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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87화 (87/139)

87화

관청에서 빌려주었다는 마차는 외관이 아주 화려했다. 아마 제일 좋은 마차를 내준 것이 아닐까 새틴은 짐작했다. 리타가 그다지 탐탁잖아 하는 걸 봐선 관청의 자기만족이겠지만.

리타에게 떠밀려 에드워드가 먼저 마차에 오르고 다음으로 새틴이 오르려는 차, 기합이 잔뜩 들어 있던 기사가 말실수를 했다.

“전, 하가씨께 도움이 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전하라고 말하려다 급히 아가씨로 표현을 바꾼 듯했다. 당황해 이쪽을 보기에 새틴은 못 들은 척 딴소리를 했다.

“와, 말이 여섯 마리나 되네.”

둘러대려 한 말이지만 실제로도 좀 놀랐다. 말이 덩치가 작은 동물이 아닌데 여섯 마리나 줄지어 서 있으니 버스보다 더 거창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새틴은 육두마차를 타 본 적이 없었다. 길에서 지나가는 걸 본 적은 있지만 그나마도 자주는 아니었다. 대부분 화려한 마차이기에 부자들의 운송 수단이려니 했다. 이를테면 리무진 같은.

‘신데렐라의 호박 마차는 말이 몇 마리였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잠깐 하다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또 감탄했다. 그동안 타던 삯마차는 여섯 명만 앉아도 자리가 빠듯했는데 이 마차는 넉넉했다.

뒤따라 들어온 케인은 새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으로 알아채고 찬물을 끼얹었다.

“어차피 승차감은 똑같을걸.”

“아, 그러려나.”

마차가 아무리 좋아도 길이 험하면 엉덩이는 고생할 수밖에 없다. 새틴이 실망하자 리타가 마지막으로 마차에 오르며 말했다.

“이제 수도가 멀지 않으니까 도로도 괜찮을 거야. 레드우드 북쪽의 도시들은 대부분 수도까지 직통으로 이어지거든.”

“다행이네, 그거.”

일행이 모두 탑승하자 기사가 문간으로 다가왔다. 아까 말실수를 한 기사였다. 비장한 표정으로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하더니 문을 닫았다.

왜 그리 비장한 표정이었는지는 곧 알았다. 레드우드의 북문에서 출발한 마차는 거의 쉬지 않다시피 하며 달렸다. 말이 여섯 마리나 되는 데다 쉬는 시간까지 적어 새틴이 느끼기엔 경제속도로 달리는 자동차 같았다.

아마 그저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빨랐을 거다. 오후에 출발했는데 자정이 되기 전 다른 도시로 들어섰으니. 아무리 도시 간 거리가 가깝다 해도 범상치 않은 속도였다.

기사들은 이미 어두워진 도시를 둘러보지 않고 곧바로 식당을 겸하는 숙박업소부터 찾았다. 리타의 신분을 고려해서인지 급히 찾은 곳치고는 꽤 좋았다.

그곳에서 식사와 숙박을 단번에 해치우고 다음 날 또 강행군이 시작됐다. 내내 마차 안에만 있는 일행은 별로 고생스럽지 않았으나 기사들에겐 퍽 고된 일정이었을 테다.

육두마차는 그렇게 이틀을 꼬박 달려 사흘째 되는 날, 드디어 수도의 관문을 지났다. 마치 이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리타가 돌연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 내가 그동안 말하지 않은 게 있어.”

드디어 신분을 밝히려는 걸까. 수도에 도착했으니 더 감추기 어려울 성싶기는 했다. 수도에는 리타를 아는 사람이 분명 있을 테고, 괜히 다른 사람 때문에 비밀이 밝혀지느니 스스로 밝히는 편이 낫다. 그 비밀이 실은 비밀이 아니라는 점을 차치한다면 말이다.

“나는 사실…….”

리타가 평소 같지 않게 뜸을 들였지만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나는…….”

덜커덩. 마차가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일행 모두 창을 쳐다본 순간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마가리타 공주 전하, 소인 카트린이옵니다! 얼굴을 뵙기를 청하옵니다!”

∞ ∞ ∞

리타의 중대 발표가 망한 경위를 살피자면 다음과 같았다.

리타는 이틀 전 레드우드 관청에 수상한 연기에 관해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레드우드 관청은 그 요청이 합당하다 생각해 받아들였다.

잘됐다고 생각한 리타는 한 가지를 더 요청했다. 수도까지 빠르게 갈 수 있는 운송 수단을 빌려 달라고. (기사는 서비스였다.)

수상한 연기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상황이니 리타는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레드우드 관청이 빌려준 마차는 아주 유용하게 썼다. (기사가 나설 일은 없었지만.)

리타는 거기서 레드우드 관청과의 인연이 끝난 줄 알았으나 실은 아니었다. 레드우드 관청은 리타보다 한발 앞서서 생각했다. 미리 수도에 사람을 보내 두면 좀 더 빠르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마차보다는 역시 파발꾼이 빠르지.’

여기서는 물론 파발꾼이라 부르지 않겠지만 아무튼 간에.

새틴 일행이 마차를 타고 달리며 빠르다고 감탄하는 동안 레드우드 관청 소속의 어느 기사는 말을 타고 더 빠르게 달렸다. 먼저 수도에 도착해 수상한 연기에 관해 알리며 덤으로 공주의 귀환도 예고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상황이다.

“대신관께서 전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리타를 마중 나온 카트린은 보아하니 왕실에서 일하는 사람 같았다. 새틴은 이곳의 신분 체계를 정확히 모르나 대충 복장과 거느린 사람의 수로 추측했다.

‘귀족 얼굴 좀 쳐다봤다고 죽이는 세계관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카트린은 리타의 행색을 보고 조금 마뜩잖아하는 기색이었으나 무어라 말은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리타의 동료들을 보고도 설핏 눈살을 찌푸릴 뿐 별다른 트집은 잡지 않았다. 맡은 바 임무에만 충실한 사람이었다.

“친구분들도 함께 가시죠.”

전혀 안 내킨다는 얼굴로도 예의를 차렸다.

왜 같이 가야 하는지 몰라 새틴이 쭈뼛거리는 동안 에드워드가 나서서 물었다.

“저희는 왜 가야 합니까? 혹시 전하의 일행이라고 대접을 해 주시려는 거라면 괜찮습니다만…….”

“그런 게 아닙니다. 대신관께서 여러분 또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이라고 말하며 카트린은 에드워드, 새틴, 케인에게 차례로 시선을 주었다. 마치 리타의 일행이 몇인 줄도 이미 알던 사람 같다.

‘먼저 온 기사가 그것까지 말했나?’

아까부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없이 부끄러워하던 리타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되었다니 같이 좀 가 줄래?”

청유형으로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 싫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케인조차 군소리하지 않았다.

곧 리타를 제외한 일행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리타는 카트린과 함께 다른 마차에 탔는데 정말로 놀랍도록 화려한 마차였다. 여태 타고 온 마차도 어지간히 화려하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왕실 마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새틴은 저도 모르게 케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봤어? 금박이었지?”

“응.”

“금박을 입히면 뭐가 다른가? 덜 덥고 덜 춥다든지……?”

“겉멋이지 그딴 기능이 있겠어?”

케인은 심드렁했다. 리타가 공주라는 사실이나 금박을 입힌 마차 따위 케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반면 에드워드는 약간 상기된 얼굴이다. 리타가 공주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왜일까. 이유는 곧 에드워드가 스스로 밝혔다.

“대신관님을 뵙게 되다니, 이렇게 긴장해 본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칭 천사를 만난 적은 있지만 신을 본 적은 없어 아직 무교인 새틴으로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긴장감이었다. 교황이 방한했을 때 가톨릭 신자들의 마음이 저러했을까.

“이리 부르시는 이유가 무언지 짐작은 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지금 사태에 관해 얘기하시려는 게 아닐까? 진짜로 뭐가 나타난다든지…….”

“그뿐이라면 구태여 우리 모두를 부르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저 공표를 했겠지요. 실제로 눈에 보이는 현상들이 있으니 신전의 선전이라 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요.”

“그런가?”

새틴이 에드워드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차가 출발했다.

해는 이제 막 중천을 넘었다. 사람이 한창 많을 시간이어서 거리가 붐볐다. 새틴은 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화려한 마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쑥스러웠다.

‘정통 판타지라 다행이야. 아이돌물 현판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수만 명 앞에서 웃으며 노래를 해야 했을 텐데. 상상만으로도 무대 공포증이 생기려 했다.

새틴과 달리 케인은 태연한 얼굴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가만 보니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 같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언제쯤 클로버랜드로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 중이야.”

“빨리 돌아가고 싶어?”

약간 의외로워서 새틴은 눈을 크게 떴다. 케인은 픽 웃고 새틴의 오해를 정정했다.

“클로버랜드가 그리운 건 아니고.”

“아, 그냥 집에 가고 싶은 거야?”

“기껏 집을 구했는데 내내 놀려 두면 아깝잖아. 안 그래?”

“아깝기보단, 텃밭이 좀 걱정되긴 해.”

“텃밭이야 옆집 사람이 잘 보고 있겠지.”

“아니, 잘 봐줘도 안 봐줘도 걱정이라…….”

이렇게 여정이 길어질 줄은 예상 못 했다. 남의 텃밭을 내내 돌보고 있을 이웃이 걱정이다. 힘들어서 이미 관뒀다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힘든데도 계속 봐주고 있으면 어쩐다.

케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걱정을 사서 해. 알아서 하겠지.”

“그랬으면 좋겠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드워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새틴은 무심코 에드워드를 보았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두 분이 같이 살고 계십니까?”

“아, 사정이 좀 생겨서. 케인한테 신세를 지게 됐어.”

“사정이요…….”

왜인지 에드워드는 말꼬리를 흐리며 케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케인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늘 에드워드에게 퉁명스러웠는데 지금만은 몹시 상냥하게 말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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