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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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내일 대신전에 가실 예정이니 간단한 처치만 했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그래도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바로 대신전에 연락을 넣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새틴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신관까지 부를 일은 아니었다. 대단한 일을 하다 다친 것도 아니고 밤중에 창문을 넘다 삐끗했을 뿐이다. 이제는 발목보다 까진 손바닥이 더 신경 쓰일 정도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치료를 마친 직원이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새틴은 이제야 시간을 확인했다. 영빈관의 모든 객실에는 장식을 겸한 시계가 놓여 있었다.
‘여덟 시간 정도네.’
머릿속으로 시간을 헤아린 새틴은 속으로 혀를 찼다.
기껏 도망을 친답시고 나가 있던 시간이 겨우 여덟 시간이라니. 블랙 기업에 다니지 않는 평범한 직장인의 근무 시간이 아닌가. 그것도 점심시간을 뺀.
너무나 하찮은 성과에 적잖이 속이 쓰리다. 그런 새틴의 속도 모르고 마신이 헛소리를 했다.
―용사님, 제 생각엔 우정을 위해 잘못했다고 비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친구분은 용사님을 아주 좋아하는 듯하니 역시 용사님이.
“조용히 해.”
―네…….
싸늘한 타박에 마신이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케인이 들어왔다.
“치료는 끝났어?”
케인은 아무 일 없던 양 태연한 어조로 물었지만 새틴은 대답하지 못했다. 저절로 어깨가 오그라들었다.
‘눈이 약간 돌았는데.’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원래도 케인은 분리 불안이 있었다. 오늘 일은 분리 불안을 더 심하게 만들면 만들었지 나아지게 하진 않았을 터다.
‘차라리 아예 없어졌으면 포기했을 텐데 이래서야 역효과지.’
어디 묶어 놓겠다고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새틴이 눈치를 보고 있으니 케인이 성큼 다가와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새틴이 받침에 올려 두었던 다리를 내리려 하자 괜찮다며 붙잡았다. 그리고 손을 뗄 줄 알았더니 그대로 어루만진다.
“아파?”
“아니, 괜찮아.”
단단히 동여맨 자리를 어루만져 봤자 아무 느낌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기가 껄끄러웠다. 당장에라도 케인이 “그럼 안 괜찮게 해 주지.” 하며 발목을 뚝 분지를 것 같다. 정말 그럴 리는 없지만 눈빛이 그랬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새틴은 골머리가 아팠다. 케인과 단둘이 있던 적이 셀 수 없이 많은데 지금은 마치 모르는 사람을 앞에 둔 듯 불편했다.
다행히 케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디까지 갈 셈이었어?”
“음, 그건 생각 안 해 봤는데…….”
“내가 전에 한 말은 잊어버렸어?”
무슨 말?
새틴이 눈을 껌벅이자 케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난 너하고 헤어질 마음이 없다고 했잖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그랬지.”
새틴은 어설프게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에게 헤어질 마음이 없다 해서 새틴이 꼭 케인의 옆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의 생각이 있고, 바라는 바가 있다. 때로 그 바람은 상충된다.
이번 시도는 실패했지만 만약 새틴이 더 철저히 계획을 세워 아무도 모를 곳에 숨어 버린다면 그땐 케인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이별을 받아들여야지.
새틴의 다리를 들여다보던 케인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쳤다.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속을 읽었나.
새틴이 대꾸하지 못하자 케인이 다시 미소 지었다.
“오늘 안에 너를 찾지 못하면 여기에 불을 지를 생각이었어.”
“뭐?”
“다음엔 건너편에 불을 지르고, 그다음엔 또 그 건너편에 불을 지르는 거지. 그러다 보면 너도 돌아왔겠지.”
“……농담이지?”
“좋을 대로 생각해.”
“아니, 여기서 무슨 좋은 게 있다고 좋을 대로 생각을 하래.”
새틴이 기가 막혀 인상을 쓰자 케인이 여태 어루만지던 발목을 꽉 쥐었다. 새틴이 움찔하자 바로 힘을 뺐지만 놓아주지는 않았다.
케인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한숨보다는 심호흡으로 보였다. 무언가를 꾹 눌러 참듯 심호흡한 케인이 물었다.
“기억을 찾는 게 무서워서 도망친 거지?”
“비슷한데…….”
기억을 찾는 게 무서울 이유가 없다. 기억을 찾는다는 과정 이후가 걱정됐을 뿐이다. 아무것도 찾지 못할 테니까.
“그럼 기억을 찾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도망치지 않을 거야?”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새틴은 케인을 물끄러미 보다가 되물었다.
“기억이 없는 내가 너한테 무슨 의미가 있어?”
“너야말로 지금 농담해?”
케인은 황당해하지만 새틴은 진심으로 한 말이다.
“케인, 넌 이런 의심 안 해 봤어? 내가 사실은 네가 아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겉모습만 닮은 전혀 엉뚱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해?”
“어떻게 확신하냐니. 아니니까 아닌 거지.”
케인은 가정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애가 타는 사람은 새틴뿐이다.
“마법이나, 아니면 뭔가 아주 신기한 그런 힘으로 알맹이가 바뀌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내 말은, 이 몸은 네가 아는 그 사람이지만, 사실은.”
더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새틴은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새틴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만은 더 나쁜 사람이기를 바랐다. 제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태연히 손에 쥘 만큼만, 딱 그만큼만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케인이 행여 사라질까 안절부절못하는 진짜가 되고 싶다.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될 수 없는 걸 알지만 바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나.
신은 과연 이런 소원도 이루어 줄까.
가만히 머리꼭지를 바라보던 케인이 물었다.
“너도 모르는 거 아니야?”
“……그렇지.”
사실은 알지만 안다고 할 순 없어서 새틴은 고개를 주억였다. 케인은 가만히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제안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뭘 해.”
“일단 기억을 찾아 보고, 그때도 네가 아니라고 하면 헤어지자.”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새틴은 슬쩍 고개를 들어 케인의 표정을 살폈다. 케인은 내리뜬 눈으로 새틴의 발목을 보고 있었다. 새틴이 대답하지 않으니 케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응?”
새틴은 케인의 표정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왜 웃지?’
웃을 만한 얘기는 하지 않았는데.
새틴이 머뭇거리자 다시금 케인이 채근했다.
“어떡할 거야?”
“……알았어.”
∞ ∞ ∞
사과가 사실 사과가 아닐 가능성은? 살구가 사실 살구가 아닐 가능성은?
‘0이지.’
케인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새틴은 새틴이다. 그 자신이 확신하지 못해도 케인은 확신한다.
다만 케인은 의아한 점이 하나 있었다.
‘기억을 찾기가 무서운 게 아니었어.’
케인이 보기에 새틴은 도리어 기억을 찾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 지금처럼 기억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기억을 찾을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아무것도 찾지 못할까 봐.
‘왜 그런 게 무섭지?’
케인은 잠든 새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계속 들여다보면 언젠가는 답이 보이지 않을까.
‘그럴 리가.’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다. 언뜻 웃는 표정 같기도 했다. 꼬리가 내려간 눈, 반대로 꼬리가 올라간 입. 가만히 있어도 웃는 듯 보이는 얼굴에 사람들은 종종 속았다.
새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자 한다면 태연한 표정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리타는 새틴의 과거에 관심이 없다. 리타와 처음 만났을 때 새틴은 이미 기억을 잃은 후였다. 리타는 오직 기억을 잃은 후의 새틴만을 안다. 과거에 새틴이 어땠는지 관심 가질 이유가 없다.
에드워드는 리타보다야 관심이 있겠지만 대단한 정도는 아니다. 에드워드 자신이 관여한 사건 이후로 기억을 잃었다 하니 책임감을 조금 느낄 뿐이다. 하지만 사실 에드워드의 책임은 아니다.
새틴의 기억에 가장 관심이 많은 사람은 역시 케인이다. 케인은 새틴이 기억을 잃기 전을 알고, 그 시절을 추억한다.
답이 나왔다.
‘나 때문이야.’
새틴이 기억을 찾아도 찾지 못해도 아무 상관 없는 리타. 새틴이 기억을 찾으면 좋겠지만 못 찾아도 상관은 없는 에드워드. 새틴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오직 케인만이 새틴이 기억을 찾기를 갈망한다.
‘내가 실망할까 봐 두려웠던 거야.’
사람이 누군가의 반응을 신경 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경쟁의식을 느껴서, 잘 보이고 싶어서, 좋아해서, 혹은 싫어해서, 복수하고 싶어서.
설마하니 새틴이 케인에게 경쟁심을 느꼈을 리는 없다. 케인을 싫어했던 것 같지도 않다. 복수심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새틴은 케인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케인이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닌가.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원하는 모습이 되고 싶어 한다. 케인 또한 새틴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다. 새틴도 케인처럼.
‘새틴이 나를 좋아해.’
케인은 스스로 한 생각에 놀라 눈을 부릅떴다.
새틴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새벽부터 엉뚱한 짓을 하더니 피로가 쌓였는지 아직 창밖이 훤한데 잠자리에 들었다. 이렇게 깊이 잠든 모습은 마왕성에서 돌아왔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잠깐 망설이던 케인은 조심스레 새틴의 얼굴을 만졌다. 그 순간, 케인은 목덜미에 열기를 느꼈다.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고 주위를 살폈다.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정체 모를 열기는 점점 올라가 이제는 온 얼굴이 뜨거웠다.
‘새틴이 나를 좋아해.’
기억을 잃기 전 케인과 새틴은 친구였다. 둘 사이에는 특별한 유대가 있었다. 그런데 기억을 잃고 이렇게 또.
문득 의아해졌다.
‘그게, 이거랑 같나?’
케인은 새틴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내려간 눈꼬리와 올라간 입꼬리. 그저 그렇게 생겼을 뿐인데 마치 케인을 보며 웃는 듯했다.
케인은 몇 차례 눈을 껌벅이다 급한 걸음으로 새틴의 침실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