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거대한 사기극에 휘말린 기분이다.
‘아니, 그런 기분인 게 아니라 진짜 휘말린 거지.’
색상 코드 #FFFFFF보다 성스러운 백색의 빛은 마신을 물러나게 했을 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을 치유했다. 리타도 에드워드도, 그리고 케인도 상한 데 없이 무사했다. 심지어 리타가 말하길 어릴 때 생긴 작은 흉터까지 사라졌다고 한다.
“뭔가 찜찜해.”
케인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새틴은 필사적으로 못 들은 체했다.
리타는 기절해 있던 터라 새틴과 마신이 부딪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에드워드는 그 말도 안 되는 싸움을 봤지만 그저 신께서 계획을 모두 이루신 모양이라며 이해했다. 케인만이 찜찜함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만세! 만세!”
“이쪽 봐 주세요! 이쪽이요!”
“아아악! 용사님!”
새틴 일행은 현재 지붕 없는 마차로 대신전까지 이동 중이었다. 해가 떨어졌는데도 수많은 사람이 나와 마차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었다.
새틴은 차가운 손을 허벅지에 문지르며 속으로만 탄식했다.
‘무대 공포증 걸릴 거 같다, 진짜…….’
돌아가는 길이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마신을 무찌른 후 새틴 일행은 남서문 출입소장과 접촉했다. 소장은 기다렸다는 양 마차를 끌고 왔는데 아까 타고 온 마차가 아니었다. 사정이 있으려니 싶어 일단 올랐다. 지붕 없는 마차라 해도 마차니 걷느니보단 나을 터였다.
마차는 남서문을 지나 수도로 귀환했다. 남서문 앞에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마차 뒤를 따르면서부터 행렬이 되었다.
새틴은 그때에야 대신관이 준비해 두겠다던 환영식을 떠올렸다. 클로버랜드에서 본 행진도 생각났다.
“용사님!”
“만세! 만세!”
새틴은 차마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내내 무릎만 보고 있었다. 에드워드도 이런 상황이 다소 멋쩍은지 좌불안석이다. 케인은 그나마 태연했고, 리타는 신이 났다. 관심을 즐기는 톱스타처럼 마차 밖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용사님이 이쪽을 보셨어!”
‘안 봤어…….’
“용사님! 손 흔들어 주세요!”
‘흔들겠냐고…….’
“용사님! 아악!”
‘죽겠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행진은 대신전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따라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의 환성을 들으며 새틴 일행은 대신전으로 들어섰다.
환영 인파는 대신전 안에도 있었다. 바깥의 사람들과 차이가 있다면 질서정연하다는 점뿐이다.
‘대신관은 정말 한 치의 의심도 안 한 건가?’
늘어선 신관들은 급히 준비를 하고 나온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예행연습이라도 한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새틴 일행을 안내했다.
첫 방문 때와 달리 이번에 대신관이 일행을 기다리는 곳은 아주 넓은 홀이었다. 잘은 몰라도 중요한 행사를 할 때에나 쓰는 곳으로 보였다. 실제로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환영식이 퍼레이드로 끝이 아니었어?’
쉴 새 없이 눈을 굴리는 새틴을 보고 리타가 귀띔했다.
“대관식을 할 때나 쓰는 곳이야. 웅장하지?”
새틴은 감탄도 하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옆에서 에드워드가 감동해서 무어라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리타가 돌연 픽 웃더니 놀리듯 속삭였다.
“너도 긴장을 하는구나.”
케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케인은 대꾸 없이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지만 리타는 발끈하지 않았다. 오히려 활짝 웃었다. 늘 얄밉게 굴던 케인을 놀릴 수 있어 기쁜 모양이었다.
줄지어 걷던 신관들이 일시에 갈라졌다. 넓은 홀에 순식간에 통로가 생겼다. 여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붉은 카펫도 깔려 있었다.
‘토할 거 같아…….’
더 이상 신관들은 안내를 하지 않았으나 일행은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늘 그렇듯 리타, 에드워드, 새틴, 그리고 케인의 순서로 카펫을 밟았다.
드넓은 홀에 네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렸다. 새틴은 바짝 굳어 눈을 굴리지 못하고 삐걱삐걱 걸었다. 곁눈으로 본 신관과 관람객(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들은 하나같이 진중한 표정이었다.
‘대신관에게 정황을 다 듣진 않은 모양이네.’
마신이고 나발이고 모두 연극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면 경건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오지는 못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무게 잡은 사람들 또한 바깥의 시민들과 다를 바 없이 보였다.
양심이 따끔거려 새틴은 고개를 바로 들지 못하고 바닥을 보며 걸었다.
넓은 홀이지만 결국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리타는 곧 홀의 가장 깊은 곳, 대신관이 서 있는 단 앞에 도달했다. 리타는 그 자리에 멈춰 서지 않고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이쪽으로 서시죠.”
에드워드가 리타의 옆에 서며 새틴에게 속삭였다. 새틴은 엉겁결에 그 말을 따랐다. 마지막으로 케인이 새틴의 옆에 섰다. 대신관의 앞에 네 사람이 나란히 선 모양이 되었다.
‘아, 이런 장면 많이 봤는데.’
경찰이 주인공인 영화나 드라마에서 모든 사건이 해결된 후에 꼭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과 동료들이 표창을 받고 특진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배경 음악으로는 빠밤빠밤 하는 신나는 곡이 나온다.
무대 공포증을 잊으려 딴생각을 하던 새틴의 앞에 대신관이 다가와 섰다.
“용사님, 고개를 드시지요. 용사님을 환영하는 자리입니다.”
새틴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대신관의 머리 뒤로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가 보였다. 대신관을 처음 만난 곳에도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지만 이렇게 크지는 않았다. 이미 밤이라 성스러운 빛은 들지 않았지만 새틴은 그 규모에 압도되었다.
대신관은 새틴에게 대본 없는 연기를 시키지 않고 참석자들을 향해 말했다.
“지난 며칠간 우리 수도 시민들을 비롯한 이 나라의 많은 국민들이 심려로 잠들지 못했습니다. 악마의 숨결이 우리 도시를 침범하려 했기 때문이지요.”
악마의 숨결이라 부르니 수상한 연기라고 부를 때보다 훨씬 강력하게 느껴졌다. 남들이 듣기에도 그러한지 사람들이 부산히 손을 모으고 어떤 모양을 그렸다.
‘저게 성호인가 보구나.’
새틴은 흘끔 보고 눈치로 파악했다. 에드워드도 이따금 저런 행동을 하곤 했다.
“저 역시 불안해하였으나 신께서는 걱정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마왕이라 자칭하는 자가 클로버랜드 지방을 혼란하게 했을 때도, 반인반수의 괴물들이 선량한 사람들을 겁먹게 하였을 때도 신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었듯 이번에도 그리할 것이라고 하셨지요.”
대신관의 말이 길어졌지만 지루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말씀대로 신께서는 시련을 극복할 검을 보내셨습니다. 용사라는 검으로 신성한 불꽃을 일으켜 신을 참칭하는 악을 물리치셨습니다. 모두가 보셨을 겁니다. 보지 못하셨다 해도 들으셨을 겁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사이비 같았다. 불경한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새틴은 얼굴 근육에 힘을 주었다.
“만약 이 자리에 신의 검을 부정하는 이가 있다면 손을 들고 나오십시오.”
사람들을 두루 보며 대신관이 하는 말에 새틴은 어이가 없어졌다. 여기서 손을 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아니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가끔 성공하고 대부분은 소외된다.
“모두가 합의하셨기에 저는 주장합니다. 신의 검이자 선택받은 사람인 용사와 그 동료들은 마땅히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신께 돌아가는 날까지 존중받을 것이며 우리는 오늘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연설인지 설교인지 훈화인지 모를 발표는 이제 끝나 가는 분위기다.
“신과 신자의 다리이자 신의 대리인으로서 저는 이 자리에서 용사와 그 동료들에게 수고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대신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테인드글라스가 빛났다. 태양이 보이는 시간이 아닌데 홀이 영롱한 빛에 감싸였다.
미리 말을 맞춰 조작한 퍼포먼스는 아닌지 대신관의 얼굴에 희미하게 놀란 기색이 비쳤다. 사람들 또한 기현상에 놀라 술렁였다.
“신께서 이 자리를 축복하시는군요.”
금세 태연함을 되찾은 대신관이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그럼 이제 기도합시다.”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울렸다. 웅장한 음악이 홀을 채우고 모두가 손을 모았다. 새틴은 대신관이 눈을 감는 모습을 보고 얼결에 따라서 눈을 감았다.
‘다들 기도하나?’
생전 교회에든 성당에든 가 본 적이 없는 새틴은 살그머니 눈을 뜨고 흘끔 좌우를 살폈다. 리타와 에드워드는 눈을 감고 있지만 케인은 멀뚱히 새틴을 보고 있었다.
케인의 입 모양이 물었다. 피곤해?
새틴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아니.
피곤하지는 않았다. 다만 걱정이 될 뿐이다.
이제 다크에이지의 주요 사건은 모두 끝났다. 전제부터 틀어졌다 한들 많은 부분이 동일하였기에 새틴은 끝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더는 마왕도 마신도 그 외의 신화적 사건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새틴은 알고 있다. 전쟁 후에 찾아오는 것은 평화가 아닌 전쟁 이후의 삶이다. 살인마가 잡힌 후 돌아오는 것이 평범한 일상이 아닌 다소 달라진 일상이듯.
책에는 첫 장과 마지막 장이 있지만 이야기는 아니다. 거시적 관점에서 이야기란 중간 점과 다른 중간 점 사이의 서술이다. 두 번째 중간 점을 지나도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끝난 이야기를 등지고 계속해서 존재하기에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두 번째 중간 점을 지났다. 새틴에게는 더 이상 스포일러라는 이정표가 없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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