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이튿날, 새틴은 에드워드에게 받은 옷을 차려입었다. 옷자락이 길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혹시 바닥에 끌리지 않는지 신경이 쓰였다.
새틴이 연신 발치를 살피자 케인이 고개를 갸웃하다 물었다.
“왜 그래? 불편해? 자를까?”
“무, 무슨 소리야. 선물 받은 옷을 자르면 안 되지.”
케인도 비슷한 옷을 입었지만 새틴과 달리 옷자락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더러워지든 말든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정말 대범해. 주인공의 풍모…….’
새틴은 속으로 아무 말이나 중얼거리며 대신전에서 보낸 마차에 몸을 실었다.
대신전이 제공한 것은 옷과 마차만이 아니었다. 마중을 온 신관이 발목도 치료해 주었다. 눈 깜짝할 새 멀쩡해진 발목을 보며 의원이 필요 없겠다고 농담했더니 신관이 정색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질환은 신관이 치료할 수 없다나. 아마도 신관은 외상 전문인 모양이다.
아무튼 이제 더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새틴과 케인이 탄 마차가 긴 행렬을 이끌고 출발했다. 그리 효율적이지 않은 이동 방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새틴은 잠자코 있었다.
‘내 얼굴 좀 보겠다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실상은 사기꾼일 뿐이지만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용사의 행차다. 볼품없는 모양새가 되어서야 신전도 체면이 살지 않을 테다.
잘 닦인 길을 따라 마차가 이동하는 동안 케인은 별다른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새틴의 맞은편에 앉아 창밖을 물끄러미 보다가 가끔 새틴의 얼굴을 보았다.
‘기분은 괜찮아 보이네. 좋아 보이기도 하고.’
하기야 케인은 내내 오늘을 기다렸을 테니 기분이 좋을 만도 했다. 어제 새틴이 없어졌을 때는 얼마나 실망을 했을까.
새틴은 한숨을 삼키고 반대쪽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에 익은 풍경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다리가…….’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마차가 덜컹하더니 멈춰 섰다.
“가만히 있어.”
새틴이 뭐라 하기도 전에 케인이 경고했다. 그리고 문을 살짝 열어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마차 가까이서 말을 타고 이동하던 성기사가 다가와 상황을 전해 주었다.
“다리에 자갈이 흩어져 있습니다. 지금 정리하는 중입니다.”
새틴은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케인은 눈을 세모꼴로 치떴다.
“자갈? 미리 길을 살피지도 않고 출발한 건가?”
“살폈습니다만, 아까까지는 없던 것이라…….”
성기사가 머쓱해하기에 새틴이 케인을 말렸다.
“야, 왜 애먼 사람한테 그래.”
새틴이 멋쩍게 웃으며 성기사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성기사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눈치를 보다 물러났다. 문을 닫은 후 새틴은 케인을 타박했다.
“별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예민해.”
“난 늘 예민했어. 누구 덕분에 더 예민해졌고.”
“……오늘 점심 뭐 먹으려나.”
다리 정리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아까 이야기를 나눈 성기사가 문으로 다가오기에 이제 끝났나 했더니 아니었다. 조심스레 문을 연 성기사가 달라진 상황에 관해 전했다.
“용사님의 얼굴을 뵙고 싶어 일부러 자갈을 뿌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붙잡았으니 곧 출발할 겁니다.”
“아,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던 새틴은 불현듯 누군가를 떠올렸다.
“잠깐, 저 그 사람 얼굴 좀 봐도 돼요?”
“예?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요. 문제가 안 된다면 얼굴만 보고 돌아올게요.”
“……예의 없는 시민에게도 이렇게나 친절하시다니.”
성기사가 무언가 오해를 한 듯했으나 새틴은 구구절절 그게 아니라 설명하는 대신 조용히 웃었다. 성기사가 친절히 문 아래에 발판을 놓아 주었다.
당연하게도 케인은 새틴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굳이 내려야겠어?”
“얼굴만 볼 거야. 확인할 게 있다니까.”
“확인하긴 뭘 확인한다고. 널 죽이려는 암살자일지도 몰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새틴이 픽 웃자 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암살자라는 말은 역시 그냥 해 본 말이었는지 더 들먹이지 않았다.
케인이 먼저 내려 주위를 살핀 후에야 새틴도 내릴 수 있었다.
마차 안에 있을 땐 몰랐는데 바깥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멈춘 행렬 주변에 행인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새틴의 얼굴을 보고 “용사님!” 하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성기사들이 막고 있어 새틴의 근처까지 다가오지는 못했다.
괜히 내렸나.
새틴은 약간 후회하며 행렬 앞쪽으로 향했다. 이미 정리가 끝난 다리 위는 깨끗했다. 다리 바로 앞에 문제의 시민이 있었다.
성기사들에게 붙잡힌 채 무어라 항변하던 남자는 새틴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새틴은 이마를 짚었다.
‘아, 진짜냐고…….’
어제 새벽 영빈관의 담을 넘다 실패한, 그리고 다리 다친 새틴에게 용사의 마차를 습격하자고 제안한 그 남자였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남자는 이내 상황을 파악했는지 꽥 소리를 질렀다.
“용사님!”
새틴은 눈을 굴리다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용사님! 어딜 가시나이까!”
‘아, 말투 왜 그러는데…….’
새틴은 후다닥 마차로 돌아왔다. 재빨리 마차에 올라 문을 닫기 전 생각나는 것이 있어 근처에 있는 성기사를 불렀다.
“예, 부르셨습니까?”
“죄송한데 저 돈 좀 빌려줄 수 있어요?”
“예?”
“큰돈은 아니고 제가 저 사람 물건을 쓴 게 있어서.”
남자의 집에서 훔친 로브는 어제 영빈관으로 돌아왔을 때 폐기됐다. 폐기하는 과정을 보진 못했으나 확신할 수 있다. 어쩌다 이런 구질구질한 몰골이 되었느냐며 가져간 직원이 다시 가져다줄 리 없다.
공무 중이라 가진 돈이 별로 없는지 성기사가 쭈뼛거리며 품을 뒤졌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네, 충분해요. 이따 영빈관에 돌아가면 꼭 줄게요.”
“괜찮습니다. 그럼 저자에게 이 돈을 가져다주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아는 분이시면 놓아주라고 말을 전할까요?”
“아.”
새틴은 잠깐 눈을 굴리다 떠올렸다. 이 세계의 신전은 죽은 사람에게 천국에 가란 기도도 안 해 주는 곳이다. 살아서 잘했다면 응당 천국에 갈 테고, 잘하지 못했다면 그렇지 않을 거라며.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아 마땅하다.
“아뇨, 벌은 받아야죠.”
∞ ∞ ∞
대신전 앞에 잔뜩 모인 사람들을 보고도 새틴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제 대충 적응했다. 사람들은 다들 용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한다.
‘나 말고 세상을 구한 용사가 또 있다고 하면 어떤 놈인지 나도 궁금할걸.’
물론 의아한 점이 좀 있긴 하다. 용사 옆에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있으면 그쪽으로 눈을 돌려야 하지 않나.
‘여기 사람들은 심미안이 좀 다른가?’
새틴은 케인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속으로 고심했다. 금발에 푸른 눈의 미남이 흰옷을 입고 있으니 성화에 나와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성스러웠다. 알맹이가 신이며 종교에 아무 관심 없는 걸 아는데도.
시선을 눈치챈 케인이 툭 물었다.
“왜 그렇게 봐?”
“아니, 그냥.”
“싱겁긴.”
영빈관에서 출발할 때부터 기분이 좋아 보이던 케인은 지금도 상당히 너그러웠다. 다른 때 같았으면 새틴이 무언가 탐탁잖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했을 텐데 지금은 별말 안 한다.
처음 방문했을 때처럼 어린 신관들이 길을 안내했다. 신전 앞에 모인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멀어져 끝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고요해지니 비로소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긴 복도는 온통 새하얬다. 상앗빛 기둥들이 오전의 환한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그림자 진 곳도 어둡지 않았다.
새틴은 반쯤 넋이 나간 채 신관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넋이 빠진 것도 케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알았다.
“긴장하지 마.”
“아, 응.”
케인이 알아챌 정도로 티 나게 긴장하고 있었다니. 새틴은 침을 삼키고 눈에 힘을 줬다.
마침 일전의 홀 앞을 지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업적(사기지만)을 인정받던 때와 비교하면 오늘의 일정은 별것도 아니다.
‘별것도 아닌 건 아니지.’
말씀의 방에 들어갔다 나온 다음에는 일정이 없다. 아마 신전 측에서 준비한 오찬에 참석하지 않을까. 오찬을 마치고 나면 영빈관으로 돌아갈 거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원래의 생활로 돌아간다.
새틴에게 원래의 생활이란 케인을 만나기 전의 생활을 뜻했다. 어쩌면 리타나 에드워드와는 교류를 이어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케인과는 끝이다.
‘마음이 허하네.’
케인은 새틴이 과거를 기억해 내지 못하는 일 따위 있을 리 없다 생각했겠지. 그러니 그리 자신만만하게 헤어진다는 소리를 했을 터.
하지만 새틴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 케인의 믿음은 틀렸다.
케인으로서는 그 믿음이 당연하겠지만, 만약의 가능성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 새틴은 섭섭했다. 케인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니어도, 그래도 그동안 함께 지냈는데. 지금의 새틴에게도 조금은 정이 들었을 줄 알았는데.
‘아니, 물론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함께 지냈겠지만.’
속이 시끄러웠다. 케인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동정하고, 케인에게 섭섭함을 느끼다가 스스로를 책했다. 의도한 건 아니라고 변명해도 결과를 생각하면 의도가 무엇이 중요한가 싶고.
새틴이 속앓이를 하든 말든 결전의 순간은 다가오고 말았다.
“도착했습니다.”
앞서 걷던 신관들이 좌우로 갈라져 섰다. 새틴은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그렇게 크진 않네.’
홀처럼 커다란 문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작은 문이 두 사람을 맞았다. 신관들이 열어 주지 않는 걸 보니 직접 밀고 들어가야 하는 모양이다.
새틴은 다소 뻣뻣한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었다. 늘 리타의 뒤를 따라 걷던 터라 맨 앞에서 걷기가 영 어색했다. 케인은 새틴을 앞질러 나오지 않았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케인이 의아해했다.
“안 열어?”
“……열어야지.”
새틴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