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설마 그럴 리 없다. 애초에 여기 도망갈 곳이 어디 있다고.
새틴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기묘한 불안을 느꼈다. 마신이 불길한 소개를 할 때처럼 가슴이 쿵쿵 뛰었다.
“너 지금 뭘 하려고.”
새틴이 미처 말을 마치기 전에 케인은 새틴을 떠밀었다. 갑작스레 마신이 공격을 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빛이 삽시간에 몰려들었다. 새틴의 등이 땅에 닿은 순간 치솟은 것은 얼음이 아닌 불길이었다. 케인과 새틴의 사이를 불의 벽이 가로질렀다.
“케인!”
불길 너머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아니, 아니야.’
움직인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림자가 달렸다. 케인이 불길을 레인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새틴은 케인의 얼굴은커녕 마신조차 볼 수 없었다. 눈앞의 벽은 건너편의 거대한 적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케인은 새틴을 관객의 자리에도 남겨 두지 않았다.
새틴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마신이 일으킨 지진의 여파로 땅이 울퉁불퉁해 발이 미끄러졌다. 그러나 다친 데를 살필 때가 아니었다. 케인을 막아야 했다.
“케인,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꼬인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더 이상 무적이 아니다. 케인은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마신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행여 새틴이 무모한 시도를 할까 두려워서.
또 새틴이 사라져 버릴까 봐.
“케인, 멈춰!”
새틴은 불길을 헤치고 달려가 케인을 붙잡고 싶었지만 너무 뜨거웠다. 케인이 기억하는 새틴처럼 용감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새틴은 케인이 향한 방향으로 뛰었다.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 불길 너머에 케인이 있다. 마법사가 동요하면 마법은 사라진다. 리타의 불화살이 갑자기 사라지는 모습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케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를 기다리면.
‘그 전에 마신과 부딪치면 어쩌지.’
불길이 사라진 자리에 케인이 보이지 않으면. 이미 검을 들고 마신을 향해 뛰어들었으면. 에드워드처럼 가로막히지 않을까. 부상을 입고 언 땅 위를 나뒹굴지 않을까.
그럼 새틴은 어떻게 해야 하지. 리타처럼 울면서 달려가야 하나.
에드워드와 리타는 무사히 돌아가면 결혼할지도 모른다. 새틴은 케인과 함께 돌아간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누나가 아닌 사람과 함께하는 미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숨이 차오르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던 중, 불길이 사라졌다.
“케인!”
새틴은 곧바로 케인을 찾았다. 불길이 다시 일었다. 케인이 집중력을 잃어 마법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케인은 마신을 공격할 무기를 회수했을 뿐이다.
거대한 마신 앞에 선 케인은 어린아이 같았다.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작은 어린아이다.
아니다. 다 자란 어른이다. 더 약한 사람을 대신해 위험을 무릅쓰는 어른이다.
분명 달리고 있는데 새틴에게는 케인이 점점 멀어지는 듯 느껴졌다.
‘제발.’
마신이 저보다 작았을 때도 에드워드는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다. 리타는 마신에게 접근조차 못 했다. 케인은 다를까.
새틴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희망했다.
‘다치지 마. 그건 내 몫이야. 너는 사람들을 좋아하지도 않잖아. 제발 위험한 짓 하지 마.’
누구도 케인을 이 자리에 부르지 않았다. 케인은 그저 새틴을 따라왔을 뿐이다. 가짜인 줄도 모르고. 용사가 되어 사람들을 구하고 싶단 생각을 한 적도 없을 텐데, 사람들 따위 모두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했으면서.
희망이란 사실 확률을 보기 좋게 포장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천의 하나, 만의 하나. 어쩌면 그보다 큰 숫자 중에 하나. 실은 0이나 다름없는데 희망이라고 하면 왠지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질 것 같다.
마신이 몸을 굽혔다. 바닥에 떨어진 조그만 물건을 줍는 사람처럼.
―역시 불은 인간에게 어울려. 그렇지 않은가?
검은 옷자락이 가볍게 펄럭였다. 마신의 손등을 타고 오른 불길은 덧없이 사그라지고 케인은 검을 쥔 채 떠밀렸다. 케인의 검은 마신의 손끝에도 닿지 못했다.
“케인!”
새틴이 황급히 케인에게 달려가는 동안 마신은 그 모습을 관망하지 않았다. 굽혔던 허리를 펴고 손을 앞으로 들었다. 새틴은 마신의 움직임을 보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걸 알면서 인간은 어찌 늘 사르고 사르는지.
얼음이 솟구치며 쇄도한다.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운 끝은 비스듬히 위를 향했다. 맞부딪치는 순간 온몸에 크고 작은 구멍이 뚫리고 말 터.
그럼에도 새틴은 얼음의 창을 피해 달아나지 못했다. 그 끝에 케인이 쓰러져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애쓰고 있었다.
이윽고 새틴은 케인에게 닿았다. 그러나 그보다 눈 없는 얼음 창이 더 빨랐다.
“큭…….”
케인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지만 끝내 신음이 새어 나왔다. 허벅지를 관통한 얼음 조각을 어째야 할지 몰라 새틴은 주저앉은 채 입술만 떨었다.
“어, 어떻게, 잠깐만 기다리면, 누군가.”
새틴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도와줄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리타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에드워드는 이쪽을 보고 있지만 몸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먼 곳의 사람들? 저들은 그저 배경에 불과하다.
잠깐이 지나도 변하는 것은 없다. 기다린다고 누군가 나타나지도 않을 거다.
―일어나거라. 이번에야말로 너의 차례로구나.
새틴은 그 말에 따랐다. 케인의 손에서 검을 빼앗았다.
“듣지 마, 저건, 윽…….”
“금방 올게.”
“차라리 도망을.”
“정말로 금방 올 거야. 나를 믿어.”
마신의 말대로다. 불은 인간에게 어울린다. 무력한 인간들은 언제나 덧없는 불씨를 쥐고 어둠을 사르려 발버둥 친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새틴은 케인을 위해 불이 되고자 한다.
케인은 새틴을 붙잡으려 했지만 붙잡기는커녕 일어나지도 못했다. 새틴은 케인의 손을 뿌리치고 걸어 나갔다.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이건 다 연극이야. 나는 이 연극을 끝낼 수 있어.’
그렇게 믿어야 한다. 천의 하나? 만의 하나? 이는 그보다 훨씬 커다란 희망이다.
새틴은 케인을 등진 채 마신의 앞에 섰다. 거대한 그림자가 새틴을 집어삼켰다. 마신의 뒤에서 붉게 빛나는 노을은 마치 후광 같았다. 성스러움과 가장 떨어진 역할을 맡은 이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새틴은 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가 어디서 본 듯한 자세를 흉내 내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마신이 새처럼 날아들었다. 검은 머리와 옷자락이 연기처럼 흩날렸다. 얼음은 나타나지 않았다.
새틴의 검과 긴 손톱이 맞부딪쳤다. 굉음이 났지만 정가를 주고 산 장검은 부러지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푸른 불꽃이 탁탁 튀었다.
검을 쥔 손바닥이 찢어질 것같이 아팠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댔다. 이대로 가다간 결국 검이 부러지고 저 시커먼 손톱에 몸이 동강 나 버릴지도 모른다.
‘이대로 죽는 걸까?’
그리 생각한 순간 마신이 속삭였다.
―불 마법을 쓰세요.
새틴은 일순 얼이 빠졌다. 그러나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이 개씨발 사기꾼 새끼…….”
새틴의 입에서 저절로 욕이 나왔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런 욕설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순간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새틴은 아는 욕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소란을 떨 만한 상황도 아니다. 보는 눈이 많았다.
새틴은 애꿎은 이를 득득 갈며 마신을 노려보았다. 마신은 멋쩍어하지도 않았다. 관객을 의식하듯 음산한 표정으로 속삭일 뿐이다.
―어서 불 마법을 쓰세요.
“나는 마법사가 아니야. 이 사기꾼 새끼야.”
―당신은 마법사가 맞습니다.
“나는 마법사가…….”
새틴은 문득 떠올렸다.
다크에이지의 새틴은 마법사가 맞는다. 스승의 복수를 하고자 마왕을 소환한 흑마법사다. 설마하니 스승이 죽은 후에 마법을 깨우쳤을 리는 없다. 그랬다면 스승이라 부르지도 않았겠지.
―어서요!
마신의 재촉에 새틴은 엉겁결에 외쳤다.
“화산재! 아홉! 귀리!”
정말 마법을 쓸 수 있을까. 확신도 하지 못한 채 외친 공식은 리타가 자주 쓰는 불화살 마법의 공식이다. 그 조그만 불화살이 마신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확인했다.
괜히 시키는 대로 했다고 후회하려는 차, 아주 멀리서부터 빛이 모여들었다. 마력이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온 세상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마력이 모여들었다. 리타가 불화살을 만들 때나, 케인이 불의 벽을 만들 때와 같은 현상이나 규모가 달랐다. 어두워져 가던 하늘이 죄다 가려 하얗게 보일 정도다.
그만큼이나 모인 마력이 겨우 불화살 하나를 만들고 사라질 리 없었다. 운석 같은 불덩이가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쾅, 쾅, 쾅! 넓은 공터 곳곳에 불덩이가 내리꽂히자 여태 잠잠하던 용이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었다. 마신도 황급히 물러나더니 소리쳤다.
―감히 인간 따위가!
‘아니, 나 아니야. 내가 한 거 아니라고…….’
―안 돼!
새틴은 황당해서 뭐라 입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돌연 마신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그 순간 떨어지는 불덩이들 사이로 흰빛이 내리쬐었다. 그 어떤 최신형 텔레비전 액정으로도 구현할 수 없는 순수한 백색. 그야말로 성스럽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빛이었다.
새틴은 검을 내리는 것도 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 돼애애애애!
거대하던 마신의 몸이 서서히 작아졌다. 바람이 빠지는 풍선 같았다. 결국엔 처음 나타났을 때보다 더 작은 모습이 되더니.
―크아아아악!
연기가 되어 새틴의 품으로 내리꽂혔다. 정확히는, 조금 비싸게 산 성물이 들어 있는 안주머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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