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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90화 (90/139)

90화

그저 전하는 말일 뿐이라도 송구한지 소장이 고개를 푹 숙였다.

리타는 소장에게 무어라 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 새틴뿐 아니라 케인과 에드워드도 리타와 소장의 대화를 들었다.

리타는 무어라 말은 하지 않고 그냥 눈썹만 찡긋했다. 소장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 이야기하자는 의미 같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요.”

“앗, 아닙니다. 전하께서 대업을 하러 가시는데 이 정도야 일도 아니지요.”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음.”

리타는 품에서 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새틴이 힐끗 보니 곧 해가 질 시간이다.

“아침이 오기 전에 돌아오고 싶군요. 그때까지 이 앞을 지킬 수 있나요?”

대충 정한 시간이었다. 안에서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돌아올 시간을 짐작할 수 있을 턱이 있나. 그러나 소장은 다소 과장되게 충성을 표했다.

“언제가 되었든 저희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요.”

리타는 망설임도 없이 통로에 발을 들였다. 에드워드가 약간 긴장한 기색으로 그 뒤를 따랐다.

‘용이 말한 악의 주인이 마신일까? 표현이 너무 대본 같지 않나?’

새틴은 소장이 나중에 손주들에게 무용담을 이야기할 때를 위해 최대한 가슴을 펴고 통로로 들어섰다. 나라를 구한 용사의 자세가 구부정했다고 얘기하기는 좀 그럴 테니.

‘경사 때문에 허리 펴고 걷기가 힘드네.’

새틴이 그리 생각한 순간 뒤에서 케인이 속삭였다.

“발 조심해.”

“알았어.”

“넘어져서 다치면 바로 업고 나갈 거니까.”

“아, 알았다고…….”

케인의 조언은 모쪼록 소장에게는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 ∞ ∞

길은 갈수록 넓어졌다. 아주 서서한 변화였기에 새틴 일행은 그 사실을 바로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알아차렸다. 동시에 경사 역시 사라졌음을 알았다.

리타가 벽을 슬쩍 건드리며 말했다.

“여긴 마왕성이랑은 좀 다르네.”

“그러게 말입니다.”

에드워드는 리타처럼 벽을 만져 보진 않았다. 다소 꺼림칙하게 느끼는 듯했다.

‘낯설어서인가?’

마왕성의 벽은 거뭇한 벽돌로 되어 있었다. 진짜 벽돌이었는지 아니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환상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익숙한 형태였다.

그러나 이곳의 벽은 매끄럽다. 소재가 무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유리처럼 매끈한데 광택은 나지 않는다. 현대의 세계를 살다 온 새틴도 모르는 소재였다.

‘그래서 SF처럼 느껴졌나?’

아무튼 벽의 소재는 뭐든 상관없다. 일행은 이 길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했다.

벽에 한 손을 댄 채 걸어 나가던 리타가 불쑥 물었다.

“정말로 다 계획된 거라면 우리 중 누가 죽거나 다치진 않겠지?”

“아마 그렇겠지요.”

“다른 사람이 그런 얘길 했으면 안 믿었을 텐데 말이야.”

“저도 그렇습니다. 신께서 누군가를 선택한다는 게 어찌 보면…….”

에드워드는 말끝을 흐리며 새틴을 돌아보았다. 신관이라는 직업과 별개로 이성적인 성격의 에드워드는 대신관의 말을 믿으면서 동시에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새틴 씨는 본인이 왜 선택받았다고 생각합니까?”

일단 묻고는 있지만 그다지 대답을 기대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새틴이 어깨를 으쓱이자 “그렇겠죠.” 하고 다시 앞을 보았다.

대답은 의외로 케인이 했다.

“선택받을 만하니 선택받았겠지.”

새틴은 솔직히 놀랐다. 케인이 신전의 일에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케인이 새틴의 옆으로 오며 덧붙여 말했다.

“가장 나은 인간이었다든지.”

어떤 의미에서 나은 인간이라는 걸까.

새틴이 눈을 굴리고 있으니 에드워드가 돌아보며 물었다.

“새틴 씨가 예전에 케인 씨를 구해 준 일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런데.”

“저도 그 일은 분명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만으로 선택을 하셨을까요?”

“지금 내 앞에서 새틴을 깎아내리는 거야?”

케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저를 위해서인 줄 알면서도 새틴은 살짝 쫄아서 거리를 벌렸다. 케인이 혀를 차고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리타가 에드워드의 편을 들었다.

“새틴이 널 얼마나 멋지게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행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고르진 않았을 거 같아. 선행이란 건 애초에 사람이 정한 기준에 따르는 거고, 시대마다 그 기준도 다르잖아.”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케인이 반박하지 않자 리타는 걸음까지 멈추고 이어 말했다.

“정말 가장 나은 인간이라 선택됐다면 어째서 더 나은 인간인지 우리가 알기는 어려울지도 몰라. 신의 기준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새틴은 슬쩍 케인의 표정을 살폈다. 그다지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리타의 말이 마음에 든 눈치다. 고개까지 끄덕이는 걸 보니.

리타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새틴은 화제가 완전히 잊히기 전에 슬그머니 물었다.

“억울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뭐가?”

리타가 흘끔 돌아보며 되묻는다. 에드워드도 무슨 뜻으로 하는 질문인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다. 새틴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보다 신실한 사람들이 있잖아. 나는 딱히 신을 믿는 사람도 아니고, 신전에서 기도를 한 적도 없는데 선택됐다고 하면 말이야. 아니, 기준은 물론 모르는 거지만.”

새틴은 왜 제가 선택되었는지 짐작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아마 대신관조차 모를 것이다.

억울하지 않을까. 새틴보다 훨씬 경건한 마음으로 신을 믿고 사랑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들 중 하나가 아닌 새틴이 용사라는 이름을 받게 되다니. 믿음이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 자체가 억울할 일 아닌가.

‘심지어 성대한 환영식까지 해 준다잖아.’

마왕성 토벌이 끝났을 때도 행진을 보러 나온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수도는 클로버랜드보다 몇 배나 크다. 환영식을 보러 나오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새틴으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을 보고 공황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 사람들이야 어쨌든 두려운 일이 해결되었으니 그저 기쁜 마음일지도 모르지만 에드워드는 아니다. 에드워드는 지금껏 새틴이 어떤 사람인지 봐 왔기에 별로 특별할 것 없다는 사실도 당연히 안다.

새틴이 용사라고 추앙받고 어쩌면 혜택을 누리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불편하지 않을까.

의외로 에드워드는 선뜻 대답했다.

“억울하진 않습니다.”

사실은 억울한데 아닌 척하는 기색은 아니다. 하지만 억울하지 않다 해서 석연찮은 구석조차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궁금할 뿐입니다. 아쉽기도 하고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저로서는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알지 못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거란 말을 굳이 하지 않고 새틴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에드워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좀 재미있긴 합니다. 토끼 한 마리도 잡아 본 적 없을 것 같은 새틴 씨가 마신을 무찔러야 하는 상황이 말입니다.”

“토끼 정도는 잡아 봤어.”

새틴이 조그맣게 항변했지만 에드워드는 “예, 그러셨군요.” 할 뿐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사실은 토끼만 잡은 게 아닌데.’

용사라는 위명에 걸맞게 검으로 잡은 것은 아니나 사람을 잡은 적이 있다. 아주 비겁한 방식으로.

‘케인도 속이고, 에드워드도 속이고. 사기꾼이 따로 없네.’

속이 쓰려 오는 느낌이라 명치를 문지르자 곧바로 케인이 상태를 살폈다.

“어디 안 좋아?”

“아니, 그냥…… 배가 고픈가?”

새틴이 멋쩍게 웃자 리타가 시계를 확인했다.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갈까?”

∞ ∞ ∞

잠깐의 휴식 후 제법 오랜 시간을 걷고서야 새틴 일행은 이동을 멈췄다. 내내 이어지던 통로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더는 나아가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가장 앞서 걷던 리타가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 물었다.

“저게 뭐라고 생각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통로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넓은 공간에 거대한 머리가 보였다. 느리게 눈을 껌벅이는 그것은 입이 크고 굵은 수염이 달렸다. 뾰족한 귀 뒤에 솟은 뿔은 사슴의 것과 닮았지만 훨씬 웅장했다.

‘진짜 용이네.’

아직 머리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검푸른 용은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뿔의 높이를 빼고도 머리가 사람의 키 정도 되었다. 그 뒤의 몸뚱이는 얼마나 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입을 벌리면 새틴 일행 정도는 한입에 삼킬 수 있으리라. 그야말로 고래 배 속을 헤매던 피노키오의 꼴이 되는 거다.

“그 사람한테는 말도 했다고 하지 않았나?”

검 손잡이를 쥐고 용을 쳐다보던 리타가 의문을 표했다. 아까 들어오기 전에 남서문 출입소장에게 들은 이야기다. 인근 마을 사람이 여기에 들어와서 용을 만났을 때는 뭐라고 말을 했다더니 지금은 잠잠하다.

“더 다가가 볼까요?”

에드워드가 검을 뽑아 조심스레 앞으로 나섰다. 리타가 질 수 없다는 듯 그 옆에 바짝 붙었다. 왠지 동참해야 할 분위기라 새틴도 따라가려 하자 케인이 목덜미를 붙잡았다.

“넌 가만히 있어.”

“아니, 나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명색이 용사인데 마지막까지 뒤에 숨어 있기만 하면 너무 민망하지 않은가. 보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케인은 새틴을 놓아주지 않았다. 새틴의 안전을 누구보다 생각하지만 새틴의 자그마한 자존심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아예 아무것도 못 하게 할 셈은 아닌지 슬쩍 달래는 소리를 했다.

“일단 좀 더 두고 보자고.”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간다고 생길 일이 안 생기진 않겠지.”

“그건 그렇지만.”

일단 새틴은 케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케인도 허리에 매달린 단검을 뽑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어차피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용은 다가가는 에드워드와 리타를 보면서도 가만히 눈을 끔벅이고만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용의 코앞에 다다랐다. 말 그대로 코앞이었다. 엎드린 용이 숨을 내쉴 때마다 리타의 머리가 가볍게 나풀거렸다.

“……저, 용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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