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원래 살던 세계였다면 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해 봤자 무엇 하나 확인할 수 없겠지만 여긴 그곳과 다르다. 인간의 상상에서 탄생한 세계다. 누나는 교회도 안 다녔다.
판타지 소설 속에서 신은 종종 인간처럼 묘사된다. 심지어 인간보다 무력하기도 하다. 신살자는 너무 흔한 나머지 이제 제목에도 안 쓴다.
‘이번엔 그럼…….’
“무서워?”
케인이 불쑥 물었다. 새틴이 생각에 골몰하고 있으니 겁을 먹은 줄 알았나 보다. 새틴은 아니라고 하려다 멈칫했다.
‘내가 지금 안 무서워해도 되나?’
지금 새틴은 제가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한다. 제 목숨만 챙기면 된다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정말일까. 완전무결하지 못한 신이 새틴의 존재를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인 건 아닐까? 이야기를 원래의 궤도로 돌리려고 새틴을 지워 버리려 한다면.
‘아니, 꼭 무서워할 필요도 없지.’
죽음은 분명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일이지만 때로 죽음은 삶만큼 큰 의미를 갖는다.
‘누나의 명작을 위해 내가 사라져야 한다면, 그건 괜찮은 죽음 아니야?’
누나는 새틴을 가장 사랑했지만 1부 이후로는 등장시키지 않았다. 새틴이라는 인물은 역할을 마치고 사라졌다. 누나는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을 잘 아는 사람이다.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얘지.’
이야기의 끝에서 보상을 누려야 하는 사람 또한.
새틴이 빤히 쳐다보니 케인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그렇게 봐?”
태평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새틴은 새삼 걱정이 들었다. 케인은 용사가 되어야겠다는 사명감 따위 없는데 괜찮을까.
“케인, 넌 저걸 없앨 수 있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 저번처럼 어떤 존재가 없어져야만 저 연기가 없어진다든지.”
“어떡할 거냐는 게 무슨 말인데?”
“원흉을 찾으러 갈 거냐고.”
케인이 흠, 하고 뜸을 들이는데 리타가 끼어들어 대답했다.
“찾아야지, 당연히!”
“네가 아니라 나한테 물어본 거야.”
케인이 언짢아했지만 리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운하다는 양 입을 세모 모양으로 만들었다.
“같이 안 갈 거야? 우리 한편이잖아.”
“……갈 거지만, 딱히 네 공명심 때문은 아니야.”
“그럼 뭐 때문인데?”
하려던 질문을 리타가 먼저 해 준 덕분에 새틴은 가만히 케인의 답을 기다렸다.
케인은 눈썹 사이를 찌푸린 채 잠깐 생각에 잠겨 있다가 느지막이 대답했다.
“……거야.”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아무도 듣지 못했다. 리타가 “뭐라고?” 하고 되물었다. 케인은 드물게 민망해하며 다시 말했다.
“대신관에게 소원을 빌 거라고.”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원래의 새틴은 첫 번째 악역이다. 이야기의 시작점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런데 지금 새틴은 이야기의 종착점이 되었다. 새틴 때문에 케인이 주인공의 행보를 하고 있다.
‘이게 맞나? 이래도 되는 건가?’
∞ ∞ ∞
레드우드에 들어서며 새틴은 리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흑마법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리타의 주장을 신전에서 들어 주지 않아 화를 내고 있었다.
레드우드의 관청에서도 혹여 수상한 연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으면 어쩌나. 새틴은 내심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리타가 혼자서 관청에 다녀오겠다고 한 것이다.
‘신분을 밝히려는 모양이네.’
이미 리타의 신분을 아는 눈치인 에드워드는 바로 알겠다고 했다. 새틴도 그냥 고개를 주억였다. 케인은 애초에 따라갈 생각도 없어 보였다.
리타가 관청에 간 사이 남은 세 사람은 근처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원래는 레드우드로 오는 길에 간단히 식사를 할 예정이었는데 생각지 못한 일 때문에 그럴 새가 없었다.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던 케인은 식당에 들어가서야 얼굴을 폈다. 배가 고팠던 기색은 아니다. 케인은 새틴이 제대로 먹는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미 새냐고…….’
지금 끼니 걱정이나 할 때가 아닌데 케인 때문에 새틴은 맥이 빠졌다. 차라리 잘된 일 같기도 했다. 어쨌든 긴장은 다소 풀렸다.
식사를 대강 마친 후 리타를 기다리던 중 에드워드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정말 마신이 강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에드워드는 리타의 주장을 반신반의해 왔다. 그런데 이제는 믿을 마음이 생긴 모양이다.
“마신이 아니라도 무언가 불길한 존재가 나타나려는 건 분명하겠죠.”
“음, 그렇지.”
새틴은 슬쩍 눈치를 보다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동의했다.
“무슨 목적일까요. 이번에야말로 사람들을 해칠 셈일까요?”
“글쎄…….”
다크에이지에서 스승의 복수를 위해 새틴이 불러들인 마왕은 사람들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구구절절한 이유는 아마 나오지 않았을 거다. 독자들도 거기까지 요구하지 않았을 테고.
요즘은 몰라도 오래된 창작물에서 마왕이란 존재는 언제나 인간들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 마왕의 뒤를 이은 마신 또한 그러했고.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들이 같은 목적으로 움직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크에이지의 전개와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나고는 있지만 말 그대로 비슷할 뿐.
‘주체가 바뀌었는데 대상이라고 그대로일까.’
마왕을 소환한 사람은 새틴이 아닌 케인, 마왕을 무찌른 사람도 케인이 아닌 사람. 마왕은 기묘한 시험을 치른 후 사라졌는데 마신이라고 사람들을 해치러 나타났을까?
새틴은 판타지 소설을 본 짬이 있어 강제력이니 뭐니 하는 이유를 가져다 붙였지만, 정말 그런 게 있었을까?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건 아닐까?
새틴과 에드워드가 저마다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으니 케인이 심드렁히 말했다.
“목적까지 알 필요 있나? 죽이면 어쨌든 다 해결되는 거잖아.”
“적의 목적을 안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싸우지 않고 목적을 이룬다면.”
“도둑을 막겠답시고 돈 들고 도둑 찾아다니는 꼴 아니야?”
“전쟁을 돈으로 막는다면 아무도 어리석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전쟁일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말이지.”
마왕성 사태 때 수면병으로 쓰러졌던 사람들은 다들 무사하다. 검은 연기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없진 않다. 그렇다면 연기는 그저 이야기를 긴박하게 만들려는 미끼라는 뜻이다.
그럼 구태여 마신의 목적 따위를 알아볼 필요가 없다. 그냥 쳐들어가는 편이 빠른 해결법이다. 어차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새틴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질문의 화살이 제게 돌아와 새틴은 퍼뜩 허리를 세웠다.
“어, 뭐가?”
“새틴 씨도 죽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에…….”
새틴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괜히 목덜미를 긁적이며 시간을 끌었다. 계속 그럴 수는 없었기에 결국은 생각하던 바를 말했다.
“어쩌면 죽는 게 목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무슨 의미입니까?”
“마왕 토벌 때처럼 말이야. 이번엔 규모가 좀 클 뿐이라면, 사람들이 죽이러 가는 게 그 존재가 바라는 바일지도 모르잖아.”
“그때와는 좀 다르잖습니까. 괴물들도 나타나고 있고.”
“그것도 그냥 좀 서투른 홍보 활동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말을 하다 보니 좀 웃겨서 새틴은 어깨를 으쓱였다. 에드워드는 새틴의 말에 그다지 동의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누구도 정답을 알 수 없다.
때마침 리타가 돌아왔다. 관청에 들어갈 땐 혼자였는데 어째 지금은 뒤에 사람이 하나 붙어 있었다. 평범하게 차려입었지만 기합이 잔뜩 든 태도가 범상치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반기려던 에드워드가 리타의 어깨 너머를 보고 물었다.
“같이 오신 분은 누굽니까?”
리타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를 수도까지 호위해 주실 분이라고나 할까…….”
그 말을 들으니 저 사람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기사구나.’
전에 리타가 말하길 관청의 기사들은 따지자면 왕의 기사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리타가 신분을 밝힌 마당에 관청에서 태연히 손 놓고 배웅할 수는 없었겠지.
“그렇군요. 관청에서도 사태의 시급성을 파악한 모양이군요. 어서 수도로 가서 이 상황에 대해 전하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에드워드는 행여 새틴이 의문을 품을까 걱정이라도 되었는지 리타가 설명을 하기도 전에 아는 척부터 했다. 그 노력이 가상하여 새틴은 그냥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리타는 아무 반응 없는 케인의 눈치를 흘끔 보고 말했다.
“관청에서 마차도 빌려줘서 지금 바로 출발할 수 있어. 다들 바로 출발해도 괜찮아?”
“물론입니다.”
“응, 다른 볼일도 없고.”
대답하며 새틴이 케인을 쳐다보자 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하게 떠오른 미소를 보아하니 케인은 이 상황이 좀 웃긴다고 생각하는 눈치다.
‘그야 그렇겠지.’
새틴은 리타가 공주인 걸 처음부터 알았다. 에드워드는 리타의 입으로 들어서 알았고, 케인도 리타의 정체가 범상치 않을 거라 대강 짐작하고 있다. 즉, 모두가 리타의 비밀을 아는 셈이다. 그런데 모두가 모르는 체하고 있으니 웃길 만도 했다.
“그럼 서두르자.”
리타가 먼저 기사를 따라 가게를 나갔다. 리타의 말대로 가게 앞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사람은 리타가 나오는 모습을 보더니 재빨리 허리를 세웠다. 그 역시 기사로 보였다.
리타는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일행을 재촉했다.
“자자, 다들 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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