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리타와 에드워드, 새틴. 바꿔 말해, 케인을 제외한 일행은 머릿수가 많으면 좀 더 안전하게 전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을 보라지. 말 대가리가 달려들 때마다 사람들은 맞서는 대신 우르르 몰려다니며 피하기만 했다. 포식자 만난 송사리 떼 같았다.
사람들을 피해 몸을 움츠리며 새틴이 한탄했다.
“훈련된 사람들이었으면 나았을까.”
“모를 일이지.”
건성으로 대꾸하며 케인은 새틴을 뒤로 밀쳤다. 그리고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사람들을 쫓아 달려오던 말 대가리가 움찔 놀라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케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위협이 먹히는 건가?’
말 대가리들은 엉성하지만 갑옷을 입었다. 불화살을 보고 놀라 흥분하기 전까지 세 마리는 서로 간격을 유지했다. 겁먹은 사람들을 보고도 곧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일까.
케인은 곧 말 대가리들의 실체를 깨달았다.
‘이것들 전부 어정잡이로구나.’
늑대 인간들보다 지능은 높을지 모르나 싸움에 관해서는 반대다. 겁이 많고 소극적이었다.
지금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 다니는 인간 중 누구 한 사람 다치지 않았다. 굽 달린 앞발을 휘두르기만 해도 사람 머리 정도는 깨부술 수 있을 텐데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지.
물러났던 말 대가리가 식식 콧김을 내뿜다 발을 굴렀다. 달릴 준비를 하는 말 같은 모양새였다.
‘달려오려나?’
케인이 먼저 공격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새틴이 중얼거렸다.
“말은 자기 바로 앞을 못 본다던데.”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전에 다큐, 어디서 봤거든. 말은 시야가 아주 넓은데 대신 정면을 못 본대. 저놈들은 어떨지 모르겠네.”
여전히 말 대가리는 식식거리고 있었다. 케인은 가만히 말의 호흡을 살피다 뛰쳐나갔다. 말 대가리의 바로 정면으로.
“케인!”
새틴의 낮은 부름이 바람결에 흩어졌다. 케인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과연.’
기척을 느꼈는지 말 대가리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이미 케인이 코앞까지 접근한 후였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알겠다.
‘겁먹었어.’
케인은 놀라서 굳어 버린 말 대가리를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콧등을 깊게 베인 말 대가리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쳐들었다. 키이잉! 말 울음소리와 닮은 데가 있는 비명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나머지 말 대가리들도 냉큼 겁을 집어먹고 울부짖었다. 세상 흉포한 얼굴을 하고서는 마구 날뛰었다.
“공격합시다! 강한 놈들이 아닙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대장 사내가 상황을 파악하고 외쳤다. 그러자 몇몇 사람이 눈치를 보다 말 대가리들에게 달려들었다. 케인과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사람들도 공격에 합세했다. 두어 사람이 말 대가리의 몸통에 부딪혀 나뒹굴었지만 피해는 크지 않았다. 사람들은 용기를 얻었다.
난전이 되었다. 앞발을 쓰지 않고 몸통으로만 부딪혀 공격하는 말 대가리들은 금세 이곳저곳을 다쳤다. 흉포해 보이던 얼굴이 이제는 애처로웠다.
케인은 슬쩍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와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새틴은 공격하는 사람들의 행렬에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그럴 생각도 없어 보였다.
“어쩐 일이야?”
잘됐다 싶으면서도 의아해 물으니 새틴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가?”
“겁도 없이 나설까 봐 걱정했는데 얌전히 있으니까 좋네.”
“아, 뭐.”
멋쩍게 웃은 새틴이 단검을 품 안에 갈무리하며 말했다.
“여기엔 어른들뿐이니까.”
“그게 상관이 있어?”
새틴이 뺨을 긁적이며 픽 웃었다.
“내가 도와주겠다고 나서면 꼴이 우습잖아. 다들 나보다 강해 보이는데.”
틀린 말이 아니긴 했다. 저보다 강한 사람을 찾아다니던 이들 중 누구도 새틴의 뒤에 숨지 않았다. 새틴의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다고?’
케인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새틴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렇게 봐?”
무구한 표정에서는 자책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케인은 일단 대충 둘러대고 새틴을 안전한 데로 끌고 갔다. 괜히 난전이 벌어지는 곳 가까이 있다 날아오는 파편 따위에 다칠지도 모른다. 에드워드가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일부러 다칠 필요는 없었다.
나무를 엄폐물 삼아 몸을 감춘 후에야 케인은 새틴이 한 말을 생각했다.
‘어른들은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여태 케인은 새틴이 희생심이 특출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케인이 본 새틴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도 손을 보태지 못해 안달했다.
그런데 지금 새틴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새틴이 구해 줬을 때 케인은 아이였다. 그 시절 새틴은 어른이라면 아이를 도와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안개 낀 클로버랜드에서 수면병에 빠진 사람들은 아이와 노인들이었다. 시민 중 가장 약한 사람들.
기억을 잃고 어둠 속에서 헤매던 새틴이 마주친 사람 또한.
‘마법을 못 쓰는 흑마법사는 그냥 늙은이나 마찬가지지.’
즉, 새틴은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새틴의 친절은 오직 약자에게만 향했다.
그 사실은 케인으로 하여금 고뇌에 빠지게 했다.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4
서른 가까운 사람들이 괴물과 싸우는 데 동참했지만 모두가 공평하게 역할을 분배받지는 않았다. 직접 상처를 입어 가며 싸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분위기에 취해 고함만 지르다 만 사람도 있었다.
리타와 에드워드는 전자였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어 에드워드의 신성 마법으로 모두 치료했지만 체력은 그런 방식으로 회복할 수 없기에 일행은 파인힐에 도착한 다음 날 하루를 꼬박 쉬었다.
‘좀 민망한걸.’
새틴은 따지자면 전투에 임하며 고함조차 지르지 않은 쭉정이였다. 괜히 사람들 틈에서 방해나 될까 싶어 물러나 있었다.
‘아니, 이것도 핑계긴 하지.’
새틴은 분위기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의 무리가 불편했다. 그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움직일 일이 없어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제 확실히 알았다.
집단은 여러 개인의 집합이 아닌 새로운 생명체 같았다. 용감한 누군가가 앞장서면 덩달아 용감해지고, 비굴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면 다 같이 비굴해졌다. 아주 변덕스러워 전후의 행동에 맥락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어디나 그렇지.’
아버지와 살던 동네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했다. 한 부모 가정이라고 흰 눈으로 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잘해 줬다.
특히 오지랖이 넓던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와 사이가 좋아 그랬는지 마주칠 때마다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마다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아버지가 죽고 비밀이 까발려진 후였다. 만날 때마다 칭찬과 격려를 하던 사람이 “아들도 가담한 거 아니야? 걔도 눈깔이 이상했어.” 하고 한마디 하니 다들 거들었다.
‘내 눈이 그렇게 이상했나?’
누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무슨 생각 해?”
리타의 목소리를 듣고 새틴은 현실로 돌아왔다. 일행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와 내일 계획을 세우던 중이다. 리타가 묵는 객실에 딸린 응접실에서.
“그냥 쓸데없는 생각이었어.”
새틴은 멋쩍게 웃고 얼버무렸다.
과거의 일이야 어쨌든 중요한 것은 현재다. 큰일 없이 파인힐에 도착했으니 되었다.
“어제의 일은 제 책임이 큽니다. 평범한 여행자들이 모인다고 병사처럼 움직일 리 없는데 그 점을 간과했어요.”
사실 에드워드가 반성할 일은 아니었다. 시행착오는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법이다.
게다가 에드워드가 사람을 모으자는 의견을 냈을 때 리타와 새틴 역시 동의했다. 책임 소재를 따지자면 케인을 제외한 모두에게 있었다.
리타가 신경 쓰지 말라며 에드워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쑥 또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필 그 순간 에드워드는 티 테이블의 과자를 집고 있었다. 리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과자가?”
여관에서 고급 객실 투숙객에게만 무료로 제공하는 과자는 아주 맛이 좋았다. 말린 과일과 견과류도 잔뜩 들었다. 지금껏 새틴도 몇 개를 집어 먹은 터라 움찔 놀라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에드워드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니, 과자는 괜찮습니다. 마음 놓고 드세요. 제가 이상하다는 건 어제 나온 그 괴물 말입니다.”
“괴물이 왜?”
과자를 우물거리던 리타가 눈을 굴렸다. 어제 만난 괴물이 어땠는지 회상하는 모양이다. 에드워드보다 먼저 케인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왜 거기 있었을까. 굳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한복판에.”
새틴은 케인의 말을 듣고도 무엇이 이상한지 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곰곰이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맨 앞에 가던 마차의 마부가 가장 먼저 괴물을 발견했다. 그가 마차를 세우자 뒤따르던 마차들도 줄줄이 멈춰 섰다. 여행자들은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마차에서 내렸다가 괴물을 보았다. 새틴도 그때 괴물을 처음 봤다.
‘웃기게 생겼었지.’
상반신은 말인데 하반신은 사람이라니. 위아래를 잘못 조합한 켄타우로스 같은 괴물 세 마리가 길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통행료 걷는 산적들처럼.
외적인 특징 말고 이상한 점이 또 있었을까.
새틴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으니 케인이 과자를 하나 집어 내밀며 말했다.
“살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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