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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06화 (106/139)

106화

문이 열리고 보인 광경은 어딘지 비현실적이었다. 새틴은 곧 이유를 깨달았다.

‘모서리가 없어.’

바닥과 벽이 경계 없이 이어지고 벽은 천장에서 모여 작은 점이 되었다. 거대한 물방울 모양의 방이다.

새틴이 머뭇머뭇 안으로 들어가자 곧 케인도 뒤따랐다.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문이 저절로 닫혔다.

‘빛은 어디서 드는 거지?’

흘끔흘끔 주위를 살폈지만 광원다운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방의 모양이 아니라 근원을 찾을 수 없는 빛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사방이 환하고 사방으로 그림자가 졌다.

이 신성한 공간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있었다. 대신관과 리타, 그리고 에드워드였다. 세 사람은 허리 높이의 원탁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원탁은 그리 크지 않아 서로 간의 거리도 멀지 않았다.

“오셨군요.”

대신관이 지그시 웃으며 바라봐 새틴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예, 어제 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괘념치 마세요. 이쪽으로 오시죠.”

대신관의 손짓을 따라 새틴은 쭈뼛쭈뼛 원탁으로 다가갔다. 먼저 온 세 사람은 원탁의 한쪽을 비워 뒀는데 두 사람이 들어가기 적당한 공간이었다. 새틴이 먼저 자리를 잡자 그 옆에 케인이 섰다.

‘꼭 청문회장 같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제게 어려운 질문을 하러 온 게 아님을 알면서도 새틴은 약간 긴장하고 말았다.

그러자 리타가 바로 알아채고 물었다.

“새틴, 긴장했어? 얼굴이 엄청 하얀데.”

“글쎄, 잘 모르겠는데.”

새틴은 대답을 얼버무리며 뺨을 긁적였다. 새틴의 얼굴을 살피려고 리타가 목을 쭉 빼자 에드워드가 가볍게 핀잔했다.

“빛 때문에 하얘 보이는 겁니다. 지금 리타 씨도 엄청 하얘요.”

“아, 그래?”

“그리고 새틴 씨는.”

에드워드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았다. 눈에 띄게 어색한 표정 관리를 보고서야 새틴은 지금 리타와 에드워드가 어제의 일을 모른 척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여기서 미안하다는 말을 해 봤자 어색한 시간만 길어질 것이다.

‘그런 얘기는 이따 나가서 하는 게 낫겠지.’

대강의 인사가 끝났다 생각했는지 대신관이 원탁 위로 손을 올렸다. 새하얀 벽을 배경으로 한 노인의 모습은 어딘지 신묘하게까지 느껴졌다.

엄숙한 표정으로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이곳이 바로 말씀의 방입니다.”

말씀의 방. 무언가 의미가 있는 이름일 테지만 새틴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도 제 딴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신관의 손을 보고 있었다.

“신께서는 모두를 보시고, 또한 아무도 보지 않으시죠. 그렇기에 기도는 때로 이루어지고, 대체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신은 대부분의 일을 의도하지 않으십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존재 의의가 의심스러워지는 신이다. 무심결에 한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대신관이 희미하게 웃었다. 새틴은 재빨리 시선을 떨어뜨리고 아무 생각 안 한 척했다.

“아주 가끔, 신께서 의도하시는 일들이 있는데 그 의미를 한낱 인간이 알기는 어려운 일이죠.”

아마도 마신과 용사의 출현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새틴은 헛기침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서 침만 삼켰다.

“어쩌면 누군가는 알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대신관은 움찔 놀라는 새틴을 보고도 그저 웃을 뿐 무어라 덧붙이지 않았다.

“그럼 신께 말씀을 올리도록 할까요?”

그리고 다음 순간.

새틴은 어딘가에서 눈을 떴다.

∞ ∞ ∞

―어서 오십시오! 상위 차원의 존재여! 우리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폭죽이 터지고 팡파르가 울렸다. 온 세상이 무지갯빛이었다. 날아다니는 꽃가루가 하도 반짝여 눈이 아플 지경이다.

새틴은 눈을 비비며 앞을 보았다. 새하얗기만 하던 말씀의 방은 어디로 갔을까.

‘여기가 어디지.’

의문을 입에 담기도 전에 대답이 들려왔다.

―여기는 그대의 의식 세계입니다.

‘의식 세계?’

새틴은 저도 모르게 따라 하다가 뒤늦게 놀랐다. 생각을 읽힌 것도 놀랍고 지금 들리는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지 모르겠다는 것도 놀라웠다.

‘어디에서 얘기하고 있는 거야?’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지요.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

생각만 해도 될 텐데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목소리는 태연히 대답했다.

―설마 신이 단수이겠습니까. 물론 단 하나뿐이라는 말도 틀리진 않습니다만.

“신…….”

진짜 신이 곁에 있다니. 새틴은 긴장해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다. 이 괴이한 상황에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놀랍도록 마음이 편안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생각하자마자 신이 대꾸했다.

―그럴 수밖에요. 우리는 그런 존재이니까요.

“그런 존재라는 게 무슨 뜻인지…….”

―신이라는 건 붙여진 이름일 뿐, 우리는 사실 떠다니는 의식의 군집에 가깝습니다. 신이자 세계. 모두에게 깃들고,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죠. 그렇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신의 곁에 있으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니 두려움을 느낄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닌 모양이던데, 요.”

새틴은 슬그머니 존댓말을 붙였다.

―좋은 지적입니다. 허락된 일들이 있으나 대부분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마왕을 내려보내거나, 괴수들을 만들거나, 우리에게 가능한 일은 그런 이야기책 같은 일뿐이지요.

“아하…….”

왠지 이유를 알 듯도 했으나 새틴은 입을 다물었다. 이 세계가 실은 누나의 상상력에서 발현했다는 사실을 이 세계의 신이 듣고 기뻐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신은 새틴의 생각을 읽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세계는 그런 식으로 발현됩니다. 의식이 있는 누군가가 상상하고, 자격을 갖추었을 때 피어나지요. 우리는 우리를 탄생하게 한 이를 경외합니다. 그만한 자격을 갖추기란 우리에게 아직 불가능한 일.

“누나는, 누나가 당신을, 그쪽을, 저, 신님을 만드셨다는 걸 아신다고요?”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신이 경외하는 존재를 누나라 칭해도 될지, 신을 두고 신이라 불러도 되는지, 지금 존댓말을 맞게 쓰고 있는지.

신이 웃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그런 느낌이 들었다. 희미한 바람 따위가 스쳐 간 듯 불확실한 기척만이 남았다.

―따지자면 우리는 그분의 복제와 같습니다.

“뭐?”

미처 튀어나오는 의문사를 막지 못했다.

―그분의 의식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니 당연하지요. 그분이 어떤 의도로 이 세계를 만들었는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라졌던 꽃가루가 다시금 흩날렸다. 무지갯빛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어디서도 맡아 본 적 없는 향기가 난다. 꽃과도 꿀과도 다른 신묘한 향기는 새틴의 당황을 누그러뜨렸다. 누군가의 품에 단단히 안긴 기분이었다.

넋이 빠진 새틴의 귓가에 목소리가 다정히 얼렀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대에게 애정을 느끼고, 그대를 주의 깊게 살피고 싶은 욕구를 느낍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건 당신들의 마음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이건 아마 우리를 만든 분의 마음입니다. 그대를 아주 사랑하는 마음.

“누나의, 마음.”

편안하던 마음이 요동쳤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무얼 먼저 말해야 할지 우선순위도 가릴 수 없었다.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말들이 정말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목소리는 마치 그 복잡한 속내를 아는 양 말한다.

―어느 순간에도 달라지지 않는 마음이라니.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순식간에 북받쳐 올랐다.

누나의 마음을 아는 존재가 있다니. 이 세계에 떨어진 후 그 어디서도 누나의 흔적을 실감할 수가 없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지난 시간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다. 익숙하지만 낯선 이야기, 예상과 다른 사건들, 분명 제가 바라서 찾아온 곳인데 제가 있을 곳 같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는지 늘 의심했다.

누나를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었다면 이 먼 곳까지 오지 않았을 거다. 나고 자란 세계에서 가만히 죽음을 기다렸을 거다.

“누나가, 나는 누나가.”

‘없어서 나는, 살고 싶지 않다고,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 나는 어떻게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어. 정말로, 나는 아무런.”

‘미련이 없었는데.’

이곳에 이르러 누나를 아는 존재와 만나다니.

이것은 기쁨일까. 아니면 서러움일까. 원망? 허망함?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어떤 말도 직접 들을 수 없지만 감히 지금 그분이 하고자 할 말을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그분이 그대를 떠나는 순간 생각하신 것들이죠. 듣고 싶습니까?

듣고 싶냐고? 당연하잖아. 누나가 내쉬는 찰나의 숨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다시 한번 불확실한 기척이 느껴졌다. 웃음이다.

그리고 누나가 나타났다.

―삶은 좋은 거야, 원오야.

정말 누나의 모습이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옷차림. 목소리와 표정, 손짓마저 이다지도 익숙한데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스러져 버릴까 봐.

―함부로 죽을 생각 하지 마.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도 하지 마.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했잖아.

“나, 나는, 아직 좋은 사람이…….”

불현듯 깨달았다. 누나의 마지막 모습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누운 모습이 아니라 웃고 말하고 움직이던 누나가 어땠는지. 한 번도 떠올리려 하지 않아서 그만 잊어버렸다.

저절로 몸이 허물어졌다. 그저 누나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을 뿐임을 알면서도 그 발치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어, 어쩔 수 없었잖아…….”

서러운 변명이 저절로 나왔다.

인사도 할 수 없는 이별이었다. 뭐가 어떻게 되어 버렸는지도 실감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믿기지 않았다. 그러다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이 먼 세계로 떠나왔다. 여태 추모하지 못했다. 벌써 수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진짜 누나가 아니다. 누나는 이제 영영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렸다. 드디어 진정으로 인정했다.

그럼에도.

“왜, 이제야, 지금까지 나를 혼자.”

―두려워하지 마. 혼자가 되는 것도, 타인과 함께하는 것도.

“하, 하지만.”

―이제 그 어떤 나쁜 일도 너를 쫓아갈 수 없어.

누나의 손이 머리를 어루만졌다. 가짜였다.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따스하다. 머리카락으로, 피부로, 젖은 눈꺼풀 아래로, 울음을 삼키는 코와 목울대 안으로 따스함이 스몄다.

말로도 생각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건 원망이 아니었다. 허망하지도 않다.

누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듯 침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무지갯빛 꽃가루가 흩날렸다. 너무나 거대한 돌풍은 도리어 느리게 보였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텅 빈 공간이 허전하지 않았다. 마음속은 가득히 들어찼다. 이제 이 공간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북받침이 가라앉은 후 겨우 입을 뗐다.

“……고마워요.”

불확실한 기척과 함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를 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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