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리타가 에드워드에게 뛰어갔다. 가 봤자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을 텐데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허옇던 얼굴이 이제 푸르게 질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새틴은 케인의 뒤에 숨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용기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에드워드가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을까. 일전에 말 머리 괴물을 만났을 때 에드워드가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는 모습을 봤지만 그때는 저렇게 중상이 아니었다.
새틴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생각하는 동안 케인도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사이 에드워드가 있는 곳에 도달한 리타가 울음을 터뜨리고 검을 뽑아 들었다. 손과 옷소매가 시뻘겋게 젖었다. 모두 에드워드가 흘린 피였다.
“죽여 버리겠어!”
리타는 형형히 빛나는 눈으로 마신에게 달려들었다. 마신이 눈살을 찌푸리고 손짓했다.
―소용없는 짓을.
얼어붙은 땅이 크게 요동쳤다. 새틴과 케인은 넘어지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시퍼렇게 언 땅이 움직이는 모양은 파도와 비슷했다. 드넓은 공터가 통째로 흔들리니 그 여파가 사람들 있는 곳까지 미쳤는지 희미한 비명들이 들려왔다.
의지만으로 지진을 이겨 낼 수는 없는 법. 리타의 몸뚱이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리타는 다시 일어나 달려들었다. 불화살이 날아들고, 또 한 번 땅이 요동쳤다. 리타는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동안 생각을 마친 케인이 중얼거렸다.
“이상한데.”
흔들리는 땅 위를 구르지 않으려 한껏 몸을 낮춘 케인의 모습은 사냥터를 염탐하는 육식 동물 같았다. 못 박힌 듯 제자리에 서 있는 마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새틴은 무릎걸음으로 케인에게 다가갔다. 땅의 요동 때문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긴 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다.
“무슨 소리야?”
“왜 죽이지 않지?”
“뭐?”
새틴이 당황해 케인의 팔을 붙잡자 케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지 시선은 계속 마신에게 둔 채 새틴을 얼렀다.
“새틴, 진정해.”
“아…….”
평소 케인은 리타와 에드워드에게 퉁명스러웠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죽기를 바랄 정도로 망종은 아니다.
케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새틴도 일으켜 세웠다. 어느새 케인이 새틴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케인은 새틴을 등 뒤로 보냈다.
새틴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죽여야 한다는 뜻은, 아닐 테고…….”
“당연하지. 내 말은 저자에게 지금이 좋은 기회가 아니냐는 거야.”
새틴은 케인의 의사를 이해했다.
두 차례의 공격 시도가 지나는 사이 리타와 에드워드의 거리는 꽤 벌어져 있었다. 마신은 달려가는 리타를 에드워드와 같은 꼴로 만들 수 있었다. 리타는 경황이 없었고 무방비했다.
그런데 마신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리타가 에드워드와 만나, 끌어안고, 걱정하고,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리타가 검을 뽑아 달려들고 나서야 공격했다. 치명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새틴은 불안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느리게 심호흡하며 강제로 머리를 굴렸다.
“생각을 해 보자. 우리는 저자의 의도를 알아야 해.”
마신은 무얼 위해 나타났을까.
새틴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마신이 몸을 돌렸다. 내내 에드워드와 리타를 바라보던 눈이 이제는 케인과 그 뒤의 새틴에게 향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또한 결과가 따르지. 이는 꼭 생각해 볼 문제야. 나는 왜 여기에 왔을까? 그리고 그대들은 어떻게 될까? 저 멀리서 구경하는 인간의 군집은?
“인간을 다 죽이러 왔겠지.”
케인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에드워드가 중상을 입은 상황에서 케인이라고 마신이 겁나지 않을 리 없는데 표정만은 태연했다. 오히려 아까보다 차분해졌다.
―인간이란 존재에게 꽤나 큰 자부심을 가지는군. 인간을 죽여 무슨 쓸모가 있다고.
“그럼 겸사겸사 인간도 죽일 셈인가 보지.”
케인이 마신을 상대하는 동안 새틴은 생각했다.
‘우리를 놀릴 셈이 아니라면 여기 온 이유가 있겠지.’
인간을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로 말하지만 그 말이 인간을 죽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목적을 수행하는 데 인간이 방해가 된다면 얼마든지 죽일 것이다. 인간도 걷는 데 방해가 되는 풀과 가지가 있다면 쳐내고 길을 만들지 않는가.
마신이 만들고자 하는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기서 겨우 인간 몇을 상대하며 시간을 끄는 이유는 또 뭐고.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인간 몇.’
새틴은 아까 마신이 한 말을 떠올렸다.
‘신의 사자.’
분명 그렇게 말했다. 새틴 일행은 대신관을 만난 후에 여기에 왔다. 대신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확실히 신의 사자라 할 만하다.
그러나 마신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을까.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 수 있어서? 그럴 리 없다. 그렇다면 마신이 아니라 신이라 자칭했겠지.
‘신의 사자가 자신을 찾아올 줄 이미 알고 있어서.’
그렇다면 이 판은 연극이 맞다. 리타와 에드워드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지만 그래도 연극이다.
“할 수 있어. 케인, 이길 수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저자는 마신이 아니야. 아니, 진짜 마신일지도 모르지만 여기에는 그저 역할을 하러 왔을 뿐이야. 마왕과 똑같아. 우리 모두를 죽일 생각이 아니야.”
생각을 말로 옮기며 확신은 더 강해졌다.
새틴은 케인의 등 뒤에서 나왔다. 케인의 표정이 굳었다.
“새틴, 앞으로 나가지 말라고 내가.”
“검을 빌려줘.”
아까 추락하며 새틴은 단검을 잃어버렸다. 만약 그때 잃어버리지 않았다 해도 단검을 쥐고 마신의 앞에 나서지는 않았을 거다. 단검으로는 멋진 장면을 만들기 어려우니까.
지금은 퍼포먼스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용사에게 어울리는 무기는 단검이 아니라 장검이다.
“내가 순순히 검을 내줄 거라고 생각했어?”
물론 케인은 새틴의 요청을 바로 들어주지 않았다. 도리어 새틴의 앞을 가로막으려 들었다. 이제까지 늘 그랬듯.
다른 때였다면 새틴도 괜히 방해가 되지 않도록 순순히 물러났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케인, 내가 나서야 해.”
대신관은 새틴 일행을 보고서 조합이 좋다고 했다. 새틴이 종종 생각하듯 탱딜힐 따위의 의미로 한 말이 아니다. 용사의 일행이 되기에 적합하다는 뜻이었다.
왕족과 신관, 거기에 더해 평범한 시민의 조합은 용사가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다는 증명이 된다. 이 사태가 끝난 후 사람들이 용사를 칭송하기 좋은 조건이다.
이건 연극이다. 시험의 형태를 한 연극이다. 다칠 수도 있고, 어쩌면 그 부상이 다소 심할 수도 있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나서야 한다.
“검을 줘, 케인.”
―드디어 움직일 생각이 들었나.
마신이 웃으며 읊는 대사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매우 적절했다.
‘저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비밀 병기 같잖아.’
사실은 그저 대역을 맡은 삼류 배우일 뿐인데.
어쨌든 새틴은 이 연극을 조속히 끝내야 한다. 어쩌면 이 연극에서 다른 배우들의 생명은 보장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신관의 기도로도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다고 했지.’
시간을 지체하다 에드워드가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아니, 나라고 안 죽는다는 보장은 없지.’
선택이 꼭 사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저 멋진 희생양으로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새틴이 과연 멋지게 희생할 만한 깜냥이 있는지를 차치하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생각할수록 그럴듯했다.
‘내가 뭐라고 사랑하겠어. 갑자기 어디서 툭 나타난 거잖아. 오히려 꼴 보기 싫어해야 맞지 않나?’
새틴은 깃털 덩어리에게 소원을 빌 적에 이 세계의 신에게 사랑받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누나가 가장 아끼는 인물이 되게 해 달라고 했지.
이곳이 누나의 상상에서 발현한 세계라고 해도 결국 이제는 별개로 존재한다. 이 세계의 신이 새틴을 특별히 사랑할 이유가 없다.
반면 이용하고 버릴 목적이라면 새틴만 한 적임자가 없다. 이 세계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니까.
‘아무튼 빨리 끝내야 해.’
새틴은 새삼 깨달은 사실에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지만 지금은 하소연이나 할 때가 아니다. 하소연할 곳도 없고.
―꾸물거리는구나. 이 내가 먼저 가기를 기다리는 것인가.
마신의 어깨가 부풀어 올랐다. 옷자락이 나부끼는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아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마신의 덩치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새틴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빨리 검 달랬잖아…….”
마신은 순식간에 원래의 두 배 크기가 되었다. 이제 거의 빌딩만 하다. 뜸을 들이면 더 커지지 않을까. 아파트만큼 커지면 어떻게 상대해야 하지.
얼이 빠진 새틴에게 케인이 불쑥 물었다.
“새틴, 이제라도 도망칠 생각은 없어?”
“뭐?”
케인은 마신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새틴을 보며 말했다.
“네가 빨리 뛸 자신이 없다면 내가 너를 업고 달릴게. 대가는 필요 없어.”
농담 같은 제안이다. 이 상황에 농담일 리는 없지만 진심이라기엔 너무 말이 안 됐다. 새틴은 웃지도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케인의 말이 이어졌다.
“넌 네가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늘 그랬잖아. 지금 저렇게 쓰러져 있어도 리타나 에드워드가 너보다 강해. 구할 수 없을 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리타와 에드워드를 두고 갈 수는…….”
“알겠어.”
케인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설득을 포기했다. 그 태도가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진심은 아니겠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