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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83화 (83/139)

83화

새틴이 하는 말을 들은 리타가 풉, 하고 웃었다. 리타는 케인의 바로 옆에 있었기에 그 소리는 새틴에게도 당연히 들렸다. 새틴은 민망해하면서도 다시 말했다.

“갑옷을 입었다는 건 지능이 있다는 뜻이잖아.”

“그냥 바지 안 입었다는 말이 웃겨서 웃은 거야.”

리타는 돌아보지 않고 연신 키득거렸다.

웃음이 오가는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말 대가리들과의 거리가 이제 겨우 스무 걸음도 되지 않을 만큼 가까웠다. 머릿수가 거의 열 배는 차이 나지만 아무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누가 먼저 공격에 나설까. 케인은 당연히 그럴 마음이 없기에 주위를 살폈다.

그때 덩치 큰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위압적인 생김새 덕분에 그 주변에는 여러 기회주의자들이 모여 있었다.

“놈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우선 한 마리를 협공합시다.”

남자는 말 대가리들이 인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지 계획을 크게도 떠벌렸다.

‘대장 놀이를 하는 인간은 어디에나 있지.’

케인은 먼저 나서는 인간을 싫어하지 않았다. 위험할지 모르는 일에 먼저 나서서 좋은 결과를 낸다면 당연히 존경해야 하지 않겠는가.

‘뭐, 나쁜 결과를 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교훈이 남지.’

대장은 솔선수범해서 검을 뽑았다. 곧 다른 일행에서 쭈뼛쭈뼛 두 명이 나섰다. 한 명은 대장과 마찬가지로 검을 든 여자고, 다른 한 명은 창을 든 남자였다.

대장은 그들의 합류를 반가워하며 말했다.

“오른쪽의 놈을 노립시다. 당신이 창으로 공격하면 어느 쪽으로든 피할 테니 그때 우리가 막겠소. 어떻소?”

“내, 내가요?”

창 든 남자는 대장의 상세 계획을 듣고 당황한 눈치였다. 일단 나서긴 했는데 선두 주자가 될 만큼 자신감이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다른 생각이 있소?”

대장이 묻자 창 든 남자는 잠깐 머뭇대다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마법사님이 먼저 나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창 든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곳곳에서 웅성거렸다.

“맞아, 마법사가 있었지.”

“마법사님이 해결해 주실 거야.”

“마법사님이 우릴 지켜 준다고 했잖아.”

방금까지만 해도 스스로 괴물을 물리칠 방법을 찾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들을 지켜 줄 마법사를 찾는다. 사람을 모을 적에 마법사가 있다는 정보를 흘리긴 했으나 그 마법사가 모두를 지켜 준다고 한 적은 없는데.

케인은 소리 없이 웃었다.

‘솔선수범하는 인간은 드물다니까, 역시.’

미리 얘기했던 대로 케인은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반면 리타는 잠깐 분위기를 보다 결심한 듯 앞으로 나섰다.

리타의 주변으로 흰빛이 모여들었다. 자주 쓰는 불화살을 만들려는 모양이다.

‘변변찮은 자질.’

예전에 학교에서 지낼 때 케인은 늙은이가 어떻게 마법사의 자질이 있는 아이들을 골라내는지 궁금했다. 직접 마법사가 되고서야 알았다. 정확히는 마법을 쓰는 데 능숙해지고서다.

마법에 자질이 있는 사람은 비유하자면 자석과 같았다. 어느 정도의 마력이 상시 주위를 맴돌았다. 그 상태의 마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케인의 자질은 스스로 평가하기에도 괜찮은 수준이었다. 몇 번인가 자질 있는 사람과 마주친 적이 있는데 모두 케인보다 못했다. 늙은이가 괜히 케인을 고른 것이 아니었다.

케인이 보기에 리타의 자질은 솔직히 변변찮았다. 그래서 의심스러웠다. 리타의 스승은 왜 더 나은 자질을 가진 제자를 고르지 않았을까.

답은 금방 나왔다.

‘신분 때문이겠지.’

마법사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마법사이기만 하면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케인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빵 하나를 먹던 사람이 빵 두 개를 먹게 된다면 분명 나아진 셈이니. 그러나 떵떵거리며 대접받고 싶다면 그저 마법사이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당장 쓸데가 없는 마법을 왜 대접하겠어.’

불 마법은 마법 중에서 제일 흔하다. 쉽게 번진다는 특성 덕분에 도구와 함께 사용하면 적은 마력으로도 많은 적을 해칠 수 있다. 대부분 도시의 치안청에 자리 잡은 마법사가 불 마법사일 거라고 케인은 장담했다.

반면 불이 아닌 다른 종류의 마법을 쓰는 이들은 대부분 연구에 골몰했다. 같은 계통의 마법에 관한 연구다. 미친 늙은이가 그러했듯.

이제 비교할 방법은 없지만 케인은 제 자질이 늙은이보다 월등하다고 확신했다. 늙은이에게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면 흑마법을 연구하는 대신 유일하게 아는 불 마법을 사방팔방 뽐내고 다녔을 테니. 늙은이의 자질로는 케인처럼 커다란 불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거다.

그리 생각하면 리타는 특이한 마법사다. 자질도 없는데 불 마법과 우박 마법을 쓸 줄 안다. 그리고 무언가 연구를 하는 듯한데 불이나 우박과는 관련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리타는 다른 종류의 마법을 더 알지도 모른다.

‘변변찮은 자질에 여러 종류의 마법.’

리타가 신분 상승을 위해 마법을 배운 게 아니라 그저 학문을 배우듯 마법을 배웠다면 이해가 된다. 부유한 귀족 가문의 자제가 돈으로 마법사를 고용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

그렇다면 지금 저리 앞으로 나서는 태도 역시 이해할 수 있다.

‘가진 자의 의무라는 거지.’

미친 늙은이에게 배웠다. 케인은 리타에게 별 호감은 없지만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몸을 빼지 않는 점은 높게 샀다.

“여러분, 저 괴물들에게 마법이 통할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러니 경계를 늦추지 마세요.”

리타가 엄중히 말했으나 사람들은 이미 리타의 불화살을 보고 경계를 늦췄다. 마법 문외한들이 보기엔 리타가 대단한 영웅으로 보였을 터. 슬금슬금 리타의 주변으로 이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차하면 리타를 방패로 삼겠다는 의도가 뻔했다.

그리 영리한 기회주의자들은 아니었다. 불화살이 나타난 순간부터 말 대가리들은 연신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런데 저들은 리타의 얼굴을 쳐다보느라 그 노골적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흥분한 건지 겁을 먹은 건지.’

어느 쪽이든 좋지 않다. 짐승들은 흥분해도 달려들고 겁을 먹어도 달려드니까.

케인은 슬그머니 새틴에게 고갯짓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새틴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케인은 새틴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귀에 직접 속삭였다.

“다른 쪽으로 가자고. 이 주변은 안전하지 않아.”

귓불이 왜 이렇게 부드럽지?

케인이 무심코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데 인솔자가 급히 외쳤다.

“괴물들에게 등을 보이지 마세요!”

그나마 영리한 인솔자는 말 대가리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깨달은 눈치다.

그러나 경고가 늦었다. 오른쪽에 있던 말 대가리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아까 대장 사내가 노리자고 했던 바로 그놈이다. 뒤이어 나머지 두 마리도 눈이 벌게져서 달려왔다.

“으아악!”

“저, 저리 가!”

사람들이 당황해 마구 흩어졌다. 리타가 불화살을 던졌지만 말 대가리는 더 흥분할 뿐 물러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얼간이들이 리타의 뒤에 매달렸다.

“마법사님! 어떻게 좀 해 주세요!”

리타가 급히 불화살을 하나 더 만들어 던졌지만 통하지 않았다. 갈기는 불화살이 스쳐도 멀쩡했다. 틈새의 먼지 따위나 태웠는지 갈기에서 광택이 났다.

푸르릉! 요구한 적 없는 갈기 손질에 화가 난 말 대가리의 눈이 허옇게 뒤집혔다.

리타가 낭패한 얼굴로 외쳤다.

“여러분, 무기를 드세요! 마법이 통하지 않아요!”

리타는 불화살을 다시 만드는 대신 검을 뽑았다. 그 모습을 본 얼간이들은 리타를 따라 무기를 들지 않았다. 다른 피할 곳을 찾았다. 비겁한 사람일수록 판단이 빠르다. 리타가 저희를 지켜 줄 수 없음을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그러는 사이 말 대가리가 리타를 향해 달려왔다. 체격 차가 있는 데다 저쪽은 갑옷까지 입었으니 부딪치면 타격이 작지 않을 터다.

리타도 모를 리 없건만 피하지 않았다. 행여 피하면 다른 사람이 다칠까 걱정이라도 되었을까.

‘바보 같기는.’

다행히 재빠르게 튀어나온 에드워드가 리타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휘둘렀다.

“리타 씨!”

말 대가리는 갑자기 튀어나온 에드워드를 보고 놀라 황급히 멈춰 섰다.

그 틈을 타 에드워드가 물었다.

“리타 씨, 괜찮습니까?”

“괜찮아!”

말 대가리의 표적이 된 리타를 도우러 나선 사람은 오직 에드워드뿐이었다. 말 대가리가 검을 피해 물러난 찰나 동안 사람들은 더 빠르게 달아났다.

‘오, 개판.’

케인은 그나마 뒤쪽에 있어 혼잡한 사람들에 치이지 않았다. 새틴은 출발 전에 산 단검을 쥐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단검을 사 주길 잘했지.’

매번 케인이 검을 빼앗아 가니 새틴이 골을 내 단검을 새로 사 줬다. 왜 굳이 단검이어야 하냐는 새틴에게 초보자에게는 장검보다 단검이 더 유용하다고 설명했다. 새틴은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틴에게 한 말이 거짓은 아니지만 실은 그 이유보다 다른 이유가 더 컸다.

단검은 근거리 무기다. 던질 수도 있지만 훈련하지 않은 사람의 투척은 항복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평범하게 쥐고서 공격을 하려면 적에게 바짝 붙을 수밖에 없다. 한데 지금처럼 거대한 적과 싸울 때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지금처럼 혼잡할 때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아가 저보다 팔이 두 배는 긴 괴물의 품으로 달려들 수 있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단검술에 아주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미쳤거나.

다행히 새틴은 제정신이었다. 다만 좀 실망한 기색이다.

“케인, 우리 완전 망한 거지?”

“유감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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