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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08화 (108/139)

108화

케인은 걷고 있었다. 왜 걷는지도 모르면서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 순간 어두운 복도가 나타났다. 그 변화는 아주 자연스러워서 케인은 경계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복도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저 미친 늙은이가 왜 살아 있지?’

분명 죽었다고 했는데. 케인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지금 다시 죽이면 된다.

케인이 막 늙은이의 등 뒤로 다가갔을 때, 늙은이가 입을 열었다.

「새틴.」

그 부름을 듣는 순간 케인은 이 장소가 어디인지 알았다. 학교 지하, 참회실이 있던 곳이다.

‘꿈?’

「새틴, 왜 대답이 없느냐.」

케인은 늙은이가 보는 곳을 보았다. 닫힌 문 너머, 겨우 손 하나 들어갈까 싶은 배식구 틈으로 새틴의 눈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눈은 케인을 보지 않는다.

「저를 새틴이라고 부르시는데, 그게 제 이름인가요?」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무언가에 떠밀리기라도 한 듯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케인은 늙은이와 새틴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늙은이의 옆에서 새틴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태도는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마치 낯선 곳에 떨어진 아이 같다.

‘새틴이 처음 기억을 잃었을 때구나.’

케인이 알지 못하는 새틴의 기억이다.

그런데 왜 이 순간이지?

사소한 의문에 대해 깊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어디선가 생쥐가 나타났다. 제가 늙은이 때문에 죽게 되는 줄 까맣게 모르는 생쥐는 늙은이의 지시에 따라 새틴에게 학교를 안내해 주러 나섰다.

「선생님은 마법사거든. 마법사들은 원래 연구실이 필요하대. 새로운 마법을 발견하는 게 마법사들의 꿈이니까.」

「발명이 아니라 발견?」

「마법은 발명할 수 없어.」

「너도 마법사야?」

「아니, 그건 아닌데 그래도 그 정도는 알지.」

아무것도 모르는 새틴은 순진해 보였다. 케인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새틴이 처음 기억을 잃었다고 했을 때 케인은 새틴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여전히 기분 나쁜 뱀 눈깔이라고만 생각했다. 인간의 본질이 그리 쉽게 달라질 리 없으니.

누군가는 신을 믿고 누군가는 사람을 믿지만 케인은 자신 외의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의심과 경계심, 불신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아집이었다. 결국 타인에게 구해질 줄 모르고. 잘못된 사람을 믿었던 생쥐와 다를 바 없다.

새틴과 생쥐는 2층으로 올라갔다. 한동안 지냈던 곳이지만 향수를 느낄 새도 없이 케인은 이마를 짚었다.

맞은편에서 제가 걸어오고 있었다. 지금보다 키가 작고, 얼굴이 앳되고, 표정은 퉁명스럽다. 새틴에게는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지나쳐 버린다.

‘돌겠네.’

말 못 할 수치심에 얼굴을 문지르고 있으니 시간이 또 빠르게 흘렀다. 케인은 새틴의 등 뒤에 서서 제가 과거에 한 말을 듣고 있었다.

「기분 나쁘게 왜 남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는 거야?」

‘말을 왜 저따위로 하지.’

자책해도 소용없다. 이미 지난 일을 바꿀 방도는 없으니.

시간이 흐르고, 새틴이 지하실로 내려갔다. 캄캄한 새벽이었다. 케인은 이때가 언제인지 알았다. 생쥐가 사라진 날이다.

희미한 연기와 역겨운 냄새가 남은 지하에 들어섰을 때부터 새틴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손은 떨리고 눈은 가만히 한군데를 보지 못했다.

「팀?」

가라앉은 목소리는 텅 빈 참회실을 공허하게 울렸다. 가장 안쪽, 늙은이의 비밀 공간을 발견한 새틴은 주저앉아 넋을 놓았다.

울지는 않았다. 분노한 듯 보이지도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나 하나는 분명했다. 새틴은 이 순간에 비로소 케인이 그리워한 모습이 되었다.

새틴은 케인에게 손을 내밀었고, 케인은 그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함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았다. 물론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될 거라 낙관하진 않았다.

「혹시 위험한 상황이 되면 우리 계획을 포기해서라도 널 구해야 할 거 아냐.」

이 말이 진심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개의치 마. 너하고 나 사이에 뭐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

케인이 그랬으니까.

두 사람은 분명 같은 목표를 위해 손을 잡았으나, 둘 사이에 있는 것은 유대라고 하기엔 너무나 연약했다. 언제고 끊어질 수 있는 관계였다.

이제 와 문득 후회한다.

‘나만 그랬을지도 모르지.’

새틴은 그 얕은 인연을 위해 계단에서 몸을 던졌다. 그래 놓고 뭘 잘했다고 저리 웃었는지 모르겠다.

「너라면 괜찮을 거 같았어.」

「이해할 수가 없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체 제가 뭐라고. 오래 안 사이도, 특별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결국 새틴은 케인을 새로이 만들었다. 케인은 새틴을 믿었고, 새틴이 말하는 희망을 믿었다.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순간, 그 배신감을 죄책감으로 뒤집었다.

그때 보지 못한 불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학교 전체가 불타고 있었다. 시뻘건 불길은 태우지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늙은이는 달아나고, 아이들은 탈출했다. 케인은 연기가 자욱한 연구실에 홀로 남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누구도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법. 케인은 저 순간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꽤 의연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전혀 아니다.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안도했다. 멍청하게 풀어진 얼굴은 어린아이 같았다.

「너 제정신이야? 여긴 왜 온 거야?」

‘왜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고.’

새틴은 버릇없는 아이에게 화도 나지 않는지 다정히 말했다.

「금방 온다고 했잖아.」

두려움을 무릅쓴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대단한 희생을 결심한 듯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약속을 지키러 왔을 뿐이다.

새틴은 태연히 젖은 옷을 벗어 케인의 얼굴을 감쌌다. 힘이 빠진 케인을 둘러업더니.

「무서우면 눈 감아도 돼.」

새틴은 불길 속으로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계단이 허물어진 후에도 당황하거나 겁먹지 않았다. 천장에서 우지끈 소리가 나도, 딛고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어도.

「괜찮아. 나한테 생각이 있어.」

정말 생각이 있어서 한 말일까. 지금도 모르겠다.

케인은 새틴의 뒤를 쫓으며 쓰러진 소년을 흘끔 보았다. 바보같이 이 순간에 정신을 잃을 게 뭐란 말이지.

‘무능하기 짝이 없어.’

위기 상황이어서인지 새틴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안색은 점차 나빠졌다. 쿨룩거리기도 했다. 불이 너무 밝아 오히려 아무것도 보기 힘든 복도를 급히 빠져나가 도달한 곳은 부엌이었다.

부엌의 쪽문으로 나갈 생각이었을까. 그렇다면 정말로 운이 나빴다. 문은 털북숭이와 로빈의 몸뚱이로 가로막혀 있었다. 주변에 흩어진 푼돈을 보니 어찌 된 상황인지 뻔했다.

‘하여간 누구 하나 도움이 안 되지.’

나갈 길을 잃은 새틴이 풀썩 고꾸라졌다. 케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새틴에게 닿지 못하고 허망하게 스쳐 버렸지만, 새틴의 손끝에는 무언가 닿았다. 지하 수로 입구였다.

새틴은 간신히 입구를 열고 구르듯 계단을 내려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더듬어 걷다가 늙은이와 마주쳤다.

‘여기서 죽였어야 했는데.’

그 순간, 케인은 자신의 정신이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음을 알아챘다. 처음 여기에 발을 디뎠을 때와 다르게 당황하지 않았다. 이제 케인은 제가 확인하고자 했던 그 기억 속에 있다는 걸 안다.

‘여기서 끝이구나.’

새틴은 이 모든 기억을 떠올렸을까. 그럼 눈을 뜨면 새틴을 만날 수 있을까. 아마도 지금과 다르지 않을 테지만 앞으로 모든 것이 달라지겠지.

점차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새틴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네가 깜깜한 어둠 속에 있을 때, 그때 누군가 널 발견하고 구해 줄지도 몰라.」

그땐 코웃음을 쳤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말이야.」

이제는 믿는다.

∞ ∞ ∞

수많은 순간과 장면들은 한동안 사진의 모음 같더니 이윽고 필름처럼 이어지고 가속도가 붙으며 영화가 되었다.

새틴은 드디어 케인의 말을 이해했다. 케인이 새틴의 곁에 있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새틴 역시 케인을 놓을 수 없었다. 마땅한 관계였다.

살면서 누군가의 구원이었던 적이 있었나. 실낱같은 희망이었던 적이 과연 있던가.

새틴은 불길 속에서 무력한 케인을 찾아냈을 때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파출소의 문을 열었다가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던 순간을 생각했고, 지하실에 몰래 내려가려다 붙잡힌 순간을 생각했다. 사람을 죽이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 하수인이 될 수밖에 없던 어린 시절이 바로 지금이라고 소리쳤다.

타오르는 불 따위 두렵지 않았다.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다시 도망치는 것이다.

구할 수 있었다. 함께 나갈 수 있었다.

원오는 거인을 죽이고 살아남았다. 새틴은 그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케인이 그렇게 만들어 주었다.

이제 눈을 뜰 시간이다.

눈이 부시리만큼 새하얀 방이다. 케인이 새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틴?”

새틴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뻗어 케인의 뺨을 만졌다. 고개를 숙이느라 뺨에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만지니 따스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건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온기다.

새틴이 구한 소년이 어른이 되어 눈앞에 있다. 지금껏 새틴을 잊지 않았다.

“새틴, 괜찮아?”

걱정이 가득한 물음에 새틴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새틴은 누나의 말처럼 좋은 사람이 되었다. 누나의 세계에서 주인공을 구해 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이란 말인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겠지만 아무려면 어떨까.

이곳에서 새틴은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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