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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89화 (89/139)

89화

일행이 파인힐에서 수도까지 오는 사이 수상한 연기는 이제 바위산을 거의 뒤덮었다. 듣자 하니 산 아래 작은 마을의 주민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오늘 아침 대피했다는 모양이다.

덩달아 클로버랜드의 검은 안개에 관한 소문도 빠르게 퍼져 노인이나 어린이가 있는 집은 모두 겁을 내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새틴은 길거리에서 들었다. 겨우 몇 분 사이에.

“마왕을 무찌른 후에야 깨어났대.”

“무찌르지 못했으면 못 깨어났을 수도 있겠네.”

“그럼 죽었을까?”

“그야 모르지……. 하지만 좋은 꼴은 못 봤겠지.”

심지어 지금도 바로 옆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새틴은 그 사람들이 결국 깨어났으니 별일 아니었다고 판단했는데, 저들은 깨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을 생각하며 오들오들 떨었다. 부정적 사고가 이렇게나 해롭다.

함께 이야기를 엿들은 리타가 혀를 내둘렀다.

“분위기가 영 흉흉하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통제가 되는 편인 거 같은데.”

새틴의 대꾸에 리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가?”

“통제가 안 됐으면 지금쯤 약탈해서 도망치는 사람이 셀 수 없이 있었을걸.”

위기 상황에서는 약탈 행위가 쉽게 일어난다. 그러나 지금 수도는 위기 상황이라기엔 심히 평화로웠다. 가게들은 정상적으로 영업하고 사람들은 거리를 자유롭게 오갔다. 행여 수상한 연기가 수도까지 들이닥칠까 무서워하면서도 거주지를 이탈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게 다 신전의 홍보 덕이다. 신전에서는 새틴 일행이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시련을 해결할 용사가 준비되어 있다고 공표했다. 클로버랜드의 위기가 해소되었듯 수도를 비롯한 북부 지역들의 위기 또한 해결될 테니 안심하라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불안한 사람들에게 할인가로 축복을 제공하는 중이다.

‘용사 때문이 아니라 신전이 장사를 계속하는 걸 보고 안심한 게 아닐까…….’

새틴은 제법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발을 옮겼다.

일행은 남서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인근은 특히 붐벼서 마차가 지나갈 수 없는 지경이었다. 지금 새틴 일행이 꾸역꾸역 사람들 틈을 비집고 걷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이고, 죽겠다.”

간신히 남서문이 보이는 데에 이르렀을 때 리타가 한탄했다. 새틴은 그 한탄에 대꾸할 여력도 없었다. 사람들 틈에 끼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케인이 쑥 당겨 뽑아 주었다.

“고, 고마워.”

“이게 대체 무슨 바보 같은 짓인지 모르겠네.”

“하하…….”

진짜 용사가 되어야 하는 케인은 이 상황이 영 탐탁잖은지 내내 찡그린 얼굴이었다. 아까 신전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약간 혼이 빠진 듯 차분했는데 붐비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 다시 비뚤어진 성품으로 돌아갔다.

새틴은 자신이 용사로 지목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곰곰이라 해도 기껏 두어 시간 정도지만.

‘내가 연결 고리 같은 존재라서가 아닐까.’

새틴이 이 세계에 오기 전부터 이야기는 이미 꼬여 있었다. 원래의 새틴이 케인을 구하는 바람에 케인이 다크에이지와 정반대의 행보를 하게 되어 버렸으니까.

‘그래서 내가 갑자기 중요해진 거지.’

새틴은 원래대로라면 진작 사라졌을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의 중심부에 빌붙어 있다. 케인은 새틴 때문에 이야기에 억지로 발을 담그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내 케인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했지만 새틴이 원해서 여기까지 왔지 않은가.

‘친구를 지켜 준다는 명목으로…….’

근데 케인은 친구가 무슨 뜻인지는 알까. 목숨 빚진 친구라도 이렇게까지 달라붙어 다닐 필요는 없는데. 하여간 그놈의 목숨 빚만 없었어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사고는 걔가 치고 수습은 내가 하는 꼴이네.’

원래의 새틴을 원망해 보지만 그런다고 나아질 리 없다. 게다가 원망을 하다 보니 되레 미안해진다. 어설프게 챙긴 이성이 무방비한 감성을 자극했다.

‘걔도 겨우 열 몇 살이었는데…….’

정해진 이야기에는 어긋났지만 원래의 새틴이 한 일은 선한 행위였다. 케인과 다른 아이들을 악랄한 흑마법사의 손에서 구하려 하지 않았는가.

그리 생각하면 원망을 받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쪽이 죄책감을 가져야 옳다.

들어올 몸을 직접 고른 건 아니지만 어쨌든 ㅇㅇ는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새틴이 되었다. 고생이라곤 하나도 하지 않았다.

‘고생은 걔가 하고 꿀은 내가 빠는 거 같잖아……. 아니, 그런 거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그거지.’

심지어 지난 4년간 악랄한 흑마법사를 성심성의껏 돌보기까지 했다. 모르고 한 일이라지만 선인에게는 악행을, 악인에게는 선행을 한 셈이다.

‘안 그래도 쌓은 덕이 비루하다고 했는데 이제 마이너스가 되지 않았을까…….’

업보를 돌려받아 마땅한 인간이 졸지에 용사가 되었다. 민망하기 그지없다.

“휴우…….”

새틴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자 케인이 흘끔 내려다보았다.

“벌써 지쳤어?”

“아니, 괜찮아. 그냥 딴생각을 하고 있었어.”

케인은 미심쩍은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새틴은 열없이 웃을 뿐 더 말하지 않았다.

‘불쌍한 케인.’

친구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가짜를 위해 온갖 귀찮은 일을 다 하고 있다. 나중에 케인에게도 깃털 덩어리가 찾아가 보상을 준다면 참 좋을 텐데.

케인이 새틴을 빤히 보다 불쑥 말했다.

“지치면 말해.”

“어쩌려고?”

“업고 가려고.”

“아니, 아니야. 안 지칠게.”

새틴이 기겁하자 케인이 슬쩍 웃었다. 농담이었던 모양이다. 새틴도 어설프게 따라서 웃었다.

이런 친절이 사실 제 것이 아니라 생각하니 가슴께가 뜨끔거렸다.

‘차라리 내가 진짜 새틴이었더라면.’

∞ ∞ ∞

남서문 출입소장은 일행을 문밖까지 직접 안내했다. 케인은 그 친절이 조금 가당찮게 느껴졌다.

‘왕실이 행정에 관여하면 안 된다더니.’

케인은 국정에 관해 잘 모르고 별 관심도 없지만 주워들은 상식은 좀 있다. 4년 전 흑마법사 토벌이 그따위로 진행된 이유를 알아보다 이것저것 알게 되었다.

일전에 에드워드가 말했듯 신전과 왕실은 밀접한 관계다. 건국 때까지 한 집단이다가 이후에 분리된 터라 왕실은 신관들과 같은 이념을 공유했다.

반면 행정 기관들, 대표적으로 각 도시의 관청들은 왕을 모시기는 하나 신전의 이념까지 따르지는 않았다. 관리들은 개인의 신앙과 별개로 신전이 대중에게 너무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보았다. 사람의 믿음을 근간으로 하는 강력한 힘은 자칫 오염되기도 쉽다는 이유였다.

신앙이 당연하던 시대에서 더는 그렇지 않은 시대에 이르며 신전의 힘은 꾸준히 약화되었다. 동시에 왕실의 권한 또한 줄어들었다. 일부 사람들은 시간이 더 지나면 아예 왕실이 상징으로만 남을 거라고 예측했다.

그렇다 한들.

‘실제로 왕족을 눈앞에 두고 목을 뻣뻣이 세우긴 힘들지.’

출입소장은 리타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저자세였다.

“역시 전하십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시더니 벌써 이렇게 장성하시어 우리 수도 시민들을, 이 나라 국민들을 구하시는군요.”

“과찬이시네요. 아직 구하진 않았는데 말이에요.”

“전하께서 실패하실 리 없으니 이미 구하신 거나 마찬가지지요, 하핫!”

호쾌한 척 웃는 출입소장의 웃음소리에서는 진심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리타가 그 과장된 호의를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종종 그런 착각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실패할 리 없으니 제대로 줄을 서긴 했네.’

케인은 그동안 신탁이 진짜일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매한 대중을 조종하려는 신전 놈들의 수작이라고 믿었다. 바로 어제까지도 그 마음은 변치 않았다.

그러나 이제 조금, 아주 조금은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늙은 신관이 새틴을 용사로 지목한 순간부터.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데 새틴을 용사로 골랐다. 신이 새틴을 내보이고자 시련을 마련했다고 했다. 케인에게 그 말은 신이 새틴을 편애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정말 신이 있다면.’

있을 리 없지만 만약에 있다면.

‘새틴을 고르는 게 당연하지.’

∞ ∞ ∞

수상한 연기의 근원을 찾으러 바위산 꼭대기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 산자락을 넘실대는 연기 사이로 기묘한 통로가 보였다. 어찌나 기묘한지 새틴은 무심코 생각하고 말았다.

‘SF 영화 같다…….’

분명 연기 너머에 경사진 언덕이 있는데 통로는 그 언덕을 무시하고 아래로 이어졌다. 판타지로 치면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차원문 같고, SF로 치면 시공간 워프 포탈 같았다.

“누가 들어간 적이 있나요?”

안쪽을 들여다보며 리타가 물었다. 일행을 여기까지 안내한 남서문 출입소장이 공손히 대답했다.

“아침에 대피하던 인근 마을 주민이 들어가 봤다고 합니다.”

“무사히 나왔어요?”

“나오긴 했는데 아주 무서워하더군요. 용을 봤다는데…….”

“용이요?”

리타가 고개를 갸웃하자 소장이 턱을 문지르며 눈을 굴렸다.

“예, 뿔과 다리가 달린 긴 뱀이라면 용밖에 없지요.”

뒤에서 대화를 듣고 있자니 새틴은 의문점이 생겼다. 이 세계에 왜 용이 있는가.

‘여기선 드래곤이 나와야 하는 거 아냐?’

일종의 불문율이다. 서양풍 판타지에는 드래곤, 동양풍 판타지에는 용. 따지자면 여긴 서양풍 판타지에 가까운데 용이라니. 소장이 묘사한 생김은 확실히 용 같긴 하다만.

리타가 재차 물었다.

“또 뭔가 얘기하지 않던가요?”

“급히 도망쳐 나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아주 기기묘묘한 목소리였는데 그 내용이.”

소장이 잠깐 말을 멈추고 뜸을 들였다. 성질 급한 리타가 눈살을 찌푸리며 재촉했다.

“내용이?”

“너희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악의 주인께서 벌을 내릴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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