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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98화 (98/139)

98화

있지만 에드워드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다. 말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테고. 새틴은 억지로 웃으며 둘러댔다.

“사실은 아직 소원을 생각 못 했어.”

“꼭 소원을 빌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앞으로 건강하게 지내게 해 달라고만 해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나.”

볼일을 마친 에드워드는 오래 머무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전에서 지내고 있는 에드워드는 내일 아침에도 새틴보다 훨씬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케인 씨에게도 내일 보자고 전해 주세요.”

“응, 그럴게.”

에드워드는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새틴은 예의를 아는 사람이라 현관까지 배웅하기로 했다. 새틴보다 더 예의에 밝은 영빈관 직원들은 가까이 오지 않고 좀 떨어진 데서 두 사람을 따라왔다.

회랑을 지나 현관의 홀에 거의 이르렀을 때 에드워드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들어오면서 보니 영빈관 경비가 그리 삼엄하지 않더군요. 혹시 모르니 경비를 늘려 달라고 얘기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경비?”

“예, 귀한 손님이 있는 곳에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마련이니까요.”

새틴이 대꾸하지 않고 설핏 눈살을 찌푸리자 겁을 먹은 줄 알았는지 에드워드가 얼른 덧붙였다.

“꼭 나쁜 의도가 아니라도 말입니다. 대신관님을 보려고 몰래 신전에 숨어드는 열성 신자들이 종종 있다고 들었거든요. 새틴 씨도 조심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생각도 못 했네.”

“이제 이전과 똑같이 생활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수도 안에서는요. 모두가 새틴 씨를 알고 숭배하니까요. 조금 불편하긴 할 겁니다.”

“너는 어때?”

새틴이 되묻자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야 거의 신전 안에 있으니 시민들과 만날 일은 별로 없죠. 하지만 새틴 씨와 케인 씨는 조심하세요. 만인의 사랑이란 게 꼭 달갑지만은 않은 법이니 말입니다.”

“케인은 만인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긴 하지. 난 늘 걔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어.”

“하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새틴 씨뿐일 겁니다. 아무튼 잊지 말고 경비대장하고 얘기하세요.”

새틴은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 ∞ ∞

영빈관에 처음 와서 침실을 배정받았을 때 케인은 몹시 탐탁잖아 했다. 새틴과 다른 방을 써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새틴은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때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케인의 분리 불안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사람들은 용사와 친구들이 끈끈한 우정으로 엮인 사이라고 생각할 텐데 그 환상을 깨긴 미안했다.

어쨌든 다행이다. 그때 케인의 고집을 따라 같은 방에 묵었더라면 이렇게 밤중에 탈출극을 찍지는 못했을 테니.

새틴이 묵는 방은 3층이라 창문으로 뛰어내리기는 무리였다. 물론 2층이었더라도 새틴은 뛰어내릴 생각이 없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다. 새틴은 영화와 소설, 만화에서 흔히 본 방식을 이용해 도구를 만들었다.

침대 시트와 커튼을 이어 만든 로프는 꽤 튼튼했다. 새틴은 한 번도 레펠 강하를 해 본 적이 없지만 매듭 부분에 발을 걸고 내려가면 그럭저럭 안정적으로 내려갈 수 있을 성싶었다. 어지간히 둔한 몸이 아니라면 별일 없겠지.

그리 생각하니 의문이 든다.

‘내가 체육을 잘했던가?’

중학생 때 체육 수업을 하던 기억을 떠올려 보지만 너무 오래돼서 가물가물했다. 사실 그 시절의 일은 무엇 하나 또렷하지 않기도 하고. 아무튼 둔해 빠졌단 소리를 들은 적은 없다.

새틴은 로프의 한쪽 끝을 침대 다리에 묶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창문을 열었다. 로프를 밖으로 늘어뜨리기 전 어떤 경로를 이용할지 확인했다.

영빈관 현관에서 대문까지 가는 도로는 일직선이었다. 마차가 오가야 하기에 폭이 꽤 넓어 가로등의 간격도 조밀했다. 당연히 아주 환하다.

그러나 빛이 강할수록 어둠 또한 짙게 느껴지는 법.

‘정원을 지나서 가면 되겠어.’

도로에 비하면 정원은 무척 어두웠다. 도로의 빛 때문에 더 어두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정원에는 가로등은 물론이고 순찰하는 사람조차 없는 것 같았다.

‘저런 데서 램프도 없이 순찰을 하진 않겠지.’

그렇다면 정원수와 어둠 사이에 몸을 감추고 담장까지 가기도 그리 어렵진 않으리라.

새틴은 로프를 조심스레 창밖으로 늘어뜨렸다. 비장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자마자 당황했다.

‘어, 좀 짧은가?’

넉넉할 줄 알았던 로프는 예상외로 길이가 조금 모자랐다. 2층과 1층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새틴의 짐작보다 건물의 층고가 높은 탓이다.

잠깐 망설인 새틴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면 뛰어내릴 수 있어.’

로프 끝에 매달려 뛰어내리면 괜찮을 것 같다.

새틴은 내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상태를 점검했다.

영빈관에서 제공해 준 옷이 아닌 처음에 입고 온 옷으로 갈아입었고, 얼마 안 되는 소지품도 챙겼다. 소지품이라고 해 봐야 자질구레한 잡동사니 몇 개에 돈 몇 푼뿐이긴 하다. 수도까지 오는 동안 돈 쓸 일이 없어 고스란히 남았다.

‘좋아, 가자.’

새틴은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로프에 매달렸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너무, 힘든데?’

얼기설기 만든 로프는 매듭 외에 붙잡을 데가 마땅치 않았다. 손에 무리하게 힘이 들어갔다. 요령 좋게 체중을 분산시키지 못하고 오롯이 손아귀 힘으로 버티려니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다.

그러나 방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낙장불입이다. 매달려 있기도 힘든 판에 다시 올라갈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망했어.’

새틴은 거의 미끄러지듯 로프 끝까지 내려왔다. 마지막 매듭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썩 볼품없는 자세로 착지했다. 간신히 엉덩방아는 피했지만 발목이 시큰했다. 상상과 실제의 차이를 새삼 실감했다.

그래도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새틴은 재빨리 정원수 사이로 몸을 숨겼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풀벌레 울음소리뿐인 고요한 밤이다. 새틴은 낙하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소리 없이 걷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잘 있어, 케인. 분리 불안은 분명 나을 수 있을 거야.’

분리 불안만 나으면 케인에게는 아무 부족함이 없다. 용사는 되지 못했어도 용사의 동료가 됐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케인을 존경하고 흠모할 것이다. 그리고 새틴의 기억을 되찾게 해 달라고 비는 대신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소원을 빈다면 정말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마지막으로 케인이 묵는 방 창문을 한번 올려다본 후 새틴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정문으로는 당연히 나갈 생각이 없었기에 새틴은 담을 따라 돌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작은 문을 발견했다.

‘짐작대로야.’

본디 이 건물은 왕실 별장이었다고 했다. 규모 있는 식당만 봐도 손님과 직원 출입구를 분리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하물며 여긴 계급제 사회다. (그런 점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을지라도.) 왕족과 고용인들이 같은 문을 이용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새틴은 이 건물에 분명 용도별로 여러 문이 있을 거라 짐작했고,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새틴은 로프에 쓸려 쓰라린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나쯤은 예상대로 돼서 다행이네.’

에드워드의 말대로 영빈관의 경비는 그리 삼엄하지 않았다. 작은 문을 지키고 선 두 명의 경비병은 가만히 있기가 지루한지 잡담을 하며 연신 몸을 꼼지락거렸다. 문 주위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당당히 저들을 지나 문을 열 수는 없다. 어딜 가냐 물으면 뭐라 하겠는가. 여긴 편의점도 없으니 둘러댈 핑계도 마땅찮다.

‘어떻게 따돌리지.’

시간이 넉넉히 있었다면 상세한 계획을 세웠을 텐데 갑자기 탈출을 하려다 보니 하나같이 얼렁뚱땅 어설프다.

새틴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운 좋게도 경비병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웠다. 멀지 않은 데서 담을 넘으려던 괴한 때문이었다.

“침입자다!”

괴한은 경비병의 외침에 놀라 바깥으로 떨어졌다. 경비병들은 서둘러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새틴도 재빨리 문을 빠져나갔다. 경비병들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운이 좋은데?’

∞ ∞ ∞

‘운이 좋기는…….’

달리다 보니 왼쪽 발목이 시큰거렸다. 로프에서 떨어질 때 받은 충격이 이제야 오는 모양이었다.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나 힘이 실릴 때마다 저릿저릿했다.

새틴은 주위를 둘러보고 속도를 늦췄다. 주변에는 크고 작은 저택뿐 상점가는 보이지 않았다. 늦은 시간 때문인지 사람도 안 다닌다.

보는 눈도 없는데 무리해 달릴 필요는 없었다. 물론 는적거릴 생각도 없지만.

‘아침이 되기 전에 빠져나가야 해.’

아침이 되어 새틴이 몰래 빠져나간 사실이 밝혀지면 당연히 누군가는 찾으려 들 터. 어쩌면 납치되었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새틴이 도망치는 이유를 모르니 그편을 더 그럴듯하다 여길 수도 있다.

문득 걱정이 들었다. 친절하게 대접해 준 영빈관의 직원들이 이 일로 불이익을 받으면 어떻게 하지.

‘편지를 써 둘 걸 그랬나.’

잠깐 후회가 되었지만 이내 새틴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편지에 진짜 이유는 적지 못한다. 떠나야 하는 이유를 이리저리 둘러대 봤자 조작된 것이라고 누군가 주장하면 부정할 방법도 없다.

‘난 정말 무책임한 인간이야.’

스스로 비난하면서도 애써 합리화했다. 날이 밝은 후 대신전에서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느니 지금 실종되는 게 낫다. 모두 충격은 받더라도 배신감은 느끼지 않을 것이다. 특히 케인이.

새틴은 우울한 한편 홀가분했다. 목적지가 없다면 길을 잃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처럼 아무거나 하며 살 생각이다.

클로버랜드 말고, 할아버지와 살던 마을 말고. 어딘가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하는 거다. 이야기는 끝났다. 이곳은 이제 다크에이지의 세계가 아니라 그저 세계일 뿐이다.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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