언가 바꿔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문제는 소원을 빌어서 해결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인간관계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
케인과 함께 클로버랜드로 돌아가면 아마 한동안은 평화로울 거다. 케인은 대단찮은, 그러나 건전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새틴은 케인이 걱정하지 않도록 먼 데 가지 않고 그의 집에 머무르겠지. 텃밭을 돌보고 동네 사람들에게 소소한 이야기나 들으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그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케인은 새틴의 기억을 되찾기를 바랐다. 기억을 잃은 새틴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런데 기억을 되찾은 새틴에게 바라는 것이 없을 리 있나.
‘그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해도 말이지.’
빈칸을 채우고 나니 흐름이 보였다. 케인의 마음이 흐르는 방향이다.
새틴이 슬쩍 쳐다보자 때마침 케인도 새틴을 보았다. 케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넌 어때? 지금 상태에 만족해?”
슬쩍 떠보았지만 케인은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다. 새틴과 달리 분명하게 존재하던 목표를 이루었으니 당장 다음의 일까지는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새틴은 구태여 케인의 가슴에 불을 지피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마침 화젯거리로 적당한 것이 눈에 띄었다.
잘 가꾸어진 정원 한쪽에 새틴이 아는 식물이 보였다. 다섯 갈래로 갈라진 잎사귀, 조롱조롱 매달린 작고 빨간 열매들. 인삼이었다.
“여기서는 저게 관상용이야?”
말해 놓고도 새틴은 약간 의아했다.
‘인삼이 관상용으로 삼을 만큼 예쁘진 않지 않나…….’
새틴은 그리 생각하며 목을 쭉 빼 화단을 보았다. 정원사의 솜씨가 좋은 탓일까. 여러 송이가 늘어서 있는데도 인삼밭 같지 않고 평범한 화단처럼 보였다.
‘키우기 나름인가 보네.’
멋대로 짐작하며 고개를 주억이는데 에드워드가 화단을 흘끔 보고 대답했다.
“아, 저건 관상용이 아니라 방충용입니다.”
“방충용?”
인삼이 벌레를 쫓는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새틴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에드워드가 설명했다.
“독초라서 저걸 심어 두면 벌레가 꼬이지 않습니다. 한 송이만 있어도 아주 유용하죠.”
“……독초?”
“예, 동물들도 어지간해선 건드리지 않습니다. 예전엔 일부러 밭 둘레에 심어 뒀다는데 요즘은 위험하니 못 하게 하지요.”
벌레와 동물이 피하는 독초라면.
‘사람한테도 위험한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